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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평점 :
꽤 많은 에세이를 읽어왔지만, 이번 만큼 기대되는 에세이집이 있었을까? 물론 이런 기대감은 ‘나’ 한정이겠지만 말이다.
이 에세이 저자인 ‘권남희’님은 번역가다. 그것도 일본 문학 번역가. 나 역시 나름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언젠가는 ‘일본어 번역가(내지는 통역사)가 되야지!’라는 생각도 잠깐이나마 있었기에, 유명한 일본어 번역가는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했고, 어떻게 일본어 번역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특히 ‘권남희’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번역가라, 더욱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나 역시 권남희님이 번역한 소설도 꽤 여러 권 읽어보기도 했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대신 저자의 일상이 많이 드러난다. 에세이집이니 당연히 그럴테지만. 그리고 문득 놀랐던 사실은 읽으면서도, 저자의 연령대를 계속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 에세이를 읽고 있다보면, 분명 내가 하루하루 보내는 평범한 일상과 다를게 없는 데, 뭔가 톡톡튀는 감성이 자꾸 느껴진다. 거기다 글빨(?)이 너무 젊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젊은 단어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분이 번역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내가 태어났던 바로 그 해. 와, 정말 유명한 번역가는 달라도 뭐가 달랐던 건가?! 싶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인맥이나 팔로맥(follow脈)이나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ㄴ다. 그러나 인맥의 수나 팔로어 수가 그 사람의 완성도는 아니니 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제일 구려 보이는 사람은 인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맥이 넓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다. P 065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P 085
그렇게 콘서트에 가기 시작한 지 4년째 봄에는 헬로콘, 여름에는 스콜콘, 겨울에는 헤프닝콘을 꼬박꼬박 가고 있다. 딸이 아이돌 그룹 덕질 할 때 “걔네는 무슨 콘서트를 일 년에 한번 씩해!”그랬는데, 막상 덕질을 해 보니 일년에 서너 번도 적더라고요. P 196
톡톡튄다. 그니까, 이 에세이집을 번역가가 쓴 거라는 배경지식 없이 읽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와, 이 사람은 SNS에서 글빨로 꽤 날리는 사람인가보다’ 라고. 그니까 뭐랄까, 인플루언서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내 부모님 연배. 이야, 정말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는, 이 정도 톡톡튀는 글 감성이 있어야 하나보다.
톡톡튀는 감성만 있는 건 아니다. 뭐라고 해야하지? 가슴 따뜻한? 포근한? 음... 뭔가 마음이 따뜻하게 적셔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분명 나에게도 익숙한 일상이고, 그 누군가에게도 익숙한 그런 일상인데 말이다. 권남희 번역가님이 써내려 간, 그녀의 일상은 분명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는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래도 이 에세이의 저자가 번역가인 만큼, ‘번역’에 대해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특히나 내가 유일하게 읽고, 말할 줄 아는 언어인 ‘일본어’인 만큼 더더욱 그렇다.
내 개인적으로 어려서부터 일본 문화를 접하여, 어떤 매체든 가리지 않고 보았다. 특히 활자, 예컨데 잡지/만화책/소설 등을 더욱 많이 읽었다. 처음엔 일본어 까막눈이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번역한 게 아니면 읽을 수 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 한국어판이 나왔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저 번역가님들이 한국어 번역본을 내주는게 고마웠고, 나에게 구세주였다. 내 나라 언어인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며, 나름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수준이 되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있는데, 이 작가의 책은 한국에서 번역이 되다가 중단되었다. 한국어판이 안나오니 당연히 원서를 사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만화책도 곧잘 원서로 사서 읽었던 터라, 소설 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본소설을 원서로 읽기 시작했다. 간혹 막힘이 있기도 했는데, 나름 수월하게 읽혔더랬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집에 있던 몇몇 권의 원서와 국내 번역본을 같이 두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땐 근거없는 자부심에 차올랐었다. 원서와 국내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서 ‘왜 이런식으로 번역을 했을까? 이 번역가는 이 만화, 소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기는 한거야?‘ 라는 문제제기도 하고, ‘하, 이런 번역본은 읽을 필요가 없겠어, 그냥 원서나 사서 읽어야지’라고 볼멘소리도 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렸고, 철도 없었고, 번역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몰랐던 나였다.
그렇게 어렸던 내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어 번역업무가 나에게 떨어졌다(타부서에서 해야할 업무인데, 일본어 할 줄 알던 사람이 나 밖에 없었을 뿐더러, 회사 입장에서는 번역을 위탁하면 돈이 많이드니, 내부 직원 쓰는 게 돈 안들고 좋지 않겠냐 라며^^).
소름 돋는 사실은, 이 번역 업무라는 게 그냥 일상적인 메일이나 이런 번역도 아니었다. 무려 약학기술 전문지(내지는 논문 같은..) 번역이었다. 그리고 이 번역 업무를 하면서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번역이란 건 정말 일본어만 할 줄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어린 날 번역을 왜 이따구로 하는지 볼멘소리를 했던 그 번역가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정말 어릴 때 내가 생각했던 번역가는 외국어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겪은 바 그게 전혀 아니었다. 외국어 만큼 우리 말도 정말 잘해야 하며, 우리말로 옮겼을 때, 원래 우리말인 것 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혀야 한다. 뿐만인가? 우리 말에서 같은 단어가 없을 땐 최대한 같은 의미를 지닌 말로 의역해야 한다. 무엇보다 번역가들은 의뢰받은 건에 대해 ‘일’을 하는 거다. 의뢰받은 번역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100%다 잘 알고 있는 분야라고 확신할 수 없다. 어렸던 나는 이러한 번역가들의 고충을 1도 생각치 않았던 거다.
아 ! 왠지 삼천포로 미친듯이 빠져버렸다. 「귀찮지만 행복해볼까」가 일반적인 에세이였다면 그저 책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을거다. 하필 이 에세이를 쓴 사람이 유명한 일본 문학 번역가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책과 다른 이런저런 사심이.... 하하하.
확실한 건, 권남희님이 번역하신 모든 책을 다 읽어 본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에세이에서 그녀가 소환한 번역본은 꼭 읽어보리라 생각하게 된 점이다. 특히 그녀를 가마쿠라로 이끈 「츠바키 문구점」은 꼭 빠른 시일내에 읽어보리라. 나도 딱 한 번 가본 게 다인 가마쿠라지만, 소설 속의 가마쿠라와 내가 보고 온 가마쿠라가 얼마나 다를지 궁금하기도 하고, 권남희님이 어떤 아름다운 단어로 번역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