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의 일본, 일본의 한국 - 이천 년 한일 교류의 현장을 가다
허문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9월
평점 :
이 책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한일교류사>를 주제로 직접 발로 뛰어 취재한 기사들이다. 어쩌면 해당 신문사에 대한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해당 신문사에서 볼 법한 위험한 생각들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문을 보면 이렇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정치 외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양국민의 정신속에 흐르고 있는 문화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과거사의 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잊을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지만 우리의 시선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후손들을 위하는길일 것이다. (서문 中)
‘미래를 위해서’ 라는 말, 충분히 이해는 간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쇄신을 한답시고 찬란했던 고대사를 띄운다? 이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 아닐까. 나 역시 한일고대사에 관심이 많고,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일본은 지금도 변함없는 태도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역사 왜곡도 멈추지 않으며, 사과 한 마디를 안 하고있다. 모든 나라에 대해서 그렇다면 ‘아, 쟤네들은 원래 저런 놈들이지’ 라고 생각하고 말겠는데, 지들 보다 힘 쎈 나라냐 아니냐에 따라 선택적 사과를 한 일본의 태도가 너무나 가증스럽지 않은가.
뭐 그래도 이 책에 깔려 있는 이러한 생각들만 조금 걷어 내면, 이 책은 한일 고대사 아니, 한일 교류사에 대한 완벽한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 전 지역에 숨어있는 도래인 흔적을 보고 싶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완벽한 가이드북이다.
‘여기는 무슨 전철을 타고 무슨 버스를 타고 가면 됩니다’ 혹은 ‘여기는 SNS에서 뜨는 핫플레이스 입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만 가이드 북이 아니다. 그런 내용이 하나 없어도, 어떤 장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보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심어주기만 한다면 그 책이야말로 진정한 가이드북이 아닐까 싶다.
1부 - 일본 안의 백제에 가다.
일본은 백제와 땔래야 땔 수가 없는 나라다. 백제가 각종 문화를 전승해준 덕에 일본은 고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백제는 일본에 많은 것을 전해주었고, 일본은 백제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귀하게 대접했다. 백제가 멸망할 때는 은혜를 갚듯, 일본에서 군대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 유민들을 받아 들였으며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백제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왕인 박사.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이 국내 역사서가 아닌 일본 역사서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지만 말이다. 일본 역사서를 믿지 않으면서도, 일본 역사서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배우고 있는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뭐 여튼! 그런 왕인 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심지어 일본 고대 정형시인 〈와카〉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일 고대사에서 엄청난 역할을 한 사람이지만, 100여년 전 일본은 왕인박사를 이용하여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던 씁쓸한 인물이기도 하다.
왕인 박사가 지은 와카 ‘나니와쓰의 노래’는 16대 닌토쿠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지은 와카로, 일본 최초의 와카다. 근데 또 이 닌토쿠왕은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거대한 왕릉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백제인을 사랑한 왕이기도 하다. 심지어 닌토쿠왕릉에서 발견된 부장품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부장품은 쌍둥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사하다.
백제인 어머니를 둔 간무왕의 이야기라던가, 간무왕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히라노 신사, 다자이후나 백촌강 전투 등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여행기에서도 너무 자주 언급했던 터라 PASS!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멸망하고, 백촌강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이 즈음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 유민은 약 20만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으로 넘어온 많은 이들이 오사카에 터를 잡았다. 참고로 위에서 말했던 백제인을 사랑한 닌토쿠왕은 백제유민들이 터를 잡은 오사카를 수도로 삼았다.
오사카 동북부 히라카타시에는 지금도 백제마을이 남아있다. 정확히는 당시에 백제인이 도시를 만들고 살았던 도시 유적과 백제왕 신사다.
