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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 -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13년 20일의 기록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3
헨드릭 하멜 지음, 김태진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평점 :
헨드릭 하멜, 그는 누구일까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선원이었습니다. 무역으로 인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했죠. 하멜을 포함한 살아남은 선원들은 조선 정부에 본인들을 돌려보내주길 수 차례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묵살되었습니다. ‘조선으로 들어온 외국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멜을 포함한 선원들은 조선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은, 하멜이 제주도로 표류해 온 때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몇 십 년이 흐른 1653년이라는 점입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쇄국정책을 단행하긴 하였으나, 일본 나가사키만큼은 서양과 교류의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네덜란드와 교류를 해왔고, 발전된 서양의 과학을 비롯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헨드릭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려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전해주기 위함이었죠. 그런 하멜이 일본에 가지 못하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발달한 서양의 문물을 가지고 말이죠. 조선의 입장으로 보면 굴러들어온 떡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무능했습니다. 무능한 국력 탓에 임란/호란이라는 두 차례 외세가 처들어 온 직후 였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정부는 발달한 서양 문물을 가지고 온 하멜일행을 써먹지 못했습니다. 하멜일행은 그저 머나먼 이국에서 온 신기한 사람들이었고, 구경거리였습니다. 또한 죄인(이방인이라는 이유 하나로..)이었습니다. 양반집 앞으로 불려가 동물원의 원숭이 마냥 있어야 했습니다. 관에 의한 강제노역도 해야 했습니다.
매일 우리는 고관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명령받았는데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우리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과도 같다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처음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골목길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집에서조차 구경꾼들 때문에 편히 쉬질 못했다. (중략) 때로는 노복들도 주인 몰래 우리를 불러내어 놀렸기 때문이다. -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中 48P
왕의 고문관들이나 그 밖의 고관들은 우리들에게 질려서 이제 그만 없애 버리자고 왕에게 간언했다. 3일 동안이나 이 문제에 대해 토의가 있었다. (중략) 장군은 우리를 죽이기보다는, 우리들 한 사람에 대해 조선인 2명씩을 붙여 똑같은 무기로 싸우게 하여 우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대결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하면 왕도 국민으로부터 공공연히 외국인을 죽였다고 인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우리 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中 53P
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몹시 호기심이 많고 듣고 싶어했다.이 나라에서는 구걸한다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걸이라도 해서 어려움을 타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일을 참아내기로 했다. 구걸과 남아 있는 식량과 필수품으로 추위에 나름대로 대비할 수 있었다. -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中 57P
하멜일행은 제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한양까지 머나먼 길을 끌려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하멜 일행 중 일부가 죽기도 했습니다. 한양까지 갔던 하멜일행은 또 다시 전라도로 유배됩니다. 이후 하멜 일행은 여수, 순천, 남원 세 고장으로 분산 배치됩니다. 이게 바로 당시 조선정부가 굴러들어온 인재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1666년 9월, 우여곡절 끝에 하멜일행은 탈주에 성공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13년 20일간 억류되어있던 조선에서 벗어나,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고, 억류된 기간만큼의 수당을 받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할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 보고서의 이름은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왕국(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섬(제주도)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 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 - 네덜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형의원 제위 귀하』 입니다.
참 길죠? 즉 우리가 알고 있던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억류되어있던 하멜이, 억류되어있던 기간 만큼의 임금을 달라고 회사에 제출한 ‘보고서’였던 겁니다. 좋게 보면 조선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한 보고서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불통한 국가였는지를 온 세상에 공개한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옮긴이 김태진 님은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17세기 선조들이 낯선 네덜란드인들 36명이라는 집단을 적절하게 응대하고 잘 활용하였더라면 서양 문명의 발달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요, 조선의 개화도 더 빨리 이뤄졌을 것이 아닌가! 그랬더라면 일제 침략도 지배도, 그리고 남북분단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일본이 나가사키를 통해 이 네덜란드인들과 교역을 함으로써 그들의 근대 국가 형성에 결정적 계기를 삼은 것임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바다. (중략)
하멜의 탈출 이후, 계속 유지되어 온 고립정책으로 조선은 기본 질서에 대한 존중이 손상되지 않은 채 왕국이 보존되었으며, 어떤 변화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에 강제로 조선이 외국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새로 온 사람들이 관찰한 조선과 2세기 전 하멜이 관찰한 조선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멜의 서술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코스트는 「조선 역사에 고요히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네들란드 배 화물 감독인 하멜은 조선의 예절과 관습에 대해 백성과 나라에 대해서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죄수로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고 하는 장소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과거 이야기의 모든 특징이 마치 오늘날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언어와 풍속, 양면에 있어서 토착적인 보수주의가 너무 강해서 200년 전 하멜의 표현은 오늘날 조선인들의 모든 생활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옮긴이의 서문 中
하멜일행이 나가사키로 탈출한 뒤, 일본 정부은 하멜 일행을 불러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해보았습니다.
