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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진
이완우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12월
평점 :
1592년, 이백년간 평화에 젖어있던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왜놈이라고 부르며 비하하던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온 것이다. 그 유명한 임진왜란이다. 이때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보관하던 세곳의 사고(춘추관, 충주사고, 상주사고) 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안에 있던 실록과 어진 역시 잿더미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왕들의 어진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인 즉 이러하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사라진 세 곳의 사고 말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고가 있었으니 전주사고 이다. 전주사고가 튼튼하거나 방비가 잘 되어있어서 실록과 어진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실록와 어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조선의 역사를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의 제목은 왜 하필 몽진 일까? 몽진 이란 '먼지를 뒤집어쓰다; 급박한 상황에서 먼지를 쓰고 떠난다' 라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을 나선 선조를 두고 '왕이 몽진하였다' 라고 한다. 해서 나에게는 부정적인 의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의 주인공 유생 안씨와 손씨를 비롯한 여러 민초들은 실록과 어진을 들쳐매고 왜적의 눈을 피해가며, 온갖 위협과 고난을 넘기며 피난길에 올랐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민초를 지켜야할 나랏님조차 도망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민초들은 자기가 살고있는 조선을 위하여 천여권이 넘는 국가의 서적과 어진을 지키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피난길에 올랐다. 이런 것이 작가님이 말하려 한 진짜 몽진이 아닐까?
"나랏일? 나라가 있기는 하더냐? 온 나라가 왜적에게 짓밟혀 죽고 약탈을 당해도 나라가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차라리 내 힘으로 나를 지키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느니라" - P 081
나이든 유생 안과 손은 실록을 들쳐매고 피난길에 올랐다가 산적을 만난다. 안과 손은 자기들이 나랏일을 하고 있으니 무사히 보내달라고 하자 산적이 한 말이다. 왜적에게 짓밟혀 죽고 약탈을 당해도 나라가 한일이 무엇인가. 뼈를 때리다 못해 부러뜨리는 말이다. 안과 손도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았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나라를 위해,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산적은 이런 늙은 유생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꾼다. 심지어 그들이 실록을 무사히 옮길 수 있도록 호위무사를 자청한다.
"저희들도 비록 산적질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랏일을 한다는 마음에 잠시 사람처럼 사는 것 같아 신명이 났었습니다" - P 144
산적도 역시나 조선의 백성이었다. 전쟁이라는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을 뿐이었다. 좋은 왕이 다스리는 땅에서 살았다면 농사를 지으면서 사소한 것 하나에도 행복을 느낄 그런 민초들이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왕을 잘못만난 죄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살기 위하여 산적이 될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우리 스님들도 나랏일에 보탬이 되어야지요. 용굴암까지는 우리 스님들이 옮길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P 151
실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피난길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산적 뿐만이 아니었다. 스님들도 실록을 옮기는 데 힘을 보탰다.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과 어진을 영은산(現 정읍 내장산)까지 옮기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구의 눈에 띄어도 안되었고 마음을 나쁘게 먹은 사람들 눈에 띄어도 안되었다. 여러 민초들의 힘이 모여졌기 때문에 비로소 실록과 어진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록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들은 왜구가 아니었다. 같은 조선 사람이었다. 실록에 부끄러운 내용이 기록된 사람들, 왜적에 투항한 벼슬아치.. 그들이야말로 실록 보관에 제일 위험이 되는 사람이었다. 나쁜놈들은 자기가 하는 짓이 나쁜짓이라는 것을 제일 잘 알고 있고, 그것에 기록에 남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 지를 잘 알고 있다. 해서 사고를 떠난 실록을 탈취하기 위해 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사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도 있는데, 그런 왕 밑의 신하들이라고 배운 것이 뭐가 더 있었겠는가.
이 책은 작가님이 말했 듯 '역사소설' 이다. 기록된 역사에 상상력을 살을 덧붙여 작성한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완전 픽션인가? 라고 하기에는 사실과 맞닿은 부분이 너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실록을 옮긴 과정을 기록한 책 『수직상체일기』1)에 수록되어 있는 실제 사실을 그대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1) 수직상체일기: 실록을 보관했던 나이 든 유생 안의의 친필 일기. '전주사고→내장산 용굴→아산→해주→강화→안주→묘향산'으로 옮겨간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30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370여 일간 왜적을 피해 실록와 어진을 지켰다)
왜구에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만 조선을 지킨 위인이 아니다. 실록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안의와 손홍록 역시 조선을 지킨 위인이다. 뿐만 아니라 안의와 손홍록과 함께 실록을 지켰던 두 명의 참봉과 수복 한돌(한춘), 무사 김홍무 역시 조선을 지킨 위인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사와 고려사를 공백으로 남겨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은 이들의 업적을 끝내 정사인 실록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선의 역사를 지킨 위인들의 이름은 잊혀졌다.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이들 덕분에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음을..
"나랏일? 나라가 있기는 하더냐? 온 나라가 왜적에게 짓밟혀 죽고 약탈을 당해도 나라가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차라리 내 힘으로 나를 지키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느니라"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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