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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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이가 들어가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죽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독후감에서 제법 지껄인 적도 있었구요,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디다... 내가 죽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지만 누군가에게서 어느순간 잊혀져버리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그 현실적 상황이 주는 서글픔 같은 것 말이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지나고 나라는 존재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할 것이라는 그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해져오면서 꽉 막힌것처럼 숨을 못쉬겠더군요, 이렇게 잊혀져가는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제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잊어버렸던 그 누군가를 떠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시다보니 외할머니가 항상 저의 집에서 저를 챙겨주셨죠, 그런 할머니가 어느날 돌아가셨어요, 고2때였죠, 어린시절 함께 잠들고 저를 깨워주시고 밥도 먹이고 세수도 시켜주셨던 할머니가 감기로 힘들어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근데 그때는 잘 몰랐어요, 그렇게 슬퍼지도 않았구요, 그냥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항상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덩요, 엄마한테도 눈물이 안난다고, 그냥 할머니가 항상 날 지켜줄 것 같아서 그런 지 실감이 안난다고 했죠, 근데 한참이 지나서도 그랬습니다.. 그냥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시고 어디에선가 날 지켜주실거라는 믿음 말이죠, 슬프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힘들때마다 고개들어 할머니한테 인사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더랬습니다.. 제법 오랫동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유치합니까, 뭐 그냥 그랬다는겁니다..


    2.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가슴이 꽉 막힌 것 처럼 답답하면서 꿈에서 깨어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먼저 할머니가 떠오른 것은 아닙니다.. 꿈속에서 제가 죽고 아이들이 절 잊혀가는 상황을 떠올리는 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마침 깰때여서 새벽녘 밖을 쳐다보면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아, 어느순간 나조차 할머니를 잊어버렸구나,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아이들이나 가족들에게서 잊혀져가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숨이 막힐 듯 답답해져 오더라구요, 나이가 들어서 주책이죠,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일겝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주는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삶이 있는 한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는 있지만 죽음은 더이상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공간속에 놓이는 것이니 참 답답하고 아쉽고 슬프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내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그러할테니까요, 그리고 이기적으로 그렇게 잊혀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더이다.. 조금이라도 그 안타까움이 덜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죽음을 대하는 시간적 여유 정도는 주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전혀 뜬금없는 작품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긴 하지만요, 죽어서도 다시 돌아온 이들을 반겨주면 좋겠는데, 현실은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들을 흔히 '좀비'라 부릅니다.. 올바른 존재가 아니죠, 안타까운 존재의 소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원하는 인간들의 미련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리고 결국 현실에서는 생존을 택합니다.. 어쩔 수 없죠, 내가 먼저 살고봐야지... 안그래요, 그런 이야기들은 고전작품의 이야기속에 담아 새롭게 엮었나 봅니다.. 좀비에 대한 앤솔러지 "좀비 썰록"입니다..


    3. 좀비물 좋아라합니다.. 아무리 흔하고 전형적이라도 읽다보면 항상 재미집니다.. 장르소설속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확장되는 캐릭터이기도 하구요, 전형적인 종말론적 세계관속의 인간의 생존에 국한된 서사에서 장르적 확장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보다 유쾌하고 인간적인 의도의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성이 부여되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요, 뭐 저는 그랬습니다.. 이 작품은 썰록이라는 제목처럼 좀비와 관련된 이야기 다섯편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나 챙겨봤던 국내문학 다섯편의 내용에 좀비를 살짝 들이밀었습니다.. 중졸 이상의 학력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인지라 그 흥미가 더 와닿더군요, 하나씩 함 살펴봅시다.. 읽다가 시험 나올만한 부분은 밑줄 쫙, 먼저 김성희 작가의 '관동행'이라는 작품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비롯된 모냥입니다.. 사실 관동별곡 잘 모르죠, 그냥 정철이 강원도의 산수를 찬양한 조선 최고의 가사중 하나라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관찰사(요즘이면 강원도지사)로 부임하던 상황과 관련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린 건 작품때문입니다.. 원래 교과서에서 나온 작품은 휘발성이 더 강합니다.. 역사상 정철이라는 위인은 임진왜란 전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관동행'이라는 작품에서는 정철의 캐릭터성이나 식속에 대한 가벼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행의 내용처럼 관동까지 가는 길에 벌어지는 좀비와의 생존혈투를 다루고 있죠, 조금은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편안한 좀비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난한 느낌의,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좀비 바이러스의 항원과 항체도 우린 만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라도 깊이 R&D를 해야될 검토대상인 듯 합니다.. 진지하게,


    4. 두번째 작품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중 한편인 '만복사 저포기'를 차용한 정명섭작가의  "만복사 좀비기"입니다.. 관동별곡과 함께 국어 시험에 꼭 등장하는 작품입죠, 중요도 최상의 교과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좀비를 접목시켰습니다.. 내용인즉슨 양생이라는 총각이 만복사라는 절에서 부처님과 주사위 도박을 펼친 이야기죠, 타짜인 양생은 부처님을 이기고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만납니다.. 허나 갸가 갸가 아닌것이었죠, 결국 안될 놈은 끝끝내 안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쉬움을 남기고 만 이야기입니다만 정명섭 작가의 작품속 양생도 좀비가 창궐한 역사속 세상속에서도 참 힘든 인생을 삽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양생은 자신을 못알아보는 어머니를 뒤로한 체 마을을 떠나 만복사로 들어섭니다.. 그곳은 이미 피난을 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힘겹게 살아남은 양생은 달이 밝게 뜬날 어머니가 원했던 자신의 장가를 기원하며 부처님과 게임을 하죠,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여인을 만납니다.. 좀비인 지 아닌지도 모를 여인을 숨겨주며 주위사람들의 압박을 받던 양생은 몰래 만복사를 빠져나간 여인을 쫓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김시습의 오리지널 버전을 크게 벗어나질 않는 범위에서 좀비와 주변의 상황을 엮어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이루어지죠, 독자들에 따라서는 상당히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디다..


