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살아있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남기 완벽 공략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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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연말에 뭔가 재밌고 기발한 책이 없을까 온라인 서점가를 배회하다 발견한 책. ‘가이드라는 제목에서 예측해 볼 수 있듯이 책은 철저히 살아남기위한 매뉴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형식 상 매뉴얼의 프레임을 고수하면서, 내용 면에서 충실할 뿐만 아니라 행간에서 드러나는 위트가 뛰어나다는 것. 조용한 곳에서 이 책을 읽다간 키득 거리다 민폐가 될 수 있다.

 

평생 좀비 판타지에 몰두한 저자의 상상계를 따라가 보면,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을 갖게 된다. 좀비가 출몰하는 세상에서는 각종 무기 및 전투 기술, 방어·피난·공격 요령 등 기존의 생존 기술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수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무릇 모든 지침서의 앞장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이 책에서도 제시되어 있다. 좀비에 대한 미신과 진실’. 사람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고 오류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심하라, 당신은 유일한 정부이자 유일한 경찰이며, 그 일대의 유일한 군대이기도 하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눈앞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무엇을 발견하든, 어떠한 도전에 직면하든,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 p.264

 

맥스 브룩스가 한 평생 골몰한 좀비 판타지의 결과물인 이 책의 지극히 현실적인 화법은 판타지 내용과 틈새를 만들어내고, 저자는 그 틈새를 블랙 유머로 채운다. 뱀파이어, 좀비 서사가 각종 이야기의 주류로 등극한 지금, 그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종말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에 암시적으로 잠깐 등장했던 지하의 좀비 인간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목적지도 모른 채, 세포 하나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매뉴얼.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 때문일까. 종말론적 판타지를 현실계로 끌어내린 이 텍스트는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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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364일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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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머리 아름답고 부유하고 인기 많은 열일곱 소녀가 자기 생일에 자신의 시체를 발견한다. 기억을 잃은 채, 1년 전에 죽은 동급생 남학생과 함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시공간 여행을 시작한다. 원제(Between)를 왜 [열일곱, 364]로 정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제목에 ‘17라는 나이가 들어간 건 꽤 적절한 것이었지 싶다. 추리, 로맨스, 청소년물의 요소가 적절히 버무려진 서사가 마치 한편의 미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아마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10대를 소재로 한 내러티브의 핵심 정서 중 하나가 공포지만, 그 정서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듯. 미국의 경우, 성적이나 성적을 둘러싼 학교, 가족 관계에서의 갈등 보다는 계급적 문제가 더 큰 것 같다. 10대를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쉐 중 하나인 미국 고등학교의 식당 풍경. 부유한 아이들끼리 무리지어 앉아, 전체 분위기를 압도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 헤게모니의 자장 안에서 최대한 자신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한다. 이너 써클의 무리와 주변 집단 간의 경계선, 계급 질서를 확인시켜주는 사소한 해프닝 중 하나, 왕따를 당하는 아이 중 하나를 골라 못 살게 구는 애가 있고, 그 누구도 그런 시비에 개입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학교 안의 계급 질서에서도, 여성성의 위계 안에서도 핵심 지위에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비극의 요소가 된다.

 

재밌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첫 장면에서, 호기심이 마구 솟아올라 주인공이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 적극 동일시하며 읽게 된다. 속도감도 좋고, 달달한 부분도 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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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aella20 2014-03-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의 해외판?ㅎ

micaella20 2014-03-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 보고 싶다ㅎ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9
김류미 지음 / 텍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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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를 읽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를 읽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어떤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현실을 이해해야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제도권 안에서 안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건 지금 의식 있는 윗세대가 젊은이들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 책임감 등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핵심적 요소가 사람들의 정서(affect)일진대, 미안함, 죄의식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일찍이 바락 오바마가 미국의 핵심 정치인이 될 것을 예견한 바 있다. “어쩌면 그는 죄의식에 호소하길 그만두고 매력을 행사해야함을 이해한 최초의 흑인이 아닐까? 투쟁하는 흑인에서 안심시키고 결집시키는 흑인으로의 변화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짚었던 그의 통찰력은 정확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매력’이라고 표현한 바락 오바마의 힘은 정치적 동력의 자원으로서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정서를 촉발하고 가동시키고 집결해내는 능력이다.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책임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지금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이 시리즈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88만원 세대」 이후로 출판 시장을 중심으로 청년 담론은 세대론, 당사자 운동론, 자기계발 담론으로 이동하면서, 애초에 제기된 문제의식이 실종되었다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다. 생애사(life history) 혹은 셀프 저널(self journal)은 정치적 아젠다에 대한 논쟁을 잠시 유보한 채, 그 사람의 삶 자체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근본적으로 확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매우 정치적인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물질적인 부족보다 문화적인 풍요에 대한 부러움이 극심했던 여자아이. 그 아이는 책이, 가장 숭고하다고 착각할 만큼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책’은 중산층으로 인증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p.179


이 책은 만인보 시리즈 중에서 제일 먼저 집어든 책이다. “판잣집”과 “강남 소녀”라는 단어의 낯선 조합이 일으키는 호기심도 컸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금, 부자 동네 한복판에서 출발해 온갖 알바를 거쳐 출판인이 되기까지 이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강남에서 가난한 서민 부모를 둔 아이로 자란 저자는 “모든 콤플렉스의 원인은 문화자본”이었다고 말한다. 즉 가난한 집 아이가 있는 집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박탈감은 단지 물질적인 결핍의 차원이 아닌 ‘취향’의 문제, 즉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혜택으로부터의 단절감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신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함께 고민해 줄 ‘어른’의 존재 결핍도 포함된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을 형성한 핵심 멘탈리티를 ‘책과 조우’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잘 보여준다.

