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 - 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오래된 책방 11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1
유득공 지음, 정진헌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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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역사 속에 살던 사람들이 지은 책을 읽어보고 싶었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원문이 아닌 한글로 번역된 책으로! 어려서는 인현왕후전이나 박씨전, 구운몽 같은 어린이 동화용으로 나온 고전을 주로 읽었다. 다 커서는 매천야록이나 조선상고사 같은 책으로 취향이 옮겨갔다. 그러다 한일고대사 쪽에 관심이 생기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무슨 책을 살까 여기저기 골라보던 중 서해문집이라는 출판사에서 오래된 책방시리즈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책 목록을 보니 세상에나! 내가 그토록 읽고 싶었고, 읽었고, 읽으려 했던 역사 속 사람들이 집필한 그런 책들이었다. 맘 같아서는 한 번에 다 사고 싶었지만, 일부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또 비용의 압박도 있고 해서 우선 딱 3권만 구매했다. 그중 한 권이 바로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원문을 옮긴 이는 정진헌님).

 

기원 전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가 사라졌다. 발해도 그 중 하나였지만, 발해가 우리의 역사라고 이야기 한 사람은 없었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 한 뒤 약 800년이 지났다. 조선 22대 왕 정조가 재위하던 1784. 그 해 발해가 한반도의 역사라고 인지하고, 알리려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유득공이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때는 바야흐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불리우는 영조, 정조 재위기간.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서얼들이 정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관직에 대한 서얼철폐는 정조 때 허용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조 때 부터 서얼들이 관직에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공식화 한게 바로 서얼소통절목을 반포한 정조였다. 유득공은 영조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채용되었다. 이 때 정조의 지원하에 채용된 대표적인 사람들은 유득공을 포함하여 이덕무, 홍대용, 박제가 등이 있다. 우리가 북학파 내지 실학자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들이다.

 

요컨대 북학 사상은 이용과 후생을 통해 정덕이라는 유교적 이상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중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규격 벽돌을 만들고, 수레를 스며, 물이 스미지 않는 배를 만드는 기술, 그리고 상업을 장려하는 등의 제도들을 배우자는 것이다. _P 014

 

유득공은 정조의 지원 아래 정말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곳을 다녔다. 그렇게 얻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을 집필했다. 유교적인 모순에 빠진 조선사회를 바꿔보고자 노력했다. 수 많은 사회문제에 대해 그저 한시적으로 문제 해결방안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파악했다. 조선의 고질적인 폐쇄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 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허용되는 방안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으며 유득공의 날개는 꺾였다. 유득공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실학자들의 날개가 꺾였다(이후 시기는 할말하않). 정조 사후 유득공에 대한 행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집필한 책도 없다. 유득공이 집필한 모든 책은 정조 재위기에 발간된 것들 뿐이다.

 

자 그럼 이 책의 제목인 발해고로 와보자. 유득공이 발해고를 집필한지 이 백년이 흐른 지금, 실제 발해의 터를 조사하고 연구한 지금의 발해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말 소름돋게도 이백년 전과 지금 연구된 발해의 역사는 거의 흡사하다. 이 백년 전의 사람인 유득공의 연구에서 많은 진보가 없는 지금의 사학이 문제인건지, 아님 이백 년 전에 태어난 유득공이 세상을 앞서 갔는지는 모르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거다. 유득공은 발해에 대하여 치밀하고 끊임없이 연구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유득공이 어떠한 책을 인용하였는지 한번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중국 역사서가 많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며 제일 오래된 역사서는 고려 초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인용문헌에는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역사서 삼국유사는 고려 중기에 편찬되었다.

 

반면 인용문헌 제일 첫번째 줄에 위치한 중국 역사서 구당서945년에 편찬되었고, 신당서는 구당서의 오류를 잡기 위해 1060년에 편찬되었다. 발해가 926년에 망했으니, 구당서는 발해 멸망 직후에 쓰여진 것이다. 일본 역사서 속일본기797년에 편찬되었다. 이 당시는 발해 최전성기였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편찬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편찬한 역사서가 아닌, 외국 역사서를 인용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당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기록들도 정보가 많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는 당대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아주 방대한 양과, 세밀한 정보가.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다. 그러면서 전 왕조인 고려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려가 발해사를 짖지 않은 것을 보아,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 것이 남북국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무릇 대 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가졌던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 땅으로 그 동쪽, 서쪽, 북쪽을 물리쳐서 크게 했을 뿐이다. 무릇 김 씨와 대 씨가 망하게 되자 와아 씨가 이를 통합해서 소유했으니, 이것이 고려다. (중략) 끝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 이북 지방과 압록강 이서 지방이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몰랐다. 여진을 꾸짖고자 했으나, 할 말이 없었고, 거란을 혼재려고 했지만 그 근거가 없었다.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말로 한탄스럽구나! _P 037 ~ 038, 유득공의 서문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 역사 어린 시절 국사시간에는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배웠다. 꽤 오래 그렇게 배워오다가, 학교 졸업 뒤 한능검을 한번 보고자 인터넷강의를 보았을 때, 그 때서야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보았다. 유득공 사후에도 꽤 오랜 시간 남북국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라고 가르쳐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발해의 역사를 잊고 살았기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일으킨 것이다. 이거 참.. 유득공이 지하에서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발해를 보자. 유득공의 발해고는 크게 9가지 테마로 나뉘어있다. 발해 역대 임금을 기록한 군고(君考), 발해의 신하들을 기록한 신고(臣考), 발해의 지리를 기록한 지리고(理考) 그리고 발해의 관직, 의장, 특산물, 언어, 외교문서, 발해의 후예를 기록했다. (한자쓰기 귀찮..통으로 ㅋㅋ)

 

아주 어릴 때라면 한반도에 있던 다른 나라에 비해 발해가 익숙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KBS에서 사극 드라마 대조영을 방영해주었고, 나는 본방사수를 할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 였기에 ㅋㅋㅋㅋ 라고 해봤자 진국공(대걸중상), 고왕 (대조영) 이야기에서 끝이지만 하하하하.

