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미덕은 절반 이상이 기획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브레이크 없이 치닫고 있을 때, 이 나라의 정치경제,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비정규직 문제, 사회양극화 현상 등이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재분배 문제나 통계적 지표로 확인될 수 있는 경제 성장에 쏠려 있을 때, 미디어 담론과 아카데미 담론 어디에서도 조명 받지 못했던 10대와 20대의 상황을 가시화하고 정치화했다.

‘세대 내 경쟁’과 ‘세대 간 경쟁’이라는 다소 생경한 언표는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섬뜩하고 참담한 현실로 다가온다. 내가 이 책의 ‘기획’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기획 서적’이라는 폄하적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 사회의 ‘상식’의 경계 안에서 포착되지 않는 영역, 즉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영역. 지식인의 임무는 바로 그 사회의 상식의 경계를 확장하거나 그 지평을 바꾸어 내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변화되거나 가시화되지 않은 영역을 포착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 10대와 20대의 운명’에 대한 저자들의 이야기는 사유의 흐름을 바꾸는 지식을 했다는 점에서 그 지식 생산의 기획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 책은 10대의 동거권, 지체되는 결혼 연령, 얼핏 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로만 비춰지는 의제들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해석하면서, 나아가 이것이 한국사회의 정치경제학적 현재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임을 주장한다. 문제의 출발점은 한국의 10대와 20대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특수성은 ‘세대 문제’와 관련된 다른 나라들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복잡한 지도 속에서 다층적으로 접근된다. 어찌보면 이 책은 한국의 10대와 20대가 놓인 처절한 현실에 대해 기술적 측면에서 언어화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는 좀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문제를 가시화하고 직면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공동 저자 박권일은 에필로그에서,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 릴라당의 『희망고문』의 구절을 인용하여, 가장 잔인한 고문 중 하나인 ‘희망 고문’에 대해 언급한다. 즉 “희망을 슬쩍 보여줬다가 그걸 움켜쥐려는 찰나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10대와 20대가 질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 게임에 내몰린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오직 1사람에게만 주어진 승리를 향해 모든 사람들이 달리고 있는 ‘희망의 과잉 상태’라기 보다는, 그 게임 자체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달리는 상태가 아닐까 싶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생존을 위해, 이기냐 지느냐 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달리는 이 게임, 책을 덮고 나서 희망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분야에 있는 저자가 만나 서로의 사유를 자극하고 확장하고 고민한 흔적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학부생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고 싶은 책이다.

사족. 저자는 '저공비행'으로 일관된 학점을 받고 겨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골라가며' 취직할 수 있었던 시절(1980년대 후반)이 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캠퍼스의 풍경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386인 내가 목격하고, 직접 겪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 당시에도 SKY대학, 아니 적어도 in seoul의 대학 출신이 아니었으면, 직장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는 처지는 결코 아니었고, sky대학이라고 할지라도 주민번도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러했다. 학과별로 배당되었던 (당시 선망 직종 1순위였던) 대기업과 은행의 추천서를 받을 수 있는 번호표는 여학생들에겐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부조리한 처사에 대해 아무도 끽 소리조차 할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나는 부잣집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라, 공부도 잘하고 실패나 좌절 한번 겪어보지 못한 동료들이 취업을 시도하면서 생애 최초로 좌절을 경험하고 무너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취업을 앞둔 4학년 여학생들은 거듭되는 집단적인 무력감과 좌절감 속에서 자아 감각에 대한 질적 변화를 치러내고 있었다. 젠더라는 개념을 적용해 본다면, 저자가 그려 보이는 한국의 세대들에 관한 그림은 좀더 복잡해져야할 듯 싶다. 저자의 분석이 통찰력이 있긴 하지만, 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다지 동질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간과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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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ulemono 2008-10-2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의 내용이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