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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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본 호러소설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호러소설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두부 모서리에~였는데, 이번에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호러소설이다. 제목은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제목만 보았을 땐 어떤 느낌의 호러소설일지 감이 안왔는데, 표지를 보니 몽환적인 느낌이 나는 물씬 풍겼다.

 

내 개인적으로는 일본 호러, 미스테리, 추리소설을 자주 읽는다. 물론 올해는 몇 권 못 읽었지만, 나름 좋아하는 작가도 있고 그렇다. 그 중에서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가 쓴 소설을 꽤나 좋아했는데, 이 책이 딱 시마다 소지가 쓴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몽환적이라고 해야할지, 환상적이라고 해야할지, 거기다 심령현상 속에 숨어있는 슬픈 진실이라고나 할까?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포함한 이런 호러소설의 특징은 무작정 호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호러라고 하기엔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한다. 그 안에는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으며, 사람이 있다. 그렇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그저 호러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복잡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앞 표지에는 한 여인과 능소화로 추정되는 꽃이 그려져 있는데, 속 표지에는 능소화만 있다(능소화 맞겠지..?). 해당 책 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표지인데, 개인적으론 작가정신에서 발매한 한국판 표지가 훨씬 책 제목과 부합해보인다.

 

이 책은 8개의 단편을 엮은 소설이다. 각 단편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잃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능소화를 표지로 쓴 건 이 때문일까? 능소화 꽃말은 기다림이다.

 

8개의 단편 중 내 마음을 유독 건드렸던 이야기는 다섯번째 아이의 얼굴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가오루와 요리코, 그리고 가오루 친구들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도 수 없이 많이 있으니까. 수도없이 TV에서 나오는 문제, 학교폭력.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결말. 이 짧은 소설은 학교폭력 결말의 뒷 이야기를 그렸다.

 

 

- 아이의 얼굴.

요시나가 가오루에게.

오랜만이야, 나 기억나? 고등학교 때 자주 같이 놀았던 유키에야 (중략) 하지만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기로 했어. 꼭 알리고 싶은 게 있거든. 한편으로 너는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해. 만약 그렇다면 모르는 편이 낫겠지. 우리는 이쿠타메 요리코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하지만 넌 조금 거리를 두었잖아.(중략) 내 아이를 죽인 후에야 두 사람도 그랬다는 걸 알았어. 요리코가 우리에게 복수하는 거겠지. 너희는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을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우리랑 똑같은 일을 당할지도 몰라. 그럴까봐 걱정돼서 편지를 보낸다. - 후지야마 유키에

 

유키에는 내게 이렇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기를 낳지마. 우리처럼 될지도 모르니까.”

 

주인공인 가오루의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이 연이어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그 중 한 친구가 가오루에게 저렇게 무서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를 낳는다면 너도 우리처럼 네 아이를 살해할꺼야라고 말하듯이. 하지만 이 편지를 받은 가오루의 몸에는 이미 새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내 손으로 내 아이를 죽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일어나는 것이다. 이미 앞선 친구들이 다 그렇게 자기의 아이를 죽였고, 다음 차례는 바로 가오루였다. 무엇보다 이 사건들은 우연이 아닌, 다름아닌 가오루를 포함한 그녀들의 업보였다. 치기 어린 시절, 그저 약한 한 아이, 요리코를 괴롭히며 죽음으로 몰았던 그 죄 말이다. 그리고 요리코가 죽었음에도 그 누구도 반성하지 않고, 죽은 요리코에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던 그 죄. 그 죄는 그대로 본인에게 돌아왔고, 훗날 자기가 사랑할 자기의 아이에게 돌아왔다. 내가 괴롭혀서 죽은 요리코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내 아이로 태어나는 것. 이건 그녀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리라. 그랬기에 편지를 쓴 유키에는 자기와 다른 친구들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요리코의 복수라고 칭했다. 하지만 정말 복수인걸까? 정말 억울하게 죽은 요리코의 복수였을까?

 

적어도 내 생각엔 요리코가, 자기를 괴롭힌 그녀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괴롭혀 죽음으로 몬 그녀들의 아이로 태어나, 그녀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녀들이 자기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 죄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길 바랬던 기회. 하지만 다들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한번 요리코를 죽인것이다. 주인공인 가오루를 제외하고.

 

고개를 돌리자 고령자 운전 마크가 붙은 경승용차가 심상치 않은 속도로 후진하여 다가왔다. 타이어가 연석을 풀쩍 넘었다. 경승용차 뒤범퍼가 딸과 충돌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며 딸을 밀쳐냈다. 병원에서 눈을 떳을 때 여기가 어디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고가 난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간호사를 불러 딸이 무사한지 물었다. 딸에게는 긁힌 상처 하나 없다는 설명을 듣고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감이 솟았다는 사실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었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네가 안 다쳐서 다행이야, 정말로.”

요리코

그렇게 부르자 딸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생 네게 애정을 쏟을게. 가엽게도 다른 세 사람은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걔들 몫까지 널 사랑할게

딸은 놀란듯한 표정을 지엇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오루는 요리코를 닮은 자신의 아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정말 부단히도 노력했다. 앞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세 명의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요리코를 닮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 노력은 요리코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으로 인한 것 보다는, 내 속으로 낳은 내 아이를 위한 노력이었다.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려 노력하였고, 해치지 않기위해 자신의 건강을 놓았다. 가오루의 이런 노력과 함께, 가오루의 마음도 점차 변해갔나보다. 이 아이는 자신의 아이이기 이전에, 요리코라는 사실을. 내 아이로써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그 마음이, 내 아이이자 요리코를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변해간 것이다. 그 덕분인걸까? 가오루는 본능적으로 위험에 처한 자기의 아이를 살리고, 자기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가오루는 그제서야, 요리코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었고, 요리코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가오루는 자신의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되었다.

 

학교폭력, 있어서는 안 되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아직도 많은 곳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피해학생은 끝까지 약자였고 그 아픔을 홀로 삼킨다. 가해자들은?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조그마한 징계라도 받으면, 피해학생 때문에 본인들이 고생을 한다며 난리를친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가해자는 아무일 없고, 피해자만 더욱 피해를 받는 결과만 보아왔다. 그래서 더욱 이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렸나보다. 이렇게 책 속에서나마 가해자들이 벌을 받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보다.

 

이 책은 호러소설이지만, 호러소설이 아니다. 이 책의 장르나, 표지만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분명 무서움을 조성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 책에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담담히 감내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내가 있었다.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 그 무언가를 마음 속에 남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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