    5. 세번째 작품은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차용한 전건우 작가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작은 주요섭의 시대적 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여성적 지위와 애정에 대한 파격적 내용이었습니다.. 주요섭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사랑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갖혀버린 사회적 약자와 그 대상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옥희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죠, 아시다시피 주요섭은 미국물을 드신 지식층인 관계로 그 시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상황과 사회적 불안과 신분적 부조리 속에 갇혀버린 인간의 인간다움을 그려내는 뭐 그런 작가 비스므리하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왜, 여성은 남편도 없는데 사랑하면 안돼, 왜 안돼, 뭐 이런 뉘앙스죠, 그런 작품을 전건우 작가는 아주 파격적으로 창조해냈습니다.. 전반적인 설정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아직 죽지않은 남편이 있죠, 그리고 밉쌍 시어머니도 있습니다.. 삯바느질이다 뭐다 하면서 병든 남편, 어린 딸 먹여살리기에 자기 한몸 제대로 챙기지도 몬하고 인생 고통스러운데 되려 돌아오는 건 여자 잘못 들여서 이 고생을 한다는 시댁의 타박뿐이죠, 젠장, 그래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랑방에 손님이 들어오죠, 옥희는 사랑방 손님에게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지만 6살 아이의 머리는 돌아서면 세상은 여전히 따사롭죠, 단지 누렁이만 위험을 감지합니다.. 어떨땐 개가 인간보다 나을따개 많죠, 그러던 어느날 누렁이가 죽고 일이 벌어집니다....언제나 엄마는 엄마일때 가장 강합니다.. 아주 재미집니다.. 원작이 주는 기억도 있거니와 후반부 벌어지는 반전과 함께 대단히 역동적인 상황의 전개는 매우 즐겁습니다.. 울 엄마 앞에서 깔짝대면 다주그쓰...


    6. 네번째 작품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차용안 조영주 작가의 "운수 좋은 날"입니다.. 원작의 상황적 반어에 대한 비극적 구성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우린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아주 재미지고 비극적인 결말임에도 우린 작품이 주는 따스함과 김첨지의 하루에 대한 뿌듯함을 머리속에 기억하죠, 그리고 아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영주 작가는 다른 작가와는 조금 다르게 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작품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창작물이라고 봐야될 듯 싶습니다.. 현실의 이야기속에서 좀비와 과거의 허구가 하나가 됩니다.. 또한 극중 인물의 캐릭터에 작가의 예명등을 차용하고 현실감을 자아내죠, 게디가 상당히 독창적인 좀비적 캐릭터가 구축됩니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크게 다가오질 않습니다만 상황이나 캐릭터의 창조 및 설정의 즐거움을 가득합니다.. 채식과 육식과 사랑과 배신과 허구와 환상과 진실의 경계를 대단히 가볍고 유쾌하며 매력적으로 설정한 방식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사람이 그사람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허구의 진실의 구라가 웃겼습니다.. 재미있었구요, 마 그정도...


    7.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아무리 책을 안 읽는 학생이라도 이 작품의 감성과 인식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없는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최고봉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가 아닌 '소나기'의 패러디인 차무진 작가의 "피, 소나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작 소나기가 주는 어린시절 첫사랑의 감각적인 이미지와 문장은 머리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로 시작하는 아련한 감성과 마지막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로 끝나는 애잔한 안타까움을 잊을 수가 없죠, 혹시 기억 안나는 사람을 지금이라도 일단 읽어봐.. 금새 읽거덩, 하여튼 그러한 잊지못할 위대한 순사랑의 아련함을 차무진 작가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탈바꿈 시켜놨다고 봐야겠습니다.. 처음과 끝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원작의 감성과 장르적 비릿함이 아주 적절하게 혼합되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특히나 좀비인 듯 좀비가 아닌 상황속에서도 순수한 이들의 사랑이 보여주는 아련함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좋습니다.. 특히나 소년의 심리와 감성을 적절한 표현과 주변의 상황속에서 그려낸 작가의 의도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만족스럽죠,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돌아온 존재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과 대중적 혼란과 더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돌아왔음에 대한 이들의 감정을 아주 깊이있게 그려낸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특히나 소년과 하나뿐인 증손녀에 대한 윤초시의 감정같은 것 말이죠, 특히나 후반부의 모든 이의 눈돌림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다가간 이미지는 많이 짠했습니다.. 사람 뇌를 닮은 호두알 맛이라도 한번 보여주고 보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여튼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8. 각각의 작품들이 나름의 색채를 띄고 좀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류의 작품 앤솔러지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재미지고 매력적인 설정들이라 금새 읽고 입맛을 다셨습니다.. 좀비가 피맛을 즐기듯이 먹고 먹고 또 먹고 자꾸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 그런 허기짐을 만났다고나할까요, 아무리 좀비라는 캐릭터가 확장성을 가지고 장르를 만들어나간하도 하더라도 그 좀비적 개념이 주는 전형적 의도는 쉽게 바뀌질 못하죠, 이럴때 기존 작품들에게서 인지된 수많은 인식들에 대한 좀비적 상상력이 투영되는 즐거움이 무척이나 좋아서 쩝쩝거리는겁니다.. 혹여라도 고전작품, 유명작품에 대한 모욕이니 홀대니, 거부감이니, 이런 유치스러운 감정같은거 좀 던져두시고 누구라도 즐기고 쉽게 다가갈 수있는 요런 좋은 장르소설들이 많이 좀 펼쳐지면 좋겠다누,,, 봐바... 이렇게 이 작품을 안 읽었으면 언제 다시 고전들의 내용을 되짚어 보겠냐고, 송강 정철이랑 정철 영어의 정철이랑 헷갈리지 않으라는 보장이 어디있냐고, 민복사 저포기를 만복사 저팔계로 잘못 알지도 모르잖아.. 또는 사랑방 손님이 뉴스상의 성접대문화에 대한 사회 르포소설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잖아, 또 운수 좋은 날이 경마신문의 한 꼭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나기속 주인공의 할어버지 윤초시가 독 짓는 늙은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누가 그래, 그러니 이런건 좋은거야.. 난 그렇게 봐쓰.. 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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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새 스토리콜렉터 78
수재나 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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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 때문이야, 니가 그랬잖아, 너만 아니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인데, 왜 나서서 니가 일을 어렵게 만들어... 하여튼 니는 뭘하면 안돼, 앞으로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사람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탓을 합니다.. 그 대상이 누가 되었던 탓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자신의 잘못이 적은 방향으로 탓을 돌리죠, 자신에게 돌아오는 탓은 자책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인간은 가능하면 타인에게 어떠한 일의 결과중 나쁜 것에 대한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탓을 어릴때부터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떨까요, 단순한 부모의 잔소리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아이의 이모가 아이랑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나 봅니다.. 아이가 집중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데 이모가 칭찬을 합니다.. 너무 잘하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이죠, 아이에게 힘이되고 즐거운 칭찬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말을 듣고선 아니에요, 전 잘 못해요, 전 잘하는게 별로 없어요라고 무덤덤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이모는 아이의 엄마에게 신중하게 전달을 합니다.. 보통의 아이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보니 걱정이 앞선 부분이 있을겝니다.. 아이의 엄마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은 칭찬을 하면 보통은 으쓱거리며 더 잘할 수있다는 의도의 자신감을 내비치거나 더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려내기 일쑨데 그렇지 않다는 점은 아이의 자존감이 너무 낮은게 아닌가하는 걱정인것이죠, 고민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곤 부모로서의 자신의 행동과 아이에 대한 훈육방식에 대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2. 아이가 사랑스러운 말썽꾸러기입니다.. 그래서 항상 혼이 먼저 나죠, 조금만 눈을 돌리고 있으면 항상 어질러진 공간에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형제들보다 조금 더 혼이 나는 편입니다.. 근데 그런 잔소리가 아이에게는 자존감에 있어 정서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고민을 부모로서 하게 되더군요, 솔직히 전 아이의 엄마와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동일한 기준에서 충분한 칭찬과 훈육이 나름의 밸런스를 맞추고 아이에게 전달되는 훈육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물론 아이의 특성과 성향에 따라 그 반응을 고민하고 맞추어야되는 것도 맞구요, 누군가의 비교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상황에 대한 훈육은 자존감에 대한 상처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히려 전 아이가 자신이 잘하고 못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을 하고 판단을 빨리 했다고 생각을 헀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거덩요, 또래의 남아들처럼 제 아이도 그림이나 음악적 재능, 글쓰기, 수학같은 공부보다는 게임이나 동영상이나 어떠한 상황을 파악하고 기억해내는 것은 뛰어나다고 아이 스스로가 말합디다... 하지만 엄마가 받아들인 자존감과 같은 불안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를 해봄이 맞겠죠, 어린시절 아이탓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흔한 상황에서 자란 아이는 심각한 자존감의 저하로 인한 자책이나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고 주변에 대한 의지와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을겝니다.. 그리고 항상 그러한 아이의 내면은 외롭고 두려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정체성으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죠, '루시 플라이'도 그런 여성이었던 모냥입니다.. 수재나 존스의 데뷔작 "지진 새"에서 루시는 일곱명의 오빠가 있음에도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영역과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이죠,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 작품입니다.. 지금 영화도 절찬리에 상영중이라 보실 수 있는 멋진 작품 줄거리 함 봅시다..


