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9
김류미 지음 / 텍스트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를 읽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를 읽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어떤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현실을 이해해야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제도권 안에서 안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건 지금 의식 있는 윗세대가 젊은이들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 책임감 등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핵심적 요소가 사람들의 정서(affect)일진대, 미안함, 죄의식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일찍이 바락 오바마가 미국의 핵심 정치인이 될 것을 예견한 바 있다. “어쩌면 그는 죄의식에 호소하길 그만두고 매력을 행사해야함을 이해한 최초의 흑인이 아닐까? 투쟁하는 흑인에서 안심시키고 결집시키는 흑인으로의 변화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짚었던 그의 통찰력은 정확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매력’이라고 표현한 바락 오바마의 힘은 정치적 동력의 자원으로서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정서를 촉발하고 가동시키고 집결해내는 능력이다.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책임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지금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이 시리즈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88만원 세대」 이후로 출판 시장을 중심으로 청년 담론은 세대론, 당사자 운동론, 자기계발 담론으로 이동하면서, 애초에 제기된 문제의식이 실종되었다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다. 생애사(life history) 혹은 셀프 저널(self journal)은 정치적 아젠다에 대한 논쟁을 잠시 유보한 채, 그 사람의 삶 자체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근본적으로 확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매우 정치적인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물질적인 부족보다 문화적인 풍요에 대한 부러움이 극심했던 여자아이. 그 아이는 책이, 가장 숭고하다고 착각할 만큼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책’은 중산층으로 인증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p.179


이 책은 만인보 시리즈 중에서 제일 먼저 집어든 책이다. “판잣집”과 “강남 소녀”라는 단어의 낯선 조합이 일으키는 호기심도 컸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금, 부자 동네 한복판에서 출발해 온갖 알바를 거쳐 출판인이 되기까지 이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강남에서 가난한 서민 부모를 둔 아이로 자란 저자는 “모든 콤플렉스의 원인은 문화자본”이었다고 말한다. 즉 가난한 집 아이가 있는 집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박탈감은 단지 물질적인 결핍의 차원이 아닌 ‘취향’의 문제, 즉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혜택으로부터의 단절감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신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함께 고민해 줄 ‘어른’의 존재 결핍도 포함된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을 형성한 핵심 멘탈리티를 ‘책과 조우’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잘 보여준다.

돈을 직접 건네기보다 카운터에 놓는 손들은 묘하게 불쾌했다. 동전이 많은 경우에는 그걸 주워 담는 게 생각보다 손이 간다. p.80



강남에서 나고 자란 이 84년생 여성의 자서전 중 상당 부분은 온갖 알바를 하면서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것을 기록한 노동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손님이 무심결에 한 행동이 서비스 노동자에게 상처가 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점,  혹시 나의 행동 중에 그런 면이 없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저자가 거친 수많은 알바 일들은 거의 전부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 노동이었다. 서비스 알바 노동자의 관점에서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그려내는 것 자체가 낯설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겐 좋은 지적 자극이 된다.

A양(24세): 알바를 하느라 연애하기 빠듯한 20대 여대생. “데이트를 하는 순간에도 지금 쓰는 돈과 지금 벌 수 있는 돈의 시급이 머릿속에 계산된다”라고 말한다. p.146


또한 알바 ‘최저시급’의 관점에서 젊은이들의 연애, 친교를 설명하는 부분도 좋았다.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소점포 업주들을 쪼고, 업주들은 어쩔 수 없이 ‘알바들을 갈구게 되는’ 시스템에서 형성된 청년 알바 시장에서, 젊은이들의 삶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스템이 이들의 인간관계, 문화적 상상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학자금 대출로 신용불량자가 된 사례나, 노숙하는 청년이나 노가다나 유흥업소 종사자의 번호를 따고 싶어했다. p.149


저자는 언론 매체가 보여주는 20대에 대한 극단적 시선들을 경계한다. 뭐든 극단적이고 처절해야 그림이 되고 기삿거리가 되는 게 지금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청년 담론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준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적이지만, ‘불쌍함’을 느끼는 사람과 그 감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 사이의 인격적 거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능성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확장해 보고자 했다. 재미도 있었고, 평소에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앞으로 조금씩 짬을 내어 만인보 시리즈를 하나씩 읽어볼 생각이다.

사족1. 읽으면서 80-90년대 많이 읽혔던 또문 시리즈(또 하나의 문화)가 연상됐다. 무려 20년의 시간 차이가 나건만 이 책에서 일종의 데쟈뷰를 경험한 것.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의 현재 시점의 자아가 신촌이라는 문화적 공간에서 바라본 강남 판잣집 소녀의 일대기라고 보아도 될 듯.

사족2.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에서 간혹 적응이 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도 있었고,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앞뒤 맥락없이 건너뛰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이는 트위터나 블로그를 통한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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