백제 선광왕(의자왕 아들)은 조국이 멸망했을 때 일본에 망명해왔다. (…) '백제왕'이라는 성을 하사받아 오사카 난바시에 거주했다. 선광왕의 증손인 경복왕은 도다이사 대불 주조에 금을 헌상해 하내수에 임명됐다. 경복왕은 일족 결합의 상징이자 일족의 명복을 위한 백제사, 씨족 신사인 백제왕 신사를 축조해 일족 다 같이 이 땅에 자리 잡고 산 것으로 보인다. - P115 ‘백제왕 신사 비문 中’
이 비문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 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거다. 백제사는 우리나라 역사인데, 백제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 역사서 보다 일본 역사서에서 찾아야 하는지. 그렇다고 일본 역사서를 전부 믿으면 안되지만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 일본 역사서는 5%의 진실에 95%의 뻥을 추가한 느낌이랄까?
약 2주전에 읽었던 「규슈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걷다」 라는 책에 미야자키현 난고손 마을이 나왔었다. 그 책에는 백제왕 일족인 정가왕과 복지왕을 지금도 신으로 믿고, 매년 그들을 위한 축제를 한다는 점과 그 일대에 대한 설화가 중심이었다. 이 책에서 나온 난고손 마을은 위의 이야기와 함께 더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예를 들어 난고손 마을이 일본의 백제마을로 거듭나게 된 이유라던가, 역사속 정가왕과 복지왕은 어땠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2부 - 일본에 뿌리 내린 한반도 문화를 찾아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를 공부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 중 하나가 빗살무늬 토기 듯, 일본 아스카 문화를 공부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게 스에키 토기다. 스에키 토기는 일명 가야 토기, 즉 가야 도래인들에 넘어온 토기이다. 당시 가야는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은 그런 가야에서 철정을 공급받았다. 철정과 함께 넘어온게 바로 스에키 토기. 하지만 스에키 토기 이전에 넘어온 토기가 있었으니, 바로 히지키 토기다. 히지키 토기는 한반도 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최초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이후 가야인들에 의해 철과 함께 스에키 토기가 넘어온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교토, 이 곳에 있는 야사카 신사나 오중탑은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교토를 만든 사람은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 집단. 하지만! 과거 일본여행기 포스팅에서도 여러번 언급했고, 심지어는 국내 삼척 여행기 포스팅 때도 언급했기에 이 부분은 PASS.
그렇게 자주 갔던 교토였다. 하지만 정말 몰랐던 사실이 있었으니, 교토 외각 시가현에 있는 기시쓰 신사이다. 기시쓰 신사 앞에는 ‘백제 도래인 귀실집사를 모시는 신사’라는 설명이 있고, 심지어 귀실집사의 묘와 묘비도 있다. 일본에는 수 많은 신사가 있지만, 신사 내 묘비에 특정인에 대한 이름이나 사망연도, 생전 직책등이 표시되어 있는 것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기시쓰 신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시쓰 신사가 모시고 있는 도래인 귀실집사, 그는 누구인가?
국사시간에 백제가 망한 뒤, 백제 왕자 부여 풍을 내세운 복신과 도침의 백제부흥운동을 배웠다. 복신은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으로 백제왕족, 부여 복신이다. 하지만 그가 전투하는 모습이 마치 귀신 같다 하여 '귀실'이라는 성을 받았다. 이후 귀실복신이라 불리었는데, 귀실복신의 아들이 바로 기시쓰 신사에서 모시는 귀실집사인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기시쓰 신사는 정부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고, 오로지 마을 주민들이 걷는 회비로만 운영하고 있는 점이다. 다음 일본여행은 간사이 지방을 고심하고 있는 나에게는 꼭 들러봐야 할 장소다.
백제 왕인 박사처럼 국사 시간에 꼭 배우는 사람 중 한명인 담징. 일본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는 고구려인이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호류지 금당벽화는 담징의 솜씨가 아니란다. 아 물론 원작을 후대에 모사한 거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모사를 떠나서 원작 벽화가 담징이 그린게 아니란다.
