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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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유명한 82년생 김지영을 읽어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본적도 없다. 리뷰를 쓰는 책 이름은 붕대감기인데, 왜 갑자기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 하는가? 내 머리속에 있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도서가 82년생 김지영이라서 그렇다. 한 번은 읽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 한국 사회에 펼쳐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자신이 없었기에 읽지 않았다. 따라서 비슷한 책들도 읽어볼 생각을 1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왠걸, 작정단으로 읽게 된 책 붕대감기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다른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하지만 서로 다른 페미니즘을 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건 10대부터 50대까지, 그녀들이 살아온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가 살아온 사회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하는게 당연한 사회였다. 반면 지금의 10대부터 20대 초반이 사는 사회는 여성이 왜 그렇게 희생을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세대는 어린시절 무언가를 희생하는게 당연하다고 교육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 반대의 가치관을 교육받게 되었다. 지금은 모두 2020년이라는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성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여성이라는 범주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게 당연한 일일진데, 오늘날 여성사회는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대표적인 문제를 꼽자면 진짜 페미’vs‘가짜 페미’, ‘탈코르셋vs 탈코르셋 반대논란이랄까? 대체 이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 책 붕대감기가 나에게 그 답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진경과 세연이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그녀들의 주변 인물(정확히는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가 가지치듯 엮여간다. 어찌보면 옴니버스형 단편소설집 같으면서도, 서로 서로가 관계가 있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볼 법한 소소한 이야기 일 수도 있고, 혹은 뉴스에서 볼 법한 그런 이야기 일 수도있다.

 

진경과 세연은 학창시절, 반에서 한 두명쯤은 있었을 법한 그런 아이들이다. 언제나 밝고 주변 인물들이 모두가 사랑하며, 빛이 나는 학생이 진경이다. 반면 언제나 어둡고, 주변 인물들이 피하며 , 콤플렉스 덩어리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세연이다. 하지만 이 둘은 신기하게도 친구가 되었다. 성인이 되고 그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진경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다. 세연은 그런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틀어졌다. 내 눈에는 그 이유가 오롯이 세연에게 있다고 보였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이가 자고 있어서 친구인 자기를 만나러 올 수 없는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데, 세연은 진경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그 마음은 질투 또는 미움으로 바뀌었으며, 학창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진경을 자기 입맛에 맞는 잣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세연은 진경을 보며, 정말 남자라는 족속은 왜 이렇게 내 친구를 피곤하게 할까, 생각했다. 너희들 때문에 진경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잖아.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왜 저렇게 남자가 없으면 못사는거야, 창피하게. 언젠가부터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중략) 하지만 세연은 진경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섭섭하고 무시당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경을 좋아했고, 경외심을 품고 진경이 읽는 책들과 쓰는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중략) 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P 134~137

 

세연은 그랬다. 어쩌면 어둡게 살아온 청소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유독 여성에게 씌어진 굴레에 대해 반발감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적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 외모가꾸기에 열중한 적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세연은 화장은 꾸밈노동이라 이야기한다. 맨얼굴을 예의 없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강요하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 있는게 요즘 말하는 탈코르셋 운동이며, 세연은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지지한다. 그러면서 본인들을 지지하지 않는 진경을 보며, 본인이 만든 그 잣대로 진경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경은 어떨까? 어린시절 진경은 엄마가 규정한 여성상에 맞춰 살았다. 여자는 언제나 단정해야하며, 쓸데없이 눈웃음 치지말아야 하며, 징징거리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귀게 못 막히듯 듣고 살았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그렇게 숨 막히는 삶을 살았으며 결혼하고 나서야 그 삶에서 벗어났다. 족쇄같은 삶을 벗어난 다음에야 진경은 조금씩이나마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삶이 제 친구인 세연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것뿐. 진경은 세연이 말하던 그런 여성운동에 대해, 여성들의 갈등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경이 그런 여성운동에 대해 생각하거나 평가할 의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네가 전에 말했었잖아. 여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너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너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게 있었다는 걸 알고 정말 많이 놀랐어. 그날 집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결혼한 여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들을 찾아보았어. 그 말들에 대해 내가 반발심이나 슬픔이나 분노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 처럼 보여서 너는 놀았을지도 모르겠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 없다는 걸 네가 이애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도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P065

 

그저 서로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고 가치관이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세연은 그걸 알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진경처럼 세연이 말하는 여성들의 갈등을 보지 않았으며,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괜히 정신이 더 피폐해지고, 마음만 안좋아지니까. 그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되는건데, 왜 그렇게들 서로 헐뜯지 못해서 안달들인지, 참 그랬다. 화장을 하고 싶으면 하는거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데 왜, 굳이, 무엇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주장하며 싸우려 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세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세연이 상상속의 진경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난 세연을 계속 공감할 수 없는, 최악의 캐릭터로 남겼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내가 아주 융통성 없는 사람처럼, 단지 수천 수만개의 비뚤어진 잣대들을 뭉쳐놓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말을 잘 못하곘어, 진경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삶을 사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겁이나서,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면서 그립고, 기분지 좋으면서 두려워. 내가 너한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는데. P 164

 

세연이 진경이를 미워하던, 표면적인 이유는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세연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기가 그토록 진경을 좋아하고, 또 미워했는지. 세연과 진경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에 생각을 하는 것 보다는 그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한다. 비단 진경과 세연이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애를 키우는 엄마들과는 달리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워킹맘 은정의 이야기, 동료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제자 채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채이를 어떻게든 돕고자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선생님 경혜, 친구사이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채이와 형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분명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야기 하는 페미니즘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작가는 그렇게 나이 든 페미니스트와 젊은 페미니스트를 각각 영악한 여자 꼰대/분노하는 천방지축 어린애로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문제삼는다. 그 프레임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중략) 그리고 이러한 늙은 여성/젊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페미니즘 이분법의 프레임은 선악의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전화하면서 페미니즘을 좋은 페미니즘/나쁜 페미니즘’. ‘진짜 페미니즘/가짜 페미니즘으로 나누는 진풍명품쇼로 전락시킨다. 그런데 도대체 좋은, 진짜 페미니즘은 어디에 있나. P 189~190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내 머릿 속에 떠오른 페미니즘은 적어도 이 책에서 나온 여성들이 외치는 그런 부분은 아닌 듯하다. 서로 간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그러면서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진짜 페미니즘인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라고 생겨난 단어는 아닐진데 말이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 머리속에서 정리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었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휴머니즘으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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