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제의 혼 부여의 얼 - 부여의 역사 인물 이야기
소종섭 지음 / 황금알 / 2012년 11월
평점 :
언젠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던 책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내가 책을 읽는 속도가, 책을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서 이 책 역시 구입 후 책장에 꽂혀 있다가 어느 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뒤 현재, 알라딘에 팔 중고책을 골라내던 중 책장에서
발견했다. 하마터면 책을 읽지도 않고 다시 되파는 우를 저지를 뻔했다.
일단 책장에서 꺼냈으니 독서 시작 !
표지만 보았을 때는 부여에 얽힌 백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부여에 얽힌 백제의 이야기도 물론 있지만, 그
뿐만 아니라 부여에 살았던 혹은 부여를 스쳐지나갔던 여러 시대의 역사적 인물상이 담겨있었다.
조선의 3대 기인(奇人)1)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 그는 59세가 되던 1493년 '부량사에
병들어 누워' 라는 시를 한편 남긴 뒤, 무량사에서 눈을
감았다. (주1): 조선의
3대 기인: 토정 이지함,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
김시습은 어려서 부터 천재였다. 태어난지 여덟 달 만게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 를 썼다. 성군이라 불리운 세종대왕은 어린 김시습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김시습 그는
자타공인 모태 천재였다. 하지만 그가 열다섯이 되던 해 그의 모친이 죽었다. 어린 천재 김시습을 아꼈던 세종대왕도 죽었다. 김시습의 아버지 김일성은
후처를 들였다. 김시습에게는 계모가 되는 그 여인은 김시습을 어여삐 키우지 않았다.
19세가 된 김시습은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갔다. 하지만 낙방하고 만다. 천재 김시습이 과거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짐을 싸서 절로 들어갔는데,
그 즈음하여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정권은 바뀌었고 수양대군이 왕이되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소식에 김시습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 이때부터
그는 기인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김시습은 1456년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시습이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성승 등 다섯 시신을 수숩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한다" 라고 썼다. 김시습은 명분이 없는 세조 정권을 부정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했다. 29세가 되던 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김시습은 유학자였지만 모친 사망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계유정난을 계기로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러다 40대 후반에 들어서 유교로 환속하는 등 여러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 뜻을 펼치려 했으나 그 뜻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김시습. 그가
꿈꿨던 펼치려 했던 이상적인 왕도 정치는 그렇게 부서졌다. 그는 한 평생을 방랑하는 삶을 살았고, 조선 주류층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를 썼다. 탐관오리를 비웃었고, 판타지적인 소설을 썼다.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을
놓치 못해,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담은 글도 썼다. 김시습,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군주가 자기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민심이
따르면 만대라도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으나 민심이 이탈되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해서 평민이 되고 만다. 군주와
평민의 사이가 털끝만한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 어찌 감사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나라의 창고에 쌓인 재물은 모두 백성들이 마련한 것이며 윗사람들의 의복, 신발은
바로 백성들의 살가죽이며 음식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궁전과 차마(車馬)들도 백성들 자신의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며 세금, 공물 및 일체 필수품도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을 사랑한는 것으로써
기본을 삼아야한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요약하여 말한다면 어진 정치를 베풀자는 것이다. <애민의 천지편 – 김시습>
임진왜란
당시 발생한 이몽학의 난.
선조 재위 시절 살기 팍팍했던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일본군이 쳐들어왔고 나랏님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몽학을 비롯한 민초들은 살기 힘들어 들고 일어났다. 직접 중앙권력을 탈취하기 위함이었다. 민란을 일으킨 이몽학은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요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있는 백성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라고 명문을 내걸었는데, 노비/평민/향촌의 지배층 할 거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몽학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 들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나서, 목숨걸고 일본군과 싸운
사람도 다수였다. 이몽학은 부여 무량사에서 민란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선조는 반란군 토벌명령을 내린다. 당시 홍주목사였던 홍가신을 필두로
토벌군이 내려왔다. 민가를 불태워가며 이몽학 군을 진압한다. 도원수였던
권율장군, 유학자 출신 의병장 김덕령 장군 역시 토벌군으로 내려왔다.
이몽학이 민란을 일으킨지 10일 만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때 처형된 사람만 130여명이 넘는다. 여기서 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누구의 의도였을까? 누군가가 토벌군으로 내려왔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포함한 여타 의병장들을 무고하였다. 그렇게 임진왜란 당시 목숨걸고 싸우던 많은 의병장들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전부 처형된다. 선조는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했다.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 의병장
김덕령, 이몽학 등..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들과 관련된 여러
유적지를 직접 보았다. 그리고 느낀 건 언제나 똑같았다. 못난
리더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라는 것. 못난 리더는 인재를 가릴 수 있는 눈이 없다. 아무리 인재가 눈 앞에 있더라도 그냥 지나친다. 그 뿐이 아니다. 못난 리더에 국제 정세까지 좋지 못하다면 죄 없는 백성들까지 죽어나가는 파국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역사는 매번 되풀이 되었다. 되풀이 되지 말라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인데, 계속 되풀이 되었다. 참 아이러니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