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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깊고 넓은 말들의 풍경들
09 0408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지 1992 *****
솔직히 좀 놀랐다. 그의 사유가 이 정도로 넓고 깊었나. 대학 때 사실 문지 쪽 글은 잘 읽지 않았다. 관념적이고 비민중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땐 거의 창비였다. 김현도 문지 쪽이었기에 그의 유명세에 비한다면 따 당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책을 처음으로 정독한 결과, 그가 왜 최고의 평론가였는지, 그를 왜 평론이란 개념을 한국에 정립시켰다고 추켜세워 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저 독서일기를 읽은 것뿐인데 10년치 생각거리를 같이 나눈 느낌이다. 김현식으로 말하자면-‘독서’의 범주에선 대부분이 읽어보지 못한 책들과의 미팅이란 점, ‘일기’의 영역에선 독서, 등산, 영화, 사유 등 독서에 한정되지 않은 그의 생각이 일기란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살찌우고 있다. 곱씹어 봐야 할 글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1) 혹독한 작품평
별 재미가 없다./진부하고 지겹다./재미있는 시집이다./…에 실린 시들의 수준은 고르고, 시인들의 키도 고르다. 이것은 칭찬이며 욕이다./…은 너무 많이 쓴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추한 느낌은 들지 않으나, 놀람을 주지도 않는다./자라지 않는 비평가를 보는 것은 나이든 난쟁이를 보는 것처럼 괴롭다./그녀의 재치가 더 세련되거나 더 신중해졌으면 좋겠다. 더 세련되면, 이상처럼 비-상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더 신중해지면, 김수영처럼 풍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관념의 체조같기도 하다.
2) 사유의 깊이
타자의 철학 :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165쪽)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178쪽)
내 눈에 들어오는, 예를 들어, 이쁜 여자의 젖 궁둥이, 내 코에 들어오는, 최루탄 냄새-오, 이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벌써 맵다-물비린내, 내 입에 들어오는, 맛있는 과일, 단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욕망이다.(…)나는 백전백패다.(114쪽)
3) 등산과 벗
내가 내 육체의 주인이 아니라, 내 육체가 내 주인이라는 생각에 갈수록 깊게 사로잡힌다.(269쪽)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54쪽)
4) 영화를 보고
오랜만에 홍성원과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봤다. 화면은 아름다웠고 대사도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문학적인 영화이다.(…)아름다운 서정시를 두 시간 이십 분으로 늘려논 영화라고 할까.
5) 죽음에 관하여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25쪽)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282쪽)
김현의 <말들의 풍경>과 <책 읽기의 괴로움>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