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의 생애

 
그림 형제는 형 야콥 그림(Jacob ludwig karl Grimm, 1785~1862)과 동생 빌헬름 그림(Wilhelm Karl Grimm, 1786~1859)을 말한다. 이 두 형제는 독일의 대학 교수였으며 언어학자로서 독일의 옛날 이야기를 수집하여 독어의 문법과 역사를 연구하였고 사전과 문법책도 만들게 되어 《어린이와 가정의 옛날 이야기》를 각각 1812년과 1815에 두 편의 책으로 내었는데 근대 아동 문학의 소중한 모태가 되었다.

그림 형제는 민화나 전설 속에 독일의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독일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국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던 민화나 전설을 모아서 정리하였다. 따라서 그림의 동화는 민족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동화집에는 《백설공주》,《헨젤과 그레텔》,《브레멘의 음악대》,《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가 있다.

▶ 그림 형제의 생애

그림 형제는 독일 헤센 주의 하나우라는 작은 도시에서 5남 1녀 가운데 첫째와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그림 형제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졌으며, 1808년 어머니마저 죽게 되어 당시 23세의 야콥은 4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1명을 부양해야만 했다. 학자풍이었던 야콥은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데다 얼굴 생김새가 날카로운 반면에, 빌헬름은 키가 크고 인상이 부드러웠으며 사교적이고 모든 종류의 예슬을 좋아했다.

1802년 야콥이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들어가고 이듬해에 빌헬름도 입학했다. 처음에 형제는 독일 법률을 연구하기로 했다. 1806년에 독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싸움에 지고, 어머니가 사시는 카렐 시는 나폴레옹의 아우가 다스리는 나라의 서울이 되었다. 박사가 된 형제는 그런 가운데서도 독일 고대 문학과 어학 연구를 계속했다.

야콥은 한 때 외교관이 되어 헤르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외국에 나가 있기도 했다. 그 후 두 형제는 1830년에 게팅겐 대학에서 사서에 이어 교수가 되었고 1841년에 베를린으로 옮겨가서 프로이센 학사원의 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가까운 헤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을 여행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 들은 것을 토대로 이를 재미있게 다시 엮었다. 어릴 때부터 한 방에서 자고 먹고 또 같은 복장을 하고 쌍둥이처럼 자란 다정한 형제는 함께 뜻을 모아 동화집을 꾸몄다. 이것은 민족 설화를 모으는 작업이기도 했으며 언어 연구의 일부이기도 했다. 13년의 긴 세월간 수집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1812년에 85편을 제 1집에 1815년에 70여편을 제 2집에 모아 출판했다.

그림 형제가 모은 250편의 이야기 중 지금 동화로서 완성되어 내려오는 것은 약 200여편 된다. 낭만주의 동화가 지닌 허황된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에 실린 200편의 이야기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 상상력, 신념을 전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구사하는 단어와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였다. 뛰어난 점은 옛날이야기의 민담적 성격을 바꾸지 않고서도 읽기 쉬운 형태로 만든 데 있다. 그 결과 이 책은 독일을 비롯해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널리 보급되어 지금은 70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모든 곳에서 민담수집의 모범이 되었다.

그림 형제 (Grimm)

독일의 언어학자ㆍ형제작가. 형 야콥(Jacob Grimm.1785∼1863), 동생 빌헬름(Wilhelm Grimm.1786∼1859). 하나우 출생. 형은 위대한 연구가였으며, 아우는 우수한 교사였다.

민요와 민담집은 고전이 되었으며, 특히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1812∼22)가 유명하다. 이 책은 보통 <그림 동화>로 알려져 있으며 민속학의 연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야코프는 역사언어학과 게르만 문헌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야코프 루트비히 카를 그림과 빌헬름 카를 그림은 5남 1녀 가운데 첫째와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리프 빌헬름은 법률가로서 하나우의 시청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그 뒤에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칼뱅주의 개혁교회의 목사로 있는 헤센의 다른 소도시 슈타이나우에서 사법관직을 맡았다. 1796년 아버지가 죽자 그림 형제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졌으며, 1808년 어머니마저 죽게 되어 당시 23세의 야코프는 4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1명을 부양해야만 했다. 학자풍이었던 야코프는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데다 얼굴 생김이 날카로운 반면에, 빌헬름은 키가 크고 인상이 부드러웠으며 사교적이고 모든 종류의 예술을 좋아했다.

