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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양장)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1
라프카디오 헌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요즘 사회과학서적만 편식하다보니, '전설의 고향'류의 서사가 읽고 싶어졌다. 한쪽 장르만 편식하다보니 내적 균형이 깨지는 느낌, 뭔가 건조해지고 황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나 보다. 요괴나 귀신 등 초자연적 존재들, 여우, 너구리, 벚나무 등 자연에 속한 것들, 그리고 인간 간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던 시절의 서사들을 찾게 된다. 초자연, 자연, 인간 간의 연속성에 대한 문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잊고 살았던 존재의 근원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자 라프카디오 헌은 1850년 그리스인 어머니와 아일랜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그리스이고, 청년기를 보낸 곳은 아일랜드, 그리고 국적은 영국이었다. 유년기에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 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청소년기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사고로 한쪽 눈마저 잃었다고 한다. 19세에 혈혈단신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나, 극빈자 생활을 면치 못하다가 어렵사리 신문사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고, 30세(1890년)에 일본에 갔다가 일본에 완전히 매료되어, 사무라이 집안의 딸과 결혼해 아예 눌러살게 되었고, 도쿄 대학, 와세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잔뜩 기대를 하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 좀 실망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 이 텍스트가 흥미있었던 것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저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파란눈의 외국인이 어떤 경위로 일본의 근대화가 본격화되던 그 무렵에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인으로 귀화하게 되었고, 그가 왜 일본의 구전 설화에 그토록 매료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상상을 해 보게 된다. 책의 뒷부분에 실려있는 작가의 생애를 읽어보니 어린 시절의 외로움, 거듭된 불행, 혼종적 존재로 태어났으나 부모 어느 한쪽의 국적에 속하지 아니하고 식민지배국이었던 영국국적으로 살아가면서 느꼈을 태생적 불안감, 결국 영국, 아일랜드, 그리스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하게 된 심경 등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태생이 열등한 백인이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함께 등장한 '인종' 개념, 백인과 비백인의 이분법은 백인 내부에서도 등급화 담론으로 작용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인들은 '백인 축에 끼지 못하는 존재'로 폄하되곤 했다. 그의 인생 전반기를 디아스포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상황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어쨌든 라프카디오 헌은 '사람도 집도, 모든 것이 요정같은 나라' 일본의 모든 것을 깊이 사랑했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상상컨데, 집 없는 존재, 장소 없는 존재,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그가 특히 일본의 괴담을 포함한 구전 설화에 매료된 것은 아마도 그 설화가 자연과 초자연, 그리고 인간의 연속성 혹은 연결성,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일본 영화, 소설, 만화 등을 상당히 많이 접해 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에피소드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귀없는 호이치], [설녀] 등은 일본의 구전 괴담 설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서구 비평가들로부터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1964년 영화 <괴담(카이단)>에서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정말 무시 무시했음). 반면, 오히려 이 책에서 [귀없는 호이치], [설녀]를 읽으면 '공포' 보다는 슬픔, 사랑, 집착, 미련 등의 섬세한 정서의 결이 읽힌다. (훨씬 정감있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것이 시각적 매체가 아닌 활자 매체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사족. 이 정도 내용이라면 하드 커버로 만들지 말고, 소프트 커버로 냈으면 한다. 부담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워낙 50%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긴 하지만, 겉표지 종이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