    3. 머나먼 영국의 요크셔를 떠나 일본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루시 플라이는 과거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어린시절 일곱명의 오빠와 함께 살아온 루시의 삶은 지옥과 다르지 않았죠, 부모는 일곱의 아들을 두고 딸이 태어났지만 아들이 아님에 낙심하고 방치합니다.. 제대로된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빠들은 그런 루시를 괴롭히죠, 그러던 어느날 루시를 괴롭히던 오빠중 한명이 루시로 인해 죽게 되죠, 이후로 루시는 자신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노아 오빠에게서 벗어나질 못한 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자 어린시절부터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곧바로 자신의 가족이 모르는 일본으로 향합니다.. 그런 루시에게 일본은 제2의 고향과도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 자신의 고향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루시가 아닌 오롯이 자신만의 루시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곳에서 루시는 새로 태어난 것이죠, 그런 일본에서의 삶에서 루시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도로의 고인 물 사진을 찍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가진 데이지라는 남자에게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나서고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죠, 사랑하는 이를 만난 루시에게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곤 릴리 브리지스가 나타납니다..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의 릴리는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왔죠, 루시는 그녀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조금씩 그녀에 대해 문을 열게 됩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길 거부했던 루시에게 릴리는 불안한 기시감을 선사하는 존재였죠, 그런 릴리가 사라지고 어느날 발견된 후 루시는 경찰에 연행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과연 루시는 릴리를 죽였을까요,


    4.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로 보입니다.. 시작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로 심문을 받는 루시에게 있어서의 과거와 그녀의 개인적 이야기가 그녀의 시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로 진행이 됩니다.. 소설은 '나'라는 존재와 '루시'라는 3인칭의 존재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합니다.. 미스터리한 사건의 내막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드러내면서 루시 플라이의 삶과 '나'의 심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상황을 끄집어내죠, 작가는 작품의 이야기와 구성을 그렇게 길게 이어가지 않습니다.. 각 챕터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게 적용하면서 루시의 과거와 릴리와 데이지의 관계를 번갈아가며 루시의 인생과 그녀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우린 루시라는 여성이 가져온 삶의 무게를 그녀의 심리와 시선속에서 공감해나가게 됩니다.. 소설속의 '나'라는 존재가 보여주는 감성은 대단히 시니컬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성이 혼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루시의 데이지를 향한 감정의 문장들이 보여주는 강렬함과 함께 그를 제외한 그녀의 삶의 메마름은 대단히 큰 비교가 됩니다.. 독자들 또한 이러한 감정선의 혼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가진 심리적 불안과 극단적 성향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나가게 되죠, 나름의 혼재된 심리임에도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루시에게 있어 릴리라는 존재는 영역속에서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죠,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와 '루시'라는 3인칭의 동일한 존재를 스스로 비교해나가는 방식은 상당히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장르소설을 읽어온 독자의 어설픈 짐작으로 처음에는 해리성 인격 장애를 겪는 주인공인가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오히려 자아라는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객관화를 시켜나가는 주인공임을 깨달았습니다..


