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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작가실록 2 : 수필 - 작가로 보는 조선 고전 ㅣ 조선작가실록 2
박정란.서재인 지음, 조윤주 그림 / 상상의집 / 2018년 9월
평점 :
앞에서 만나본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조금더 릴리에게 부담을 주는 제목들입니다 ㅎㅎ 제목이 익숙치 않아서 그런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와중에 엄마의 눈에 딱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어요 바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난중일기
한중록 v
열하일기
서유견문
백범일지
계축일기
사실 혜경궁 홍씨(헌경 왕후)는 사도 세자의 아내와 영조 며느리, 정조의 어머니, 순조의 할머니로써 더 알려진 여인이죠? 이 중에도 사도 세자의 아내라는 위치는 아주 역사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영화로도 제작된 그 스토리에서 저는 아내보다 엄마로써의 혜경궁 홍씨를 기억해요 정조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로써의 마지막 모습은 사도 세자를 져버릴수 밖에 없었는데요 아.. 그녀의 그 기구한 삶을 수필로 옮긴 한중록.. 꼭 어떻게 풀어내는지 제일 먼너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내 나이 열 살. 사도 세자와 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다. 사도 세자는 지혜롭고 총명했다. 하지만 영조 앞에만 서면 두려움으로 작아졌다.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사도 세자의 마음은 자라고 자라, 큰 병이 되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선언하였다. 사도 세자는 최선을 다했으나, 영조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1752년, 정조를 낳았다. 영조와 사도 세자 사이에서 불안해하던 내게 찾아온 소중한 아기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은 거짓인가 보다. 영조는 자식을 차별했고, 사도 세자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마음의 병 때문인가? 사도 세자의 기행은 점점 심각해졌다.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병에 걸리고, 사람을 ... 해치기까지 했다. 나경언의 상소로 영조와 사도 세자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그리고 사도 세자가 역모를 계획한다는 몹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도 세자의 어머니 선희궁은 정조와 나를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사도 세자의 목숨을 거두라 빌었다 영조는 사도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들어가라 명했다. 사도 세자가 무사하기를 눈물로 기도했다 하지만 끝내 ... 사도 세자는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아비를 그리 보냈어도, 나는 환갑까지 죽지 않고 살았다. 후손들이 사도 세자를 그릇되게 기억하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 보고자 한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이예요 환갑이 된 후 10여년간 4편으로 한중록을 썼는데 1편은 어린시절과 세자빈으로써의 삶, 2~4편은 사도 세자의 죽음등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집안이 받은 오해를 해명하는 글이죠 사실상 몰락한 그녀의 집안을 일으키고자하는 의도가 담긴 수필이라고 볼수 있어요
글의 내용에는 영조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도 세자의 상황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경모궁이 열다섯 살 되던 해, 영조는 갑자기 대리청정을 선언하셨다. 경모궁은 나랏일을 보며 중요한 상소가 올라오면 영조께 여쭈었다. 그때마다 영조는 크게 꾸중하셨다
"그 정도 일을 혼자 판단하지 못해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나랏일을 대신 맡긴 보람이 없다."
그래서 여쭙지 않고 처리했더니 중요한 일을 묻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며 나무라셨다.
어떤 행동을 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도 세자와 그를 지켜보는 혜경궁 홍씨의 마음이 왠지 짠하고 안타까웠어요 영조는 왜 이렇게 사도 세자의 마음을 아프고 허하게 했을까요? 이런 행동들은 사도 세자로하여금 더 불안증이 들게하고 외롭고 자존감을 가질수 없게 만들었을 것 같아요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구나. 비가 오지 않은 건 세자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영조는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에도 경모궁의 탓을 하며 꾸짖으셨다 이에 경모궁은 하루가 다르게 마음의 병을 키우셨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사도 세자의 잘못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영조의 마음은 더 힘들지 않았을까해요 그래도 그들의 사이를 좋게해 줄 세손(정조)을 낳은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의 사이는 더 나빠져갔다고 해요
1757년은 경모궁이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의대병에 걸렸으며,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해이기 떄문이다. 너무나 놀라 선히궁에게 사실을 고하였더니, 선희궁께서는 음식을 끊고 누워 눈물만 흘리셨다.
아마 좁디좁은 궁에서 선희궁은 혜경궁의 아주 큰 비빌 언덕이지 않았을까해요 영조와는 다르게 그래도 사도 세자의 어머니로써 자리를 지켜주던 선희궁마져도 사람을 죽인 아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요?
"여러 번 아랫사람을 해쳤다 들었다.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거둔 이유가 무엇이냐?"
