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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재발견 -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ㅣ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이 책은 한국의 20대 대부분이 처해 있는 잔혹한 현실인 ‘88만원 세대’에서 예외적인 존재들, 즉 ‘승자독식’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 공직 유관기관 등 젊은이들의 희망 직종 진입에 성공한 5%의 승자들이 만나게 될 ‘조직’의 쓴맛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의 한국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조직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1장은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들로서 기업에 대해 조직론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경제학 이론들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 이론들은 생경하고 복잡해서 경제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단번에 이해하기엔 상당히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1장을 읽고 나서도 이 이론과 현실을 접목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어려운 경제 이론들이 장황하게 설명된 1장을 견디고 나면, 2장 “돈 장사와 사람 장사”, 3장 “위기의 한국 조직들”은 상대적으로 술술 읽힌다. 이 책에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서 더 활용가능한 것은 1장에서 제시한 경제학의 조직 이론들이 아니라 대중적 글쓰기로 전환되어 있는 2장과 3장에서 저자가 취한 ‘이름붙이기’이다.
대중의 현실 포착력, 이것을 위해 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전략은 ‘이름붙이기’이다. 사회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는 달리 저자가 한국의 경제 현실을 설명할 때 붙인 ‘이름들’은 분석력 보다는 환유적 상징력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훨씬 더 빨리, 쉽게 현실을 포착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조직론’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기업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극복해내야 할 키워드로 제시한, ‘캐비아’ 자본주의, ‘귀공자’ 자본주의, ‘마초’ 자본주의, (토호들의) ‘짝패’ 자본주의, ‘조폭’ 자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는 책의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저자가 붙인 ‘딱지들’은 특정 현상에 대한 패러디나 도덕적 비판, 저자의 입장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러한 명명 전략은 매우 쉽게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준다. 우석훈 특유의 ‘명랑한 글쓰기’는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게 무거운 현실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만들어낸 지도 속으로 들어나 그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글을 읽어가다 보면, 때로는 웃음과 통쾌함을, 때로는 씁슬한 자조감을 느끼면서 공감하게 된다. ‘이름붙이기’가 가능케 하는 통쾌함,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감각은 한편으로 함정을 내포한다. 통쾌함은 현실을 이해했다는 자신감 (자족감) 혹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이상의 사유의 진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명명 전략이 너무 남용되면서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거나 쟁점화되어야 하는 지점들이 간과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다안성’(다양성과 안정성의 합성어)은 저자가 “국민경제의 다양한 구성요소들과 협동진화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가 지금 한국 기업들에게 던져진 절체절명의 과제 된 시대”라고 진단하면서 그 비젼으로 제시한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는 기업의 '頂上性'이 아니라 '正常性'의 획득(최소한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지켜지는 정상 기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즉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자본주의를 위해서는 기업의 정상성, 나아가 이 사회의 정상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정상성의 구축을 위해 저자는 이성(로고스)의 힘에 기대고 있다. 한국 사회가 건강한 자본축적이 가능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조직을 구성하는 인간들 간의 공정하고 인간적인 게임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로고스의 언어 만으로 가능할 것인가?
'영속성', '신뢰'. 책을 덮고 나서 내게 의문으로 남은 것은 바로 이 두개의 단어였다. 결국 저자의 말처럼, ‘조직론’의 핵심은 조직의 근간이 다름 아닌 인격과 감정을 가진 사람, 즉 정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기업과 사회의 영속성은 그 사람들의 다양성과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면, 과연 이때 영속되어야할 가치는 무엇이며, 신뢰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국가도, 동료도, 가족도,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기본은 이 신뢰의 문제에 있다. 결국 '인간다운 자본주의'에 대한 해답은 경제가 아니라 '사회' 속에 있으며, 한국 조직 위기론에 대한 해답 역시 경제학 이론 보다는 좀 더 인문학적인 사유 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정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필요한 ‘영속성’, ‘신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 질문과 해답에 대한 사유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사족. 340페이지 분량을 읽어내려면 상당한 끈기가 필요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 수준에서 절절하게 혹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던 상념과 깨달음들을 기민하고 재치있게 포착해서 언어화하는 것. 이게 저자의 능력이자 전략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저자는 대중들이 현실을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사유 능력을 제공하거나 자극하는 것을 지식인의 임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한데, 그래서 대중적 글쓰기와 아카데미아의 그것을 어떻게 접합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