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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이런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거기에는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특별한 것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초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릴케Rainer Maria Rilke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 이 사실성은 또한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의미 기대에 맞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이다.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이 점을 인정하라고 걍요한다. '거기에는 너를 보지 않는 지점이 전혀 없다. 너는 네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다. 모든 예술적 경험이 그런 특수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타격 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린다. 매끄러움은 전혀 다른 것을 의도한다. 그것은 다정스레 관찰자에게 밀착하여 그로 하여금 좋아요라고 말하게 한다. 그것은 오로지 관찰자에게 만족을 주고자 할 뿐, 타격을 가하여 그를 쓰러뜨릴 생각이 없다.
17~18쪽
니체는 최초의 예술이 축제의 예술이었다고 보았다. 예술작품들은 흘러 지나가는 일상적인 시간이 사라지는, 한 문화의 황홀한 순간들이 물질화된 증언들이다. (…) 예술작품들은 일상적인 시간이 효력을 상실하는 드높은 시간Hochzeit의, 고양된 시간Hoch-zeit의 기념비들이다. 고양된 시간으로서 축제의 시간은 평범한 노동시간이었을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킨다. 영원성의 강휘가 여기에 깃들어 있다. "축제의 거리"가 "고통의 거리"로 대체되면, 드높은 시간은 "짤막한 도취"에 빠져드는 "한순간"으로 추락한다.
(…)
오늘날에는 전면화된 노동시간에 밀려 고양된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휴식시간마저 노동시간에 묶여 있다. 휴식시간은 노동시간의 짤막한 중단에 불과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회복한 후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노동 과정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휴식시간은 노동시간의 타자가 아니다. 그래서 시간의 질을 고양시켜주지 않는다.
(…)
걷는다는 것은 축제의 특별한 시간성을 보여준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걷는 자가 향하는 목표의 표상을 확실하게 제거한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어디에 도착하기 위해 우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축제를 걸음으로써 축제는 언제나, 줄곧 거기에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도 서로 교체되는 순간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 잉것이 축제의 시간성이다." 축제에서는 다른 시간이 지배한다. 흘러 지나가는 덧없는 순간들의 순차성으로서의 시간이 제거된다. 그것을 향해 걸어가야 할 목표가 없다. 어떤 것을 향해 걸어갈 때, 시간은 흘러 지나간다.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한다.
101~103쪽
현재는 기억에 의해 만져지고, 활성화되고, 나아가 수태된다.
(…)
미는 이야기한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다.
(…)
"〔……〕작가가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취하고, 그것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내고〔……〕그것들을 아름다운 양식의 불가결한 고리 속에 담아내는 순간 비로소 진리가 시작된다. 심지어 작가가 삶이 그렇게 하듯 두 가지 감각에 공통적인 성질을 지시할 때,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과 하나의 은유 속에 결합하고, 그것들을 단어 결합의 말할 수 없이 효과적인 끈으로 연결함으로써 그것들의 정수를 처음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진리가 시작된다."
(…)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다. 은유는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한다.
108~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