카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뒤 형제는 공무원이 될 생각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1802~06). 마르부르크에서 그림 형제는, 그들에게 민간전승시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준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법학에서 역사학파의 창립을 도운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의 영향을 받았다. 자비니는 뒤에 그들의 모든 작품의 실질적 토대가 될 고서학(古書學) 탐구의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밖에도, 민간전승시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1744∼1803)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형제는 독자적으로 각기 자신의 원칙에 따라 창작활동을 했다. 1805년 형 야코프는 중세의 법률에 관한 필사본들을 연구하기 위해 자비니를 따라 파리로 가서 이듬해에는 카셀의 육군성 사무관이 되었다. 동생 빌헬름은 건강 때문에 1814년까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1806년 프랑스 침공 뒤, 야코프는 1808년 베스트팔렌의 제롬 왕의 전속 사서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국무원의 회계감사관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1813년 다시 헤센의 일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1814∼15년 프랑스인들이 헤센과 프로이센에서 빼앗아간 값진 책과 그림들을 되찾기 위한 사절단의 서기관 자격으로 2차례 파리에 다녀왔으며, 빈 회의(1814. 9∼1815. 6)에도 참여했다. 한편, 그동안 빌헬름은 카셀의 선제후(選帝侯)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고(1814), 1816년 야코프가 그와 합류했다. 그 무렵 형제는 법조계 대신 순수한 문학연구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뒤 몇 년 동안 검소하게 살면서 꾸준한 작업을 통해 평생에 걸친 관심사를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그들의 총체적인 사고는 당대 사회·정치적 변화들과 그로 인한 문제들에 뿌리 박고 있었다. 야코프와 빌헬름도 18∼19세기를 풍미한 '고딕' 낭만주의와는 전혀 무관하였으며, 정신적인 면에서도 낭만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가까웠다. 그들은 먼 과거를 탐구하였고, 과거 속에서 당대의 모든 사회제도를 이루는 토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토대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림 형제는 독일을 넘어선 자료들, 즉 스칸디나비아ㆍ스페인ㆍ네덜란드ㆍ아일랜드ㆍ스코틀랜드ㆍ영국ㆍ세르비아ㆍ핀란드의 문학전통까지도 포용하고자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민요와 민담을 수집한 것은 1805년 문학적 가치가 있는 민요를 수집하고 있던 친구 아힘 폰 아르님과 브렌타노를 위해서였다. 나아가 형제는 몇몇 비평문을 통해 민속문학과 다른 글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검토했다. 그들에게 있어 민간전승시는 인류의 영원한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을 표현한, 유일하게 진정한 의미의 시였다.

그림 형제는 아르님의 격려에 힘입어, 수집한 민담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 이야기>로 출판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어른과 어린이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낭만주의 동화가 지닌 허황된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에 실린 200편의 이야기(몇몇은 인쇄된 자료에서 얻은 것이지만 대부분은 구전된 것임)는 시대가 흘러도 변치않는 사람들의 영혼, 상상력, 신념을 전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구사하는 단어와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빌헬름의 뛰어난 점은 동화의 민담적 성격을 바꾸지 않고서도 읽기 쉬운 형태로 만든 데 있다.