    5. 루시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시작과 끝으로 이어집니다.. 한 여성의 삶에 대한 주변의 모습과 자신이 이끌어나가는 개인적 존재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인물의 내면의 자아와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상실, 외로움, 관계적 불균형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서양인으로서의 동양속에서의 삶을 대단히 리얼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영국인의 이야기가 그림처럼 그려집디다.. 물론 "지진 새"라는 제목의 동물이 주는 감성적 의도와 그 내면의 이야기를 살펴볼작시면 지진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일본에 있어서 그 징후전 후에 들려오는 '지진 새'라는 존재는 일종의 혼란적인 상황이나 불안한 심리의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그려내기에 적합한 소재인 것 같기도 합니다..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혼란과 흔들림이 끝나고 들려오는 조용한 새의 울음은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한 진실의 끝자락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장르소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로맨스소설입죠, 대단히 미스터리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긴장감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내면이 주는 충격적 결말의 반전을 생각하더라도 이 소설은 심리스릴러로 묶을 것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픔을 간직한 한 여성의 성장소설로 바라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소설의 전반적인 미스터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너무 한 여성의 시선과 시점에 깃대어 그의 이야기에 국한된 상황에 이끌리다보니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조금 지리함이 생기더라구요, 보일듯 말듯하면서 벌어질듯 말듯하면서 알듯 말듯하면서도 제대로 그 내막이 뒤로 자꾸 밀려나가는 상황들이 아쉬음이 좀 남습니다..


    6. 사실 이 작품은 오래된 작품이더군요, 작가의 데뷔작으로 2001년도에 집필된 작품입니다..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장르소설과 순문학의 경계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더군요, 전반적인 서사의 흐름이나 연결구도는 미스터리를 접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상황을 끊임없이 긴장케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작품의 성향은 사랑과 성장에 관련된 순문학에 대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후반부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의도한 미스터리한 진실의 내막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로서 기대감이 클 수 밖에 없었지만 후반부의 결론에 이르러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놓은 진실의 화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내면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렇다보니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의 개방적 반전의 진실이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을테고 또는 그러려니하면서 조금은 허탈한 마무리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무척이나 재미진 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루시라는 여성의 시선과 심리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대단히 찰지고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을 확실합니다.. 사실 남자로서, 그것도 중년의 무덤함한 돼지 아저씨로서 느껴지는 감성이 일반 여성적 관점의 이 작품의 독후감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여성분들의 감성과 공감이 더 크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을겝니다.. 그런 공감이 지배적인 이야기구도이기도 하구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 이 작품이 넷플릭스라는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절찬리로 상영중이라고 합디다.. 혹시 회원이신 분들은 감상을 해보셔도 되실 듯, 근데 주인공인 루시의 이미지는 좀 달라보입디다.. 소설 속 루시는 그렇게 아리따운 외모의 여성은 아닌데(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사람을 끌어들이죠) 영화에서는 알리시아 비칸데르라는 여성인데 전직이 대저택을 소유한 대단히 활동적이고 글로벌적인 재벌가의 여성이라서 그런가봅니다.. 게다가 덩치가 소설의 이미지보다 너무 작아요, 근데 또 책 표지는 또 비칸데르를 닮은 듯, 하기사 뭐, 저예산 영화도 아닌데 주인공의 외모가 중요하긴 하지.. 기회되면 루시를 얼매나 잘 그려냈는 지 함 봐야그쓰... 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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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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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백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여즉 친구로 남아서 만날때마다 한말 또하고 대화의 반은 욕에다가 병신처럼 웃다 술에 취해 즐거워 몸둘 바를 모르며 행복해하는 친구들은 고딩 친구들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편한 주변인은 그때 그 친구들입니다.. 제 안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입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달이 만나도 우린 그때 그시절의 삶과 인생으로 돌아갑니다.. 독후감에서도 이야기한 듯 싶긴한데,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죠, 저라는 사람이 만들어지고 그 중심을 잡는 시간의 모든 것을 함께 한 존재들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제 인생에서 만난 시간으로는 짧은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친구는 기껏해야 고3 일년동안만 만났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대학시절 수년동안 함께 동거동락한 친구와 더 많은 소통과 추억이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시절 그 순간의 기억은 고딩때에 멈춰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중딩때의 친구, 대학때의 친구,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소통과 삶의 추억이 가득한 이도 있겠으나 저로서는 응답해야할 1988년의 시절을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고2, 제가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시절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움이 가득했던 시절의 추억을 말이죠,


    2. 참 선생이 싫었습니다.. 인간적인 슨생들이 별로 없었어요,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학생들을 패대기치고 체벌이라는 이유로 엉덩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리고 모욕과 비교를 스스럼없이 해대는 비열한 인간들이 슨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생의 입장과 권리를 챙겨주시고 소통을 해주시는 슨생님들이 계셔서 우리는 나름 학교라는 공간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추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폭력과 경쟁과 비교와 불통의 세상이었지만 결국 이해와 포용과 양보와 공감의 세상이기도 한 시간속에서 우린 기성세대의 세상이 응답해주길 바라던 시절의 갓 태어난 정신적 미성숙아의 시절이였습니다.. 이제 알기 시작한 세상의 의도와 나의 주체적 존재의 가치가 인정받고 고속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깨우치려고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교육받은 세상과 현실의 괴리와 부조리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던 시간속에서 가장 나를 나로 인정하고 지켜주는 존재가 바로 그 시절의 친구였습니다.. 그렇기에 수십년이 흘러 그때 슨생들의 나이보다 훨씬 지나버린 지금에도 우린 여전히 만나면 그때 그 슨생을 그때의 나로서 욕을하고 진저리를 칩니다.. 이 친구란 놈들은 술값은 안아까워해도 책 한권 사는거는 드럽게 아까워합디다.. 제가 가진 소설 몇권 던져주면 웃음꽃이 활짝 피더이다..그래서 잘 읽히고 재미진 작품을 찾다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참 많습니다.. 그만큼 게이고 슨생은 뛰어난 작가인게지요,, 그런 작가의 초기작들은 무척 재미지고 느낌도 좋습니다.. 이번에 읽은 "동급생"도 그런 작품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나 다를 바 없는 고딩들의 성장통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합니다..


