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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평점 :
이 책은 커피를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 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고, 종국에는 맛있는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 카페까지 차려버리는(!!) 오롯이 커피를 위한, 커피를 향한, 커피에 대한 에세이다. 하루에 적게는 3잔, 많게는 8잔까지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에게 ‘커피’에세이라니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 나에게 ‘커피’는 ‘생명수’ 였다. 저자처럼 커피의 ‘맛’이나, 커피를 마시던 그 시간을, 감성을 ‘추억’하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닌, 회사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한 ‘생명수’인 것이다. 옛날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분명 커피의 향을 느끼고자 했고, 카페의 분위기를 즐겼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멋진 카페를 찾아다니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던 그 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그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텀블러에 담겨있는 인스턴트 커피, 예를 들어 카NU, 이DI야 를 마시고 있는 신세다(인스턴트 커피를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특히 카누!).

나를 비롯한 우리 대부분은 언젠가부터 매일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은밀히 동경하고 있다. 우리가 동경하는 누군가가 ‘인생 커피’라고 극찬하며 근사한 사진을 직어 올리면 우리는 그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며 그 카페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 동네, 나의 단골 카페, 내가 즐겨 마시던 커피는 얼마나 하찮아지고 마는가. 따지고 보면 다른 이의 ‘인생 커피’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는 그 순간 슬퍼지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현실의 우리 자신인 것이다. P 044
다른 사람의 블로그나 인★그램을 구경하다 보면, 멋진 사진과 함께 ‘인생카페’, ‘인생커피’라는 해쉬태그를 정말 많이 보게 된다. 근데 진짜 사진만 보면, 그 사람은 정말로 커피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 같고, 그 사람이 가는 카페는 정말 커피를 ‘마실 줄’ 아는 사람들만 가는 카페처럼 보인다. 내가 마시는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인스턴트 커피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보이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물론 바리스타가 원두에서 직접 추출한 커피와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나는 지금 인스턴트 커피로 하루 하루를 버티는 데, SNS속에 있는 그들은 인생을 즐기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처럼 보이니까. 물론 실상은 나와 별반 다를 거 없는, 하루하루 직장생활에 고단한 사람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도 SNS속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엄청난 괴리감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시작은 그저 누군가의 SNS속에 있는 ‘커피’ 한 잔의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 속에서 누군가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묘한 우리의 현실이랄까.

만약 당신이 어느 날 평생 잊지 못할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된다하더라도 당신 또한 그날의 커피와 똑같은 커피를 다시는 마실 수 없단 이야기다. 그러니 맛있는 커피를 대할 때는 천천히 한 모금씩 입에 머금을 때마다 그 순간에 흐르는 음악과 주변의 공기, 빛과 온도,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기억하기 위해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근사한 순간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P 060
“아메리카노는 에프프레소를 뜨거운 물에 섞는 거잖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물과 에스프레소는 서로 다른 성분이라서, 서로에게 완벽히 섞이고 녺아들 시간이 필요해요. 그제야 진짜 아메리카노가 되죠.” P 138
사람과의 관계도 그가 말한 아메리카노처럼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이 필요한 것일텐데 나는 왜 그리 성급하게 그를 놓아버렸을까. P 142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하루에 적게는 3잔, 많게는 8잔의 커피를 마신다. 그것도 인스턴트 커피를. 물론 평일/휴일 마다 않고 그렇게 마신다. 회사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집에 있는 휴일마저도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까. 뿐만 아니다. 어디 여행을 갈 때는 인스턴트 커피 3봉을 텀블러에 타서 들고 간다. 가끔은 여행지에서 멋있는 카페에 들어가, 바리스타가 직접 추출한 커피를 마셔도 되는데 굳이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다.
n년 전 만해도 ‘나도 커피 맛을 알아야겠어!’ 라는 생각으로 유명한 카페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책 속에 나왔던 블루보틀도 가보았고(물론 일본에서), %커피도 가보았으며, 국내에서 박이추 커피공장도 가보았다. 하지만 내 입맛은 인스턴트에 길들여졌는지 이상하게도 그 모든 커피 맛이 카NU와 너무 비슷한게 아닌가! 깜장 카NU, 봄 한정 카NU, 겨울 한정 카NU가 그 맛이 각각 다른데, 그 맛들이 내가 찾아다니며 마셨던 맛있다는 그 커피들과 너무 비슷한거다. 내가 워낙 오래동안 카NU를 먹다보니, 그 맛이 뇌리에 박혀서, 그 어떤 커피를 마셔도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은 그저 내 하루 하루를 버티기 위한 ‘생명수’가 된 커피지만, 회사에서 마셨던 이 ‘커피’ 한 잔, 한 잔에 생각보다 많은 추억이 있었다. 입사 초기에 커피를 마실 줄 몰랐던 그저 어렸던 내 모습. (지금은 퇴사한)회사 언니들의 권유로 마셨던 ‘첫 커피’의 씁쓸한 맛. 그 언니들과 점심시간에 커피 한 잔 하면서 시덥잖던 이야기를 하고 웃고 떠들던 나날들. 내 10년 간의 추억이, 쉽게 보았던 인스턴트 커피 그 속에 있었다. 언니들이 회사를 떠난 지금, 어렸던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언니들이 없는 지금, 나는 내 이야기를 이 커피 한 잔에 고이 묻었다. 회사에서, 책상 앞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가끔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언니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