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요 - 조선왕조실록 기묘집 & 야사록
몽돌바당 지음 / 지식과감성#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인요(人妖), 그것은 도리에서 벗어난 요사스럽고 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분장을 한다거나, 여성이 남성의 분장을 하는 사람들을 인요라고 불렀다. 이러한 단어는 조선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손 꼽히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몽달바당님은 실록에 있는 기사를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한 편의 소설을 만들었다. 책의 제목이자 반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인요, 그 외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기묘한 기사들을 여러개 발췌하여 작성한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난 시간날 때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틈틈히 보면서, 이런 내용이 기록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야사 같은 기사가 나오면 이따금씩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궁금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정사보단 야사가 아닌가! 헌데 야사를 주제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소설이 나왔다니, 나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걸까. 아니면 작가님의 문체와 내가 안맞는 것일까. 읽으면서 책과 싸움을 한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보통 싸움을 하게 되는 책이라면 읽다가 덮어버리기 마련인데, 이 책은 주제가 주제인지라 덮어버릴 수 조차 없었다. 작가님의 문체가 나랑 안 맞다고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 스토리로 보았을 때는 매우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었기에! 거기다가 작가님 나름대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연설명도 나쁘지 않았다. 작가님의 부연설명은 우리나라 매체에서는 큰 주제로 다뤄지지 않았던, 조선의 중간관리들 혹은 민초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봉익·김상옥·이세근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이봉익(李鳳翼)을 사간으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로, 이세근(李世瑾)을 병조참의로 삼았다. 이세근은 사람됨이 음험(陰險)하고 간사(奸邪)한데, 얼굴을 단장하기 좋아하여 날마다 여러 차례 낯을 씻고 목욕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뽑았으며, 의복과 음식이 모두 보통 사람과 다르니, 당시에 그를 인요(人妖)라고 불렀다. 또 성품이 탐오하여 일찍이 접위관이 되었을 때 왜인(倭人)이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만 붙좇는 데 교묘하여 때에 따라 얼굴을 바꿈으로써 승진하여 비옥(緋玉)에 이르렀으나, 조정의 관원들이 함께 반열(班列)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6월 4일 을사 1번째 기사 1719년 청 강희 58년>
이 책의 메인이 되는 이야기 인요.
21세기 현재를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 이수혁이 주인공이다.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이라니, 꽤나 파격적이다) 그는 예기치못한 사고로 덕수궁 연못에 빠졌다. 눈을 떠보니, 왠걸 ! 조선 숙종 재위 시절 노론의 일원이었던 정현 이세근의 몸이 아닌가. 흔히 말하는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로 날라가는 타임워프 이야기였다.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소설은 워낙 많기 때문에 작가의 필력에 따라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성공이 좌우된다. 다행히도 인요의 경우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꽤나 흥미로웠다.
현대를 살던 트랜스젠더 이수혁이 조선의 문신, 인요라고 불리던 이세근으로 깨어났다. 자기가 조선시대로 왔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는 사극을 아주 많이 본 인물이었다. '사극에서 봤었던, 사극에서 나왔던, 사극에서 들었던' 모든 기억을 총 동원하여 이세근으로써 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수염이 있는 본인의 얼굴은 적응할 수가 없었는 지 눈 뜨자마자 바로 수염을 잘라내었다. 하기사 현재에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수염이란 있으면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조선에서는 수염을 자르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잘라낸 이수혁, 아니 이세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세근이라는 인물이 기방에서 인요들과 노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다. 아 물론 소설에서다. 만약을 위해서지만 혹시라도 그의 후손들이 이 책을 본다면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는 픽션이니 그것을 꼭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달까? 하하하.
혼자서만 조선으로 온 줄 알았던 이수혁. 하지만 아니었다. 과거 군대에 갔을 때 자신이 괴롭힌 후임, 현재는 자신을 좋아한다며 스토킹하던 인물도 조선으로 타임워프한 것이었다. 그것도 왕세자,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의 몸으로. 현재에서는 이수혁이 우위를 점했었다면, 조선에서는 왕세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그가 우위를 점한 것이다. 아 물론 이들의 이야기는 썩 .. 간혹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도 있기에 이 부분은 독자들이 감수해야할 부분인 듯 하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 이수혁, 그가 조선에서 있었던 오랜 시간은 현재에서는 불과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수혁은 다시 본래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스토리 전개과정 혹은 마무리에 대해서는 약간 갸우뚱 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부분까지 감수할 만큼 흥미로운 주제는 확실하다.
-이보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중간 생략…
<선조실록 209권, 선조 40년 3월 18일 신사 3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 35년>
책에 실린 여러 단편 이야기 중 하나인 살인귀.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이야기다. 이 부분의 경우 실록에서 순화군 · 임해군 · 정원군에 대한 기사를 너무나도 많이 보았던 지라, 다른 이야기보다도 더욱 주의 깊게 읽어 보았다. 순화군의 이야기는 워낙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 많이 있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흥미진진한 전개까지는 못 미친 것 같다. 대신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소설을 쓰신 것 같았다. 앞서 수록된 소설들이 픽션소설 같다면, 살인귀 이야기는 이른바 팩션소설 같달까? 해서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들 순화군에 대하여 아버지였던 선조가 어떤식으로 대처했는 지 등 이런 부분까지 고려하여 스토리를 전개하였다면 더 멋진 팩션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은 후 막연하게 느낀 사실은 이 책은 작가님이 처음 집필한 작품이 아닐까? 라는 것 이다. 읽으면서 색다른 주제 ; 파격적인 주제를 선정해서 좋았고,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어설픈, 마음만 앞서는 듯한 스토리 전개도 분명히 있었기에. 주인공들의 일부 대사에서는 인터넷소설에서 볼 법한 문구가 나오기도 해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개인의 취향이니 독자에 따라서는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님께서 조금만 더 노력을 하신다면 나같이 편향적인 시선을 가진 일부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집필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작가님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