    3. 하루미라는 여동생의 병과 관련된 서장에서 나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동생 하루미는 심징질환을 앓고 힘겹게 이겨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간은 흘려 몇번의 수술을 거쳐 이제 어느정도 세상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하루미때문에 가족의 모든 중심은 하루미에게 집중되어 있죠, 하지만 하루미는 그런 자신의 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명랑하게 말하지만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하루미의 병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하루미를 아프게 만든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꼭 복수하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은 누구인 지, 그리고 난 어떻게 그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 지, 모르지만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시작과 함께 유키코라는 여학생이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니시하라 소이치, 학교 야구부의 주장, 그리고 죽은 아이는 미야마에 유키코라는 야구부에서 매니져 관리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충격과 함께 유키코의 교통사고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문을 갔다가 집으로 향하는 니시하라에게 동급생인 미즈무라 히로코가 유키코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던져주죠, 유키코가 임신을 한 체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시하라는 그 임신의 중심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되죠, 그로 인해 유키코는 죽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도 또다시 유키의 죽음에는 또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름아닌 학교의 학생 지도교사인 미사키라는 여선생의 감시와 미행이 유키코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니시하라는 자신의 책임을 떠올리며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 학교측과 맞서는데........


    4. 이 작품은 무척 재미진 학창시절의 성장통을 다룬 미스터리소설입니다.. 소년이 아닌 성인으로서의 경계적 위치에서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세상의 삶을 배워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죠, 하지만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어른들의 세계는 그들의 눈에는 부조리와 거짓이 가득찬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선생이라는 존재는 통제와 감시와 압박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어른들의 세상속에서 만들어진 강박적 시스템속에 가두고 그속에 아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며 소통과 이해의 역할이 아니라 그들의 잣대에 맞춘 옳고 그름의 기준속에서 학생들을 미리 단죄하고 잘잘못을 가려 우월을 가르치기에 급급한 사람들입죠, 물론 요즘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그런 슨생들이 많았습니다.. 일본도 그런 모냥입니다.. 그런 공간을 중심으로 게이고 슨생은 아주 매력적인 인물적 캐릭터를 구성했습니다.. 니시하라라는 고3의 남학생의 주체적 활약은 아주 좋습니다.. 흔한 수동적 학생의 모습이 아니죠,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자신의 잘못과 주변에 벌어지는 상황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따져나가는 모습과 함께 어른이 어른답지 못함을 니시하라는 있는 그대로 까발리면서 학교의 부조리와 세상의 어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사회적 불의를 순수하면서도 강력하게 끄집어냅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자신들을 꾸역꾸역 밀어넣기 위해 슨생들이 만들고 열어놓은 문을 향해 들어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과 몇몇 아이들은 그 문 외에도 또다른 길을 찾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강력한 사회파 소설이라고 전 봤습니다..


    5. 학창시절에서는 가장 큰 사건이기도 하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과 그 중심에 놓은 인물의 이야기는 만약 내가 저 주인공의 입장이라면, 그리고 남녀의 감정등이 만들어낸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도 엿보입니다..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입니다.. 사랑에 대한 책임, 관계에 대한 책임, 서로에 대한 책임을 기본적으로 가져야만하죠, 다시 말하면 이것은 배려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이죠, 상처를 주지 말아야한다는 배려, 그리고 책임이 사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고자한 의도가 짙습니다.. 단순한 어린 학생들의 불장난이 초래한 죽음이라는 악몽같은 시간이 그들의 삶과 인생에 어떻나 반향과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어른들의 시선과 그들만의 잣대속에 갇혀버린 아이들의 통제적 세상의 억압들을 다루고 있죠,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 작품은 미스터리입니다.. 유키코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함께 학교에서 발생한 선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죠, 니시하라는 이 모든 죽음의 중심에 선 인물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그와 관련이 있죠, 그리고 그 죽음의 진실을 니시하라는 제대로 찾아내려고 하죠, 감추기에 급급한 학교의 슨생과 어른들, 그리고 그들의 방법에 적응한 아이들의 행동들, 하지만 니시하라를 비롯한 몇몇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의 정의를 자유롭게 만들어나갑니다.. 그리고 순수하지만 아픈 사랑과 공감과 공유를 나누죠, 친구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흔한 학창시절의 드라마틱한 극적 구성으로 그려졌지만 탄탄하고 꼼꼼하게 그려낸 이야기와 인물들의 매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특히나 고등학생이라는 그 시절의 고민이 가득한 혼란스러운 심리적 문제를 대단히 섬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6. 게이고 슨생은 아시다시피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가독성이 좋습니다.. 스토리의 구성이나 인물들의 대중적 투영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공감도 잘되죠, 그렇기에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작품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보통 재미는 있는데 예전보다는 못해라는 독후감이 많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게이고의 초창기의 작품들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설정이나 소재나 주제적 측면에서도 이후에 집필된 다양한 작품의 의도보다는 보다 질적 접근이 잘 이루어진 경향이 짙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동급생"은 작가가 만들어낸 학창시절을 다룬 얼마되지 않은 작품중에서도 아주 재미지고 찰진 내용을 가진 작품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흔한 스토리의 극적 전개이긴 하지만 가볍진 않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나는 진실속에서 보여주는 사회파적 관심은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의 화두는 지금 우리의 삶과 현실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아이들의 눈과 시선속에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고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스럽게 부조리한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세상의 모습을 어른들은 여전히 가르치고 그들처럼 만드는 것이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도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는 이시대의 어른이지만 지금의 저의 여유를 찾기 힘들고 경제적으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저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억압되고 통제되어서라도 스스로 경쟁에서 이기고 남들보다 우위가 되어 이미 만들어진 기득권의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맞을겁니다.. 그게 조금 힘들더라도 나중의 아이의 삶을 위해 어른이 해줘야되는 책임일지도 모르죠, 정말 과연 그럴까요, 이미 세상속에서 비교되어버린 어른들의 시선이 아니라 이제 세상속으로 나아가는 비교되지 않은 아이들의 시선속에서 그들의 요구와 요청을 들어줄 순 없을까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뭐야 이거 느무 꼰대적으로 마무리되는거 아냐, 끝내, 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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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백 요다 픽션 Yoda Fiction 1
차무진 지음 / 요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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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빠, 왜 인간들이 다 죽는거야..라고 아이가 묻습니다..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때문입니다.. 설명합니다.. 인간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는 지, 인간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죽음의 미래를 안겨주는 지에 대해서 말이죠, 구구절절 영화 속 이야기와 미래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초3인 아이는 다 듣고선 간단하게 한마디 합니다.. '그럼 그렇게 안하면 되잖아' 아주 간단하죠, 아이의 입장에서는 왜 자기 죽을 짓을 하는 지 의아해할 수 밖에요, 여기서 또 이런저런 말을 해야되는게 맞는 것 같지만 남들 보다 조금 더 많은 아이를 키워본 경험으로 저 또한 간단하게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줍니다.. '그러게, 바보같다, 저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인간은 바보같습니다.. 자기 죽을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죠, 근데 과연 인간이 자기 죽을 짓을 하는 걸까요, 멀리서 보면 그러할진데 가까이서는 자기 목적과 이기적 욕망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만이 이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다는 같잖은 소유욕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죽음의 미래로 몰아가고 있는 모냥입니다.. 그렇다보니 희망적이고 밝은 미래의 세상은 근래들어서 더욱 눈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소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항상 디스토피아의 종말적 세계관이 팽배하고 또 대다수의 이야기속에서 제노사이드의 말살적 발상과 사그러져가는 인간의 세상의 암울함을 그리고 있죠, 인간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이 알기 쉬운 흥미로운 미디어적 발상등으로 말이죠, 그래서 우린 좀비를 사랑합니다.. 암요,