Q 일본: 켈파르트 섬은 본토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으며 그 섬의 상황은?
A 하멜: 본토 남쪽으로부터 75km 내지 9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인구는 조밀하고 땅은 비옥하다. 그 섬 주위는 110km 정도 된다.
Q 일본: 제주에서 서울은 얼마나 먼가? 그리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은?
A 하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주도는 본토에서 75km 내지 95km 되는 곳에 있다. 그 후 14일간 말을 타고 갔는데 육로와 수로를 합하여 약 650km 정도 된다.
Q 일본: 너희들은 조선 땅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는가?
A 하멜: 짐작이 맞다면 조선은 남북 길이가 1,000km에서 1,100km정도 되고 동서로는 500km 내지 600km 정도 된다. 8개 도로 나뉘어져 있고 360개 고장이 있는데 크고 작은 섬도 많이 있다.
Q 일본: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군사 장비는?
A 하멜: 그들의 무기는 화승총과 칼, 활, 화살이며 그 밖에 조그만 창도 있다.
Q 일본: 조선에는 성이나 성채가 있는가?
A 하멜: 고장마다 작은 성채들이 있다. 산 높은 곳에 있는 성채도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그리로 피난간다. 그곳에는 항상 3년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Q 일본: 바다에는 어떤 종류의 군함이 있는가?
A 하멜: 고장마다 한 척의 군함이 있다. 각각의 군함에는 군인과 노 젓는 사람 합하여 2~3백 명씩 타고 있고 작은 대포도 몇 문씩 있다.
Q 일본: 절과 불상은 많은가? 예불은 어떻게 보는가?
A 하멜: 산에는 많은 사찰과 수도원이 있으며 그 안에 불상이 많이 있다. 우리 생각으로는 중국식으로 예불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Q 일본: 쌀과 그 밖의 곡식은 많이 생산하는가?
A 하멜: 강우량이 충분한 해에는 남부 지방에서 쌀과 그 밖의 다른 곡식이 많이 생산된다. 비에 의존하는 작물들이기 때문이다. 비가 적게 오는 해는 큰 기근이 든다. 목화도 많이 재배된다. 그러나 북부지방에서는 보리와 기장으로 연명해야 하는데 그곳은 추워서 쌀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Q 일본: 은광이나 그 밖에 다른 광산이 많이 있는가?
A 하멜: 몇 년 전에 은광을 몇 개 개발했으며 왕이 그중 1/4를 차지한다. 다른 광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Q 일본: 중국과 조선 사이가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A 하멜: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두 나라 사이는 큰 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다.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여름에는 맹수 때문에 여행하기가 위험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로 해로로 가는데, 겨울에는 꽁꽁언 얼음을 건너간다.
Q 일본: 전라도의 크기와 위치는?
A 하멜: 전라도는 조선 남쪽의 도인데 52개의 고장이 있다.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하고 식량 생산량도 많다.
- 서해문집 『하멜표류기』 中 P 78 ~ 88
일본과 하멜일행은 이런 식으로 총 54개의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일본의 질문들을 보며 무언가 느끼셨다면, 제대로 느끼셨습니다. 전부 조선의 안보, 경제와 관련된 것들이죠. 이후 약 2백년 뒤에 일본이 강화도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의 많은 것을 잠식했습니다. 조선의 땅과 해안을 측량했고, 각종 채굴권을 가져갔으며, 각종 불상 등 문화재를 털어갔고 전라도에서는 쌀을 수탈했습니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해외에 알렸던 기록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조선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아둔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