돈을 직접 건네기보다 카운터에 놓는 손들은 묘하게 불쾌했다. 동전이 많은 경우에는 그걸 주워 담는 게 생각보다 손이 간다. p.80



강남에서 나고 자란 이 84년생 여성의 자서전 중 상당 부분은 온갖 알바를 하면서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것을 기록한 노동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손님이 무심결에 한 행동이 서비스 노동자에게 상처가 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점,  혹시 나의 행동 중에 그런 면이 없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저자가 거친 수많은 알바 일들은 거의 전부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 노동이었다. 서비스 알바 노동자의 관점에서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그려내는 것 자체가 낯설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겐 좋은 지적 자극이 된다.

A양(24세): 알바를 하느라 연애하기 빠듯한 20대 여대생. “데이트를 하는 순간에도 지금 쓰는 돈과 지금 벌 수 있는 돈의 시급이 머릿속에 계산된다”라고 말한다. p.146


또한 알바 ‘최저시급’의 관점에서 젊은이들의 연애, 친교를 설명하는 부분도 좋았다.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소점포 업주들을 쪼고, 업주들은 어쩔 수 없이 ‘알바들을 갈구게 되는’ 시스템에서 형성된 청년 알바 시장에서, 젊은이들의 삶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스템이 이들의 인간관계, 문화적 상상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학자금 대출로 신용불량자가 된 사례나, 노숙하는 청년이나 노가다나 유흥업소 종사자의 번호를 따고 싶어했다. p.149


저자는 언론 매체가 보여주는 20대에 대한 극단적 시선들을 경계한다. 뭐든 극단적이고 처절해야 그림이 되고 기삿거리가 되는 게 지금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청년 담론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준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적이지만, ‘불쌍함’을 느끼는 사람과 그 감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 사이의 인격적 거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능성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확장해 보고자 했다. 재미도 있었고, 평소에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앞으로 조금씩 짬을 내어 만인보 시리즈를 하나씩 읽어볼 생각이다.

사족1. 읽으면서 80-90년대 많이 읽혔던 또문 시리즈(또 하나의 문화)가 연상됐다. 무려 20년의 시간 차이가 나건만 이 책에서 일종의 데쟈뷰를 경험한 것.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의 현재 시점의 자아가 신촌이라는 문화적 공간에서 바라본 강남 판잣집 소녀의 일대기라고 보아도 될 듯.

사족2.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에서 간혹 적응이 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도 있었고,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앞뒤 맥락없이 건너뛰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이는 트위터나 블로그를 통한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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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문인기행 - 글로써 벗을 모으다
이문구 지음 / 에르디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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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문구의 글맛을 본 지 오래된 터인지라, 내심 기대하고 읽었으나 수필이라 그런지 의외로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와 같은 감흥은 별로 없었다. 벗들에 대한 단상들도 약간 산만하게 읽혔다. 저자로서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쓴다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이 책을 통해 바뀐 부분도 있고, 당대의 문인들의 삶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동시대의 여성 문인들의 삶, 교류 등에 대해 궁금해졌다. 남성 스승, 동료 남성 작가들, 그리고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가 어떠했을까. 남성-중심적인 문단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작가 개개인이 겪는 삶의 결들이 짐작은 해 볼 수 있겠으나, 그 구체적 실제는 어떠했을지 들여다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이문구의 글은 어휘 면에서 매우 도전적이다. 거의 한 페이지 한 단어씩 모르는 우리말 단어가 나온다. 삶의 결을 직접 만져보는 것 같은 감촉을 주는 그의 문장을 접하면,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 이제 이런 어휘력과 문장 감각을 가진 작가들이 점점 줄어들 것 같아서다. 그건 우리 세대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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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
20민중생활사연구단 지음 / 눈빛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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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에서 펴낸 한국민중구술열전(총46권) 별책(47번째 책). 1920년대~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구술사 시리즈에서 이 책은 구술자가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 듯. 

“저는 조선인 아이들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습니다”

구술자 스기야마 토미(여성, 89세)는 1921년에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대구에서 교사를 지내다가 일본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일본의 패망 후 부모님의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해 살면서 그녀는 조선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세대 일본인들의 공통적 정서 중 하나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향수일 터.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1936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당시 친구들끼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창씨 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고 한다. 언젠가 아버지는 내게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학교에서 어쩌다 실수로 조선말을 하면 담임이었던 일본인 여선생님이 크게 혼내는 대신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고 했다. 1945년까지 대구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기야마 토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내 아버지의 유년기와 구술자의 삶이 오버랩되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구술자는 젊은 시절의 기억이나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다. 반면, 조선은 당연히 일본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던 사람이 일본의 패망 후 어떤 계기로 조선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간단한 에피소드로만 다뤄져 있다. 그것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식민지 시절 경북 지역에서 교편을 잡은 구술자의 삶을 통해 내 아버지의 유년기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구술사 혹은 자서전 장르가 주는 재미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건 서사에서 땅의 기운, 사람들의 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구술자는 24살까지 자신을 키워준 조선의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89살의 그녀가 자신이 죽으면 제 영혼은 꼭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매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던 아버지처럼. 자신을 꼭 고향의 산에 묻어달라던 아버지의 유언, 생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졌던 내 아버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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