    2.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어쩔 수 없는 힘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하지만 야생이고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이 주는 흐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죠, 인간들만의 세상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사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세상을 지배하려듭니다.. 돌연변이죠, 자연의 돌연변이인 인간들은 역사를 통해 자연에 반하는 세상을 만들어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구와 이 세상의 역사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은 기껏해야 몇천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그 짧은 시간동안에 급속도로 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몇세기만에 이 세상의 틀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린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우리들 스스로를 비토하고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세력과 권력과 힘을 거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대다수의 인간의 두려움은 세상을 이끄는 몇몇의 병신들 손에서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에 맞춰 선동되고 세뇌당하며 당장의 삶에만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기에 똑똑한 저와 머리좋은 작가들 같은 뛰어난 인간들은 끊임없이 경고와 알람을 우리들의 삶 곳곳에 배치하여 비상벨을 울려주려고 하는 것이죠, '느네들, 자꾸 이러면 곤난해, 종말이 되면 느그가 느그 팔,다리를 먹어야될 시대가 올지도 몰라'.. 뭐 이런 종말적 세계관들 말입니다..  설마하지 마세요, 교과서에서 배웠죠,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차무진 작가의 종말적 세상의 암울함을 대단히 극적 드라마로 그려낸 "인더백"입니다.. 가방안에 뭐가 들었을까요,


    3. 공습이 시작되기전 서울을 벗어나려고 집을 나선 동민의 가족은 11시의 공습전에 대교를 건너 서울을 벗어나 대구로 갈 준비를 서두릅니다.. 하지만 예고한 공습 시간인 11시가 아닌 10시에 쏟아져내리는 미사일로 동민은 아내 지연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하죠,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6살의 아들 한결이는 공습과 함께 다리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죽어버린 아내의 사체를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하는 동민은 이내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심하게 상처를 입은 아들을 발견하죠, 그렇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들을 이곳에서 벗어나 재난이 닥치지 않은 고향 대구로 데려가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순식간에 세상은 무너져내리죠,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함께 북한의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 한번도의 죽음이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북한의 의도로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공습을 남한에 쏟아부었다고 알게 되죠, 그리고 그 미사일 속에는 수많은 식인 전염 바이러스가 탑재된 체 한반도 전체에 살포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현장에서 힘겹게 생존을 한 동민과 아들 한결은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운 대구까지 탈출하려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지옥의 나락으로 변해버린 것이죠, 순식간에 살아남고 생존한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인해 식인을 하게 되고 살아남은 인간은 또다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먹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군인들은 소탕하는 중이구요, 누가 식인인 지, 일반인인 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세상속에서 아들만은 지켜내고자하는 동민은 커다란 백속에 우겨넣듯 아이를 감춘 체 남쪽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 곳곳은 모두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니 과연 이들 부자가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4.  어익후, 괴물같은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인 좀비소설이나 종말론적 세계관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전형적인 미래소설과는 다릅니다.. 아주 현실적이고 대단히 파괴적인 종말론을 다룬 소설입죠, 인간의 극단적 이중성과 내면의 극악이 생존속에서 어떻게 변질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장르소설입니다.. 거칠고 비릿한 피내음이 가득한 실질적 종말의 세상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소설임에도 활자가 그려내는 사실적 묘사에 거부감이 들 정도입니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비이성적인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작품속의 주인공인 부자의 모습은 대단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살아남고 생존하며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 -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지켜내고자하는 - 을 이야기하고 있죠,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야만과 탐욕속에서 누군가를 지켜내려는 또다른 반대적 인간의 이성과 본성을 자연스럽게 도출해내는 것이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서 스스로가 인간임을 끝까지 고수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가 만들어가는 생존의 길 아래에서 독자들이 숨죽이고 그 여정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소설은 동민이라는 인물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의 모습은 자의든 타의든 세상이 저질러놓은 파멸의 공간속에서 적응하고 극악하게 변질되어 버리죠, 그렇게 세상이 무너져내리기전 죽음을 만난 동민은 아내가 그에게 던져놓은 물음과 삶의 의도를 지켜나가려고 하죠, 약물의 힘을 빌어 환상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않으려 노력하죠, 생존한 인간들은 스스로 인간이길 거부했지만 동민은 살이 찢어지고 고통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까지 자신의 아이의 세상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자신을 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만의 세상속에서 버텨나갈 힘을 죽음으로부터 끌어냅니다..