그 결과는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이 책은 독일을 비롯해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널리 보급되어 지금은 7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둘째, 모든 곳에서 민담수집의 모범이 되었다. 셋째, 그림 형제가 각 이야기에 붙인 주석은 다른 연구논문들과 더불어 민간설화학, 더 나아가 민속학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이야기들은 최초의 '과학적' 민담집으로 남아 있다.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에 뒤이어 독일의 역사와 각 지방에 얽힌 전설을 모은 <독일의 전설>(1816∼18)을 펴냈는데, 이 책은 문학과 민간설화 연구에 영향을 미쳤으나 폭넓은 인기는 얻지 못했다.

형제는 그 뒤 1826년 토머스 크라프턴 크로커의 <아일랜드 남부의 요정 전설과 구전설화> 번역판을 내면서 요정 연구에 대한 긴 소개문을 직접 써 서문으로 내놓았다. 이와 동시에 고대문학의 문자화된 기록에도 관심을 기울여 독일어와 그밖의 언어로 쓰여진 고대 원문들을 새로 편집해 출판했다. 빌헬름의 남다른 업적은 6∼16세기의 문학과 미술에 언급된 영웅전설에 나오는 주제와 이름을 모아, 사가(Saga)라는 문학형식에 대한 평론을 덧붙여 <독일의 영웅담>을 펴낸 데 있다.

20년 동안(1806∼26) 이러한 주제들을 함께 연구하면서 야코프는 언어학에도 손을 대 <독일어 문법>(1819∼37)이라는 방대한 문법서를 냈다. 이 책 제목의 'deutsch'란 말은 엄격하게 '독일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공통적인'이라는 어원학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게르만족의 모든 언어에 적용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이 책은 처음으로 여러 게르만제어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야코프는 여러 언어에 나타나는 음운변화(모음과 자음 모두)의 자연법칙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적 어원학의 방법론, 즉 언어와 의미변천 사이의 관계연구를 위한 토대를 놓았다. 나중에 '그림 법칙'으로 알려지게 된 이론을 통해, 야코프는 발생학적으로 연관된 언어들에서는 자음들 사이에 규칙인 대응관계가 있다는 덴마크의 라스무스 라스크가 앞서 발견한 원칙을 입증했다. 야코프의 문법서는 당시 게르만어·로망스어·슬라브어 등의 언어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824년 야코프 그림은 친구인 V. S. 카라드지치가 쓴 세르비아어 문법서를 번역하면서 슬라브어와 문학에 대해 박학한 서문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야코프는 독일의 민간문화에까지 연구영역을 넓혀, 고대의 법 관행과 신조에 대한 연구서 <독일 법제사 자료>(1828)를 펴냈다. 이 책은 체계적인 자료를 제공하나 실행법은 다루지 않고 있다. 이 연구서의 출판에 자극받아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남부 슬라브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책들이 나왔으나 아직까지 야코프의 연구서를 능가할 만한 책은 없다.

▶ 작품

【그림동화집】

독일에 전해 오는 민간실화를 그림형제가 수집하여 편집한 민화집, 원제는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그림형제는 민족적 민중적인 것을 강하게 지향하는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서 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학문적 목적으로 민간에 구전되어 오던 옛날 이야기를 채집하였고 또 고문헌에서도 채록하였다.

1812년 86편을 수록하여 제1권을 출판한 뒤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수록하여 발행하였으며, 57년 〈그림동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제7판에는 마법동화, 동물동화 등 다양한 200 여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백설공주〉〈빨간모자〉〈헨젤과 그레텔〉〈늑대와 7마리 어린 왕〉〈황금거위〉〈엄지공주〉등이 유명하다.

〈개구리왕자〉-- 동물의 모습으로 되어 있는 왕자를 사위로 삼는 것을 줄거리로 한 혼인담의 하나이다. 이 동화는 세계 각지에 퍼졌는데, 터키의 비슷한 이야기들도 그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것이라 한다. 한국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우렁각시〉가 있다.

〈헨젤과 그레텔〉-- 그림동화집의 15번째 이야기. 그림형제가 헤센에서 구전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백설공주〉-- 그림동화집의 53번째 이야기. 유럽, 그리스, 터키, 러시아 등에 분포되어 있는 민화의 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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