원작 금당벽화는 710년 사찰이 재건될 때 조성된 것인데, 담징은 그보다 103년 전인 607년, 원래 건물이 지어질 무렵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학계는 호류지 금당 벽화가 담징의 작품이 아닐 것이라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P198
망치로 머리를 세개 두드려 맞은 느낌. 그럼 여태 내가 국사 공부하면서 외운 것은 무엇?! 이라는 심정이었다. 근데 다행히도 호류지와 담징이 아예 연관이 없다는 건 아니라고 한다. 2004년에 호류지에서 옛 절에서 불 타 색깔이 변한 60여 점의 벽화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즉 원 건물에도 벽화가 존재했으며, 이 벽화가 담징 혹은 백제나 고구려계 화공들이 벽화가 아니겠느냐? 라는 것이다. 근데 또 여기서 함정은, 지금 모사된 벽화의 원작 역시도 도래인 화공들이 그린걸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담징처럼 이름이 안남아있었을 뿐! 호류지라는 절 자체가 백제계 도래인 세력인 소가노 우마코와 쇼토쿠 태자가 지은 것이다. 여기에 또 쇼토쿠 태자가 존경해 마지 않던 고구려인 혜자 스님도 있었으니. 아, 또 있다. 백제관음상이라고 불리는 불상이라던가?
이 외에도 역시나 교토 외곽있는 엔략쿠지와 미이사, 그 곳에 있는 신라명신과 장보고 이야기도 있으나 이 부분은 알고 있는 이야기라 PASS.
임진왜란 때 끌려온 도공의 이야기는 다른 책 리뷰에서도 많이 썼으니 역시나 PASS
3부 - 조선 통신사의 길을 따라서
올해 초였나? 통신사 흔적을 찾아 나서겠다며 대마도를 갔던 적이 있었다. 나에겐 막연히 ‘통신사=대마도’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급 깨달은 사실 하나. 생각해보니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도쿄, 즉 에도 막부 라는 사실이었다. 근데 왜 당연하게 ‘통신사=대마도’ 라고 생각했을까? 당시 조선통신사의 사행길은 한양에서 부산까지 열씸히 내려간 뒤, 부산에서 바닷길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지나 이키섬을 찍고, 아이노시마를 지나 규슈로 들어 간뒤 세토내해를 지나 오사카를 찍고 도쿄로 넘어가는 대장정이었다. 즉, 통신사의 흔적은 대마도에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지나간 전 지역에 남아있는 것이다. 거기다 잘 생각해보니 난 몇 년 전 도쿄 여행 당시에 일부러 통신사들이 묶었던 다이토쿠지도 들렀다는 소오름 돋는 사실이..!! 내 머리속에 대왕 지우개가 있었나 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교류가 끊겼지만,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국서조작(?!) 덕분에 다시 교류를 시작했다. 국서조작이 워낙 큰 일이지만, 조선은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넘어간 면도 있으니 뭐. 양국의 필요하에 다시 교류를 시작했다고 봐야할 듯 싶다. 당시 일본으로 파견했던 통신사는 통신사라 부르지 않았다. 정확히 ‘회답 겸 쇄환사’ 라고 불렀다. 회답은 일본 막부에서 보낸 국서에 대한 조선 왕의 회답 국서를, 쇄환은 일본에 있는 조선 포로들을 송환을 의미한다. 이들 덕분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돌아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큰 호응은 없었다. 해서 4차 파견 때부터는 정식으로 ‘통신사’라고 부르며 총 12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여기서 슬픈 사실 하나는 일본에서 더 이상 통신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한 그 시점부터 일본은 이미 근대화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마지막 열 두번째 통신사가 일본으로 넘어간 건 1811년. 그리고 딱 65년이 흐른 1876년. 일본과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최초 불평등 조약이기도 하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이야기는 대마도 여행기에서 많이 언급했으니 뭐.. 여기서 각설하는 것으로 하고!
요 근래 내가 읽었던 한일고대사, 한일교류사 관련 책 중에서는 제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심지어 책의 내용을 죄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한번 읽고 나서 또 다시 정독, 정독 또 정독. 물론 저 많은 양을 다 내 것으로 만들진 못했지만 ㅠㅠ.. 아주 달달 외울 정도로 맘에 드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책을 구입한 과거의 나! 아주 칭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