    5. 솔직히 종말론적 세계관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게서 등장하는 설정들이 이 작품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같은 가족의 생존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하나의 전형처럼 느껴지죠,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상의 극악함과 인간의 잔인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장르적 차용은 언제나 편리합니다.. 좋은 본보기들이 많죠, 하지만 이러한 차용이 누구나와 같다면 큰 반향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자체의 독창성과 무게감을 갖지 못하면 독자들은 쉬이 외면해버리기 일쑤입니다..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죠, 더도 덜도 말고 딱 그수준이라면 굳이 새로운 작품에 눈을 돌리지 않을겝니다.. 하지만 이 작품 "인더백"은 좀 다릅니다.. 아주 거칠고 잔인한 세상의 종말을 눈으로 봐라보는 듯한 입체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아버지로서 느끼는 감정선에 대한 공감도 있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가장 공통된 질문속에서 쏟아내는 인간의 인간적이지 못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행위들에 대한 동조적 투영성 또한 느끼게 되죠, 쉽게 말해서 참 인간은 복잡다단하면서도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대원칙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떻게해서든 생존의 방식을 깨닫는다는 것 말입니다.. 이 작품속에서는 많은 부수적 배경과 종말론과 관련된 주변의 모습들이 들어가있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냅니다.. 그것이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자의 의도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벌어지는 반전과 극대화된 상황적 처참함은 아쉬움이 조금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의도된 반전보다는 보다 현실적 종말론의 세상속에서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득하니 이끌고 나갔으면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6. 죽음과 야만으로 가득차버린 세상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임을 지켜나가는 부자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말그대로 고군분투의 생존의 여정속에서 끝까지 자신들을 지키며 지옥속에서 또다른 희망의 빛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끝없은 생존의 법칙을 확인하는 것 같아서 전형적이고 흔한 클리세의 종말소설이라도 저로서는 무척이나 즐겁고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소설은 종말이랍시고 과하게 국가를 들먹거리고 세상을 들먹거리고 세계관을 들이밀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남은 인간들과 그와중에서도 끝까지 인간이길 원하는 또다른 인간들의 각각의 심리적 내면을 드러내고 그 모습속에서 뭔가를 보여주려고만 하죠, 개인적으론 이런 의도가 좋습니다.. 물론 소설속의 조금은 과격하고 파괴적 느낌의 직설적인 문장과 식인적 세상의 인간들의 이미지가 머리속에 그려지고 눈에 보일 듯 하면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세상속의 이야기를 한다는데 뭔 독자들의 거부감을 고려할까 싶어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또한 조금은 단순한 흐름과 진행방향으로 이어지는 서사인지라 반복적인 생존의 이야기에 국한된 구성은 제가 전작인 "모크샤 혹은 아이를 배신한 어미 이야기'에서 느꼈던 구성적 매력에 비해 다소 아쉽기도 했지만 종말적 세상의 상황적 묘사와 심리적 압박과 혼란으로 리얼하게 그려낸 작가의 장르적 감성만으로 본다면 충분한 즐거움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소설속에서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중소설이라하면 많은 대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흔한 편안함이 작가에겐 쉬운 선택일진데 차무진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장르소설작가로서 대단히 용감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누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을 이렇게 직설적이고 리얼하게 그려내겠습니까, 아무나 이리 몬해, 난 그렇게 봐.. 느네는?.. 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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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선택
데이비드 모렐 지음, 김이숙 옮김 / 큰나무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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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한 이야기긴 합니다만 세월호 이야기 좀 합시다.. 뭐냐고, 또 세월호냐고, 언제까지 세월호를 들먹거리며 살꺼냐고,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런 말을 무쟈게 듣습니다.. 이제는 좀 잊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언제까지 죽은 아이 옷고름 부여잡고 눈물짓고 있을거냐고,, 심지어 저의 주변 사람들도 그럽니다.. 솔직히 그들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친척이, 자신의 주변사람이 당한 아픔이 아니니까요, 저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저의 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게 아니죠,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한다손치더라도 이제는 살아남은 아이들, 또다른 이 시대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힘겹지만 그들은 떠나보내고 마음을 다잡아야한다고 그럽니다.. 근데 이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내 아이가, 우리의 자식이 그렇게 제대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이제 조금씩 세상을 알려고 기를 쓰는 나이에 두려움에 떨면서 물이 차올라 숨이 막혀 공포속에서 울며불며 자신의 삶을 내려놓게 되었던 그 순간을 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내 아이라면, 내 자식이라면, 내 손주라면,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왜 더 많은 아이들이 살아날 수 있었는데 우린 그렇게 못했는 지, 그렇게 살아나고 여전히 세상의 빛을 보고 살 수 있었을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가, 이 시대의 어른들이 외면하고 숨기고 가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이 차오르는 순간까지도 살고자했던 그들은 이미 끝이라고 단정해버리고 말았는 지, 밝혀내야되는거 아닙니까, 5년이 아니라 10년이 넘어 기억이 가물거리더라도 아프고 고통스러운 역사라고 외면하고 고개를 돌리면 안되는거 아닙니까, 내 아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라면 그렇게 함부로 말해고 그냥 내비두라고 떠들어도 되는겁니까,


    2. 세상 어느 부모가 즐겁게 웃으머 떠난 여행길에서 차디찬 몸으로 그것도 수십명은 그 형체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했는 지, 그 심정을 공감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품속에서 죽은 아이를 보며 절규하고 평생 고통속에서 그 순간을 잊지못해 삶이 지옥으로 변해버린 부모들도 허다합니다.. 내 일이 아니죠, 내 주변 일이 아니죠, 그러니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진실을 원하는 이상 그 일은 나의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요, 누군가에게는 닥칠 수 있는 이 나라의 잘못된 행정과 잘못된 정치세력과 잘못된 기득권의 갑질로 인해 희망밖에 없어야할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세상에서 버려진 사실을 우린 잊어선 안됩니다.. 시간이 얼마가 흐르건 중요하지 않죠, 기억하고 되새기고 그 진실과 답을 끝까지 찾아내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또다른 내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부모는 가족을 지켜야합니다.. 외부의 온갖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부모라면 아이를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끝까지 지켜내야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이치이고 진리입죠, 이번에 읽은 오래된 스릴러작품을 보면서 검찰의 세월호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이야기에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래 그냥 화가나서 끄적거려봤습니다.. 소설은 위의 이야기와 다른 액션스릴러이지만 아이에 대한 부모의 입장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모렐의 70년대 소설 "위험한 선택"입니다.. 데이비드 모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람보 1편의 원작자라는 것이죠, 대단한 작품이고 이 작픔은 그 작품을 집필한 후 두번째로 집필한 작품입니다.. 내용은 성경에서의 '욥'의 고난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고 시련을 당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시작부터 고난은 시작됩니다..