 

고려 멸망 후 고려 유민 대조영은 세력을 규합하여 698년에 동모산에서 고려를 이은 나라, ()을 건국했다. 713년에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책봉이라고 해서 무작정 반감을 가지면 안된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는 중국과 정말 오랜기간 동안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적어도 고려까지는 정말 표면상 책봉-조공 관계였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후.... 또 다시 할말하않 ㅠㅠㅠ

 

표면적인 책봉-조공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연호다. 발해는 황제국만 사용하는 연호를 사용했다. 제일 가까운 예시를 들자면 조선 말 고종이 이제 조선은 황제국이다라고 칭하며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한 뒤, 연호를 광무라 선포한 거랄까..?

 

고왕 대조영 이후로 2대 왕 무왕 대무예와 3대왕 문왕 대흠무 까지는 우리 국사책에서도 배우는 인물이다. 무왕은 장문휴를 시켜 당나라를 공격했는데, 이는 우리 역사에서 외국을 침범한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 무왕의 무는 한자로 ()로 표기한다. 이 시호를 통해서 무왕이 얼마나 무력을 잘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무왕 때 발해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흡사 고구려 광개토대왕 마냥..)

 

문왕은 아버지 무왕과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아버지가 영토 확장 같은 외치에 힘을 썼다면, 문왕은 내치에 힘을 쏟았다. 이 역시 시호인 ()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왕보다 유명한 사람은 실상 따로 있다. 발해고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 국사책에는 나오는 여인 두 명! 문왕의 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다. 그래서 나에게도 문왕은...두 공주의 아버지 (...) 로 인식되었다. ! 그리고 문왕 때, 당나라는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올려서 책봉한다.

 

문왕 다음 왕은 문왕의 형제 내지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대원의다. 당시 문왕이 너무 장수하는 바람에 아들 대굉림이 아비보다 일찍 죽었다. 다행히 대굉림에게는 아들 화여가 있었에게, 정석대로라면 문왕 사후 문왕의 손자인 화여가 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왕이 된건 문왕의 사촌 대원의. 추정컨데 대원의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의는 살아있다! 대원의는 즉위 1년도 안되서 폐위되었고, 순리대로 대화여가 왕위에 올랐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는 스토리는 가깝게는 단종-세조(수양대군), 고려 헌종-숙종, 백제 사반왕-고이왕 정도에 이어 발해도...!!

 

근데 소름 돋는건 순리대로 왕위에 오른 성종 대화여는 즉위 1년만에 사망. 결국 다음 왕위는 대화여의 또 다른 삼촌이 이었다. 뭐 근데 발해 역대임금들을 잘 보니 장자승계랑 형제승계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그놈의 유교 때문에 장자우선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나보다 ㅠㅠㅠ...

 

발해는 당나라 때부터 자주 여러 학생을 경사로 보내어 태학에서 고금의 제도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낭다라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_ P 062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 편

 

고려 태조 177월에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고려로 왔다. 태조가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주고, 왕실의 종적에 덧붙였다. 원보로서 백주를 지키게 했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_P 097 대연찬의 세자 대광현 편

 

926년 발해가 멸망했다. 거란 요나라가 처들와 발해의 수도 홀한성(상경용천부)을 함락시켰다. 요나라는 발해의 땅에 괴뢰국을 세웠다. 발해유민들은 일부는 요나라로, 일부는 대거 신생국가 고려로 유입되었다.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발해가 한 순간에 멸망했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하다. 예전에 한 다큐에서 백두산 대 폭발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발해고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긴 하지만, 현재 백두산 대폭발 추정연도를 보았을 때 930~ 940, 고려사와 당대 일본의 기록을 비추어 볼 때 946년 이다. 뭐 백두산 대폭발을 정통으로 맞지 않았다고 해도, 대폭발 이전의 전조 현상은 분명 있었을 거고, 그런 전조현상은 일종의 자연재해로 민심이 이반되고, 국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지속적으로 거란이 침입하고 있었으니 업친데 덥친격. 그렇게 발해가 멸망한 게 아닐까? 라는 사심 100% 담긴 추정이다.

 

명실공히 우리의 역사 발해, 하지만 잊혀진 역사 발해. 중국이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바꾸는 동북공정을 보며 역사왜곡을 한다며 중국 탓만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발해를 모르고 있다. 발해를 지키기 위해서는 발해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득공의 발해고가 더욱 특별한 이유다

고려가 발해사를 짖지 않은 것을 보아,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 것이 남북국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무릇 대 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가졌던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 땅으로 그 동쪽, 서쪽, 북쪽을 물리쳐서 크게 했을 뿐이다. 무릇 김 씨와 대 씨가 망하게 되자 와아 씨가 이를 통합해서 소유했으니, 이것이 고려다. (중략) 끝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 이북 지방과 압록강 이서 지방이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몰랐다. 여진을 꾸짖고자 했으나, 할 말이 없었고, 거란을 혼재려고 했지만 그 근거가 없었다.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말로 한탄스럽구나!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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