"마음이... 상하여 그렇습니다. 언제나 꾸중만 하시니 무섭고 그것이 화가 되어 그런 것 같사옵니다"
"음... 내 이제는 그리하지 않겠노라"
이런 대화가 오가고 아마도 혜경궁 홍씨는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지 않았을까해요 그런데 실제로 너무나도 슬프게도 사도 세자는 영조를 믿지 않았고 영조 또한 변하지 않았다고 해요 이미 너무나도 마음이 틀어져버린 것일까요? 혜경궁 홍씨는 또 다시 슬픔과 무너짐을 느꼈을 것 같아요
영조가 경모궁을 데리고 정성 왕후의 묘에 행차하셨는데 큰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영조는 경모궁을 데려와서 비가 온 것이라 화를 내시며, 경모궁을 궁으로 돌려보내셨다.
영조는 정성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후궁 정빈이씨 사이에서 효장세자를 낳아 세자로 책봉하지만 10살때 죽고말았어요 이후에 후궁 영빈이씨의 사도세자가 태어나게 된 것인데요 정성왕후가 죽기 전 사도 세자를 많이 아꼈다고 해요 후궁의 아들이 아닌 정성왕후의 의붓아들로써 어쩌면 친아버지인 영조에게보다 훨씬 사랑을 받은 사도 세자는 정성왕후가 죽고 난 후 참으로 슬퍼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정성왕후의 묘에 가는 날 갑자기 쏟아진 비에 영조는 사도 세자를 탓하며 다시 돌아가라 했으니.. 사도 세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세손이 영조와 경모궁이 계신 곳으로 뛰쳐나가 울며 고하였다.
"아비를 살려 주십시오!"
"나가거라!"
영조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경모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글도 읽고 하라시는 대로 할 테니 이리하지 마소서."
경모궁의 애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간과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했다.
"뒤주 안으로 들어가거라."
아.. 아들이 보는 앞에서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아버지가 죽게 된 상황을 혜경궁 홍씨는 어떻게 엄마의 모습으로 지킬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이미 남편인 사도 세자가 아니라 아들인 정조를 택했고 선희궁에게 가서 "어머니의 아들(사도 세자)이 아닌 저의 아들(정조)을 살려주세요" 라며 정조를 살려줄 것을 애원했어요
조선 역사 속 가장 큰 비극인 임오화변
영조는 왜 이토록 잔인하게 아들의 목숨을 거우었던 걸까요? 역사학자들은 두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추측한다고 해요
첫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밝힌 것처럼 사도 세자가 병을 앓았기 때문이에요
둘째, 권력을 쥐고 있던 노론 세력에 의해 사도 세자가 죽었다는 것이지요
사도 세자가 앓은 병은 의대증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등 주변에서 사도 세자의 흠을 잡고 트집을 만들어 끌어내리기에 충분한 구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요 노론 세력들도 그런 점을 이용해서 작은 실수나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영조와 사도 세자의 사이를 더 멀게하고 역모라는 무서운 죄를 뒤집어 씌울수 있었던 거겠죠
하지만 영조가 그렇게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다고 해요 자식을 편애하고 사도 세자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 말고도 탕평책을 도입한 어진 임금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으니말이예요
영조는 좋아하는 화평 옹주와 화완 옹주에게는 사랑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도 세자와 화협 옹주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은 뒤에는 물로 귀를 씻고 화협옹주가 머무는 집으로 물을 버릴 정도였다고 해요 임금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탕평책을 도입하고 백성들이 내야할 세금을 줄여주며 서얼들이 벼슬에 나설수있게 법을 바꾸는 등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한중록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집안을 살리기 위한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눈에 영조의 모습은 어쩌면 사도 세자의 모습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숙종은 왕비와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고 장희빈과 사이에서 경종을 낳고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영조를 낳았어요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고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으면 엄마를 죽인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노론은 경종 대신 영조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원했어요
노론은 영조를 왕위에 앉혔지만 영조는 고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도입하는 등 붕당 간 권력 싸움을 없애려고 했어요 자신을 반대했던 소론도 내치지 않았지만 그 싸움은 줄어들지 않았지요
한중록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궁중 문학으로 손꼽히는데 허구가 아닌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쉽게 알수 없는 궁중문화와 생활모습이 담겨 있어 역사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해요 하지만 한중록의 경우는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영조의 두번째 황후) 집안과 예로부터 사이가 좋지 않고 탄압을 받게 되자 순조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록을 남긴 것이라고 해요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다보니 "사실" 만을 쓴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나올수 밖에 없긴 한 것 같아요
정조는 사도 세자의 사건을 바로 잡고 억울한 오해를 풀기위해서 노력했고 왕에 즉위할때도 당당하게 본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왕에 즉위되면서 다른 신하들이 죄인의 아들이라며 문제 삼고 정조를 휘두를 수도 있었는데도 정조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나봐요
정조는 사도 세자의 아들이었지만 귀주에 갖힌 아버지를 보내고 난 후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비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그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효장 세자의 양자가 되었어요 어쩌면 영조의 배려가 정조와 혜경궁 홍씨를 살리긴 했으나 그것이 제대로 된 도움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는 정조를 살리고 본인이 목숨을 부지하여 많은 나이에 한중록까지 쓰게 해주었으니 감사할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로써 사도 세자를 포기하고 자식을 택했을 그때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정해진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