    3. 로이벤 본은 소설가입니다.. 그는 일상의 아침을 맞죠, 그리고 우유를 고양이의 그릇에 부어주고 아이들은 아침을 먹을 준비를 합니다.. 근데 고양이가 우유를 마신 후 몸이 뻣뻣해진 체 쓰러집니다.. 부부는 자신의 딸이 고양이를 보기전에 지하실로 치웁니다.. 밖에서 뭘 잘못 먹었거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이라고 예상하고 넘기죠, 그리고 가족이 식탁에 앉아 유아인 아들의 분유를 탄 부인은 아이의 젖병을 들어 먹입니다..그순간 본은 고양이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가 알던 한 테러리스트의 말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먹던 젖병을 쳐내지만 아들은 숨을 헐떡이며 이내 죽어버리죠, 그리고 테러리스트인 케니가 자신과 가족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과거 본은 케니와 그 테러조직을 조사하고 그들을 세상에 드러냄으로 그들의 타켓이 되어버린 것이죠, 경찰이 사건 직후 본의 집을 방문하여 사건을 확인하지만 본의 이야기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내 본의 집으로 테러조직이 들이닥치고 이들은 본의 가족을 끝까지 제거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것임을 본은 깨닫습니다.. 경찰도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죠, 오히려 경찰의 보호를 받는 와중에도 그들은 총기를 난사하며 본의 집으로 공격을 해옵니다.. 그리고 본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살아남은 가족과 떠납니다.. 그들에게 생존은 끝없은 삶의 시련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본은 부인 클레어와 사라와 함께 생존의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4.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생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두려움에 가득찬 한 가족의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군더더기를 완전 배제하고 시작부터 가족에게 닥친 재앙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누구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의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드러납니다.. 한 가족이 어떻게 파멸로 순식간에 떨어져버리는 지, 작가는 거칠고 과감하게 진행합니다.. 아이가 죽죠, 독이 든 우유를 먹고 가장 중요한 가족의 아이가 죽음을 달리합니다.. 어떤 이유던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도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을겝니다.. 하지만 작가는 로이벤 본이라는 인물을 통해 단순한 협박이나 위협적 경고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죽음의 테러를 당하는 것을 그립니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이고 설정이고 주제이긴 합니다만 그 중심에 놓인 가족에 대한 절절한 생존적 부성애는 이 작품이 지향하고자한 액션스릴러의 의도를 명확하게 합니다.. 전작인 람보의 이야기와 큰 틀에서는 다를 바가 없을 뿐이죠, 단지 람보만큼의 액션적 재능을 가진 이가 아닌 소설가라는 직업속에서 어쩔 수 없이 터득한 생존의 방법으로 죽음의 절벽에서 떠밀리지 않으려고하는 일반인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속의 이야기는 보다 대중적 두려움을 독자로서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하나의 서사속에서 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가족의 생존적 방법과 그 이야기에 몰두하고 어떻게 죽음의 테러속에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생존해나가는가를 보여주는 의도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존적 욕구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보여주고자한 의도 말이죠, 세상 무엇보다 쉬운 죽음을 보여주는 인간이지만 또 끝까지 생존하고자하는 끈질김도 다르지 않다는 것,


    5. 단순한 이야기죠, 소설은 시작전 원제와도 상관있는 성경의 이야기의 내용을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전 크리스천이 아니기에 그 내용을 잠시 알아봤는데 성경속의 '욥'이라는 인물의 고난을 소설의 본이라는 주인공에 빗대어 시련을 이끌어낸 듯 싶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후의 데이비드 모렐이라는 작가의 전반적인 스릴러의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까지 많은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데이비드 모렐 작가는 대단히 유명한 영미스릴러작가입니다.. 그 영향력도 대단하죠, 스릴러라는 장르에 있어서 모렐의 파워는 아주 크다고 하더군요,뭐 그러려니 합시다.. 우리나라에서는 뭐 SOSO하니까요, 그런 그의 작품의 경향은 상황속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의 감성과 묘사적 방법이 아주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주인공에게 닥친 상황들을 그의 시점에서 심리적 혼란돠 두려움과 공포적 배경을 자연스럽게 엮어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것이죠, 대화적 구조보다는 벌어지는 상황과 흐름속에서 이어지는 입체적 묘사에 주안을 두는 문장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세대와는 조금 맞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영미스릴러의 거장이지만 동양적 사고와는 조금 차별적 스토리이기 때문에 장르적 즐거움과 집중은 뛰어나지만 크게 머리속에 담아두고 고민하고 오래갈 인식이 남는 작품들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 작품 '위험한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남자의 생존적 본능과 그 과정을 담은 것 이외에 이 작품속에서 다른 감상을 받은 것은 없으니까요,


    6. 근데 그걸 뭐라하면 안되겠죠, 애초에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고자한 것이니까요, 이 작품은 한 가정의 생존의 사투를 그려내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아야하는 지를 보여주고자한 것이죠, 극악한 상황과 주변의 시련과 고난을 배경속에 던져두고 이들이 힘겹게 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작가는 단도직입적이고 거칠지만 세밀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작가는 인물적 처절함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스릴러작가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40년도 더 된 작품입죠, 그럼에도 작품은 개인적으로 아주 집중하면서 읽었습니다.. 국내 출시한 시점도 20년이 지난 작품입죠, 하지만 국내에 데이비드 모렐의 작품은 몇편이 없습니다.. 워낙 영미적 감성과 액션스릴러의 장르적 편향성이 높은 작가인지는 몰라고 국내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작가이지만 과거 영미 스릴러소설의 단순함과 거친 액션의 감성과 미국적 사고의 틀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생존의 방법등에 조금 익숙하진 독자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작품이라꼬 전 생각합니다.. 단지 역시 오래된 작품인지라 번역이 아쉽긴 합니다.. 대화체의 구성이 상당히 어색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황의 묘사나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변역은 나름 깔끔했습니다.. 물론 중고서적으로 구입을 하셔야겠지만 얼마되지 않은 데이비드 모렐 작가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희소성이 제법 있어 보입니다.. 뭐 게다가 읽는 재미도 나쁘지 않으니 기회되시면 함 챙겨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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