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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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표지를 넘기면 일본 에도 시대 요괴그림집에서 발췌한 <우부메> 그림이 나온다.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아기를 안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고 있는 젊은 여자의 그림이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 겁에 질려 있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눈은 아래를 향해있지만 초점이 없다. 기괴하고 음산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게 슬픈 기운을 가득 담은 이 그림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책을 끝까지 읽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 말에 사서 읽기 시작했으나, 주인공 세키구치와 그의 친구인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 간의 지루한 대화가 좀 길다 싶을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했기 때문.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우유부단하고 어딘가 음울한 것이 어쩐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인 문학청년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주인공 세키구치.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민속학, 괴담, 전설 등에 일가견이 있는 고서점 주인인 교고쿠도. 고지식하고 순진한 세키구치와 괴팍하지만 요괴 괴담, 기담, 주술에 대한 전문 지식과 어울리지 않는 합리적 지성의 소유자인 교고쿠도가 주고받는 지루한 대화는 초반 1/3을 차지한다.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은 점점 가속화되면서 후반부가 되면 읽는 사람이 숨이 찰 만큼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비밀들, 얽히고 섥혀 잔뜩 꼬여 버린 실타래가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풀려버린다. 마치 잔뜩 집어삼킨 무언가를 한꺼번에 토해내듯이. 아마도 전반부의 지루한 대화는 후반부의 누적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초석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전반부의 복선들은 후반부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맞물려 있으니 말이다.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 봉인된 과거의 기억과 그로 인해 현재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비밀스럽고도 불안한 압력들,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 내러티브의 전개. 일본 소설,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들이다. 늘 그러하듯이 이 소설 역시 현재 시점에서 시작되어 봉인된 과거 기억의 편린들과 미래의 시점으로 점점 진행되는 현재 시점의 사건들 간의 조각 맞추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때는 1950년대 도쿄, 주인공인 소설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유서깊은 산부인과 가문의 한 남자가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임신 중이던 그의 부인은 그 후로 20개월째 출산을 하지 못하는 기이한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현재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주인공과 관련인물들의 과거, 그리고 한 집안의 역사가 되어 버린 비밀스런 내력들, 즉 개인과 집단의 과거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들의 재료가 되는데, 그 공통점은 ‘봉인된 기억’이라는 점이다. 즉 몸은 기억하고 있으되 의식의 수준에서는 밀폐된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압력은 현재라는 무대 위의 관련 인물들을 앞으로 닥칠 불행한 사건들로 초대한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사라지는 신생아들, 되풀이되는 비극을 은폐하고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자하는 집요한 욕망, 그리고 ‘전통’의 이름으로 증폭되어 되물림되는 또 다른 비극. 이 소설은 분명 한 가문의 비극적 역사와 등장인물들의 개인사가 매개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는 점은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산부인과 가문에 감춰져 있는 과거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주인공 세키구치 역시 그와 관련된 자신의 봉인된 기억과 대면하게 된다. 산부인과 가문의 과거에 오버랩되는 그의 과거에 살짝 노출되는 것이 전쟁터에서의 경험이다. 일본에서 1950년대는 전후 민주주의와 제2근대화로 ‘새로운 일본의 건설’이 그야말로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던 시점이다. 일본의 역사에서 ‘전후’라는 단어는 일본인에게 매우 복잡한 감정을 유발하는 듯하다.  

어쨌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밀실 공포, 과거의 봉인된 기억, 그리고 그와 연루된 현재 진행형의 비극적 사건들이라는 모티브는 전후 일본의 근대화 물결에 의해 봉인된 ‘전쟁의 기억’들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봉인된 집단적 기억들. 마치 미국인들에게는 인디언 선주민(先住民)에 대한 대량학살로 시작된 미국 역사에 대한 의식화되지 않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봉인된 집단적 죄의식이 있고,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샤이닝>은 미국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죄의식을 원료로 한 공포영화라는 ‘설’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일본이 훌륭한 추리소설, 공포소설 작가들을 배출하게 된 데에는 이와 유사한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쨌거나 분명 현재 일본은 학계이건, 문학계이건,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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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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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945405493000735497

"내가 나르마다 프로젝트의 재앙에 대한 글 <더 큰 공공선>을 쓸 때, 무엇보다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주어진 통계가 아니라 당연히 있어야 할 통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정부는 댐 건설로 쫒겨나야 했던 사람들의 수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가장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인도 국가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인도의 지식인 공동체도 용서받을 수 없다" -<9월이여, 오라> p11.

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번에는 이라크를 상대로) 사람들의 슬픔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세재와 조깅화를 파는 기업들이 후원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를 위해 슬픔을 포장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을 싸구려로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으 슬픔의 상품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도 가차없이 약탈하는 야만주의입니다." <9월이여, 오라> p69.

<작은 것들의 신>과 <9월이여, 오라>. 10년 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었을 때의 단상을 떠올려 보면, 다소 선동적이고 분노에 찬 듯한 어조로 쓰여진 <9월이여, 오라>는 아룬다티 로이에게 있어서는 '이유있는 변신'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작은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작은 세계'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태도...이것이 아룬다티 로이가 가진 저항적 힘의 원동력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그러한 힘에서 나오는 필력으로 인종주의,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본다. 놀라운 것은 단.지. '소설가'로만 알려진 이 사람이 이러한 질서에 기반하여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확한 정보와 명료한 분석력으로 독자들을 설득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이의 글이 그 어느 학자의 글보다 더 명료하게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건...다름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분석해 내는 로이 만의 독해과 지식 가공 능력이 다름 아닌 '작은 것들'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과 접합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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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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斜陽, 다자이 오사무

해마다
눈 먼 새끼학
잘도 크는구나
가엾어라 살진 모습 (84p.)

전쟁 전후 일본 문학과 영화들 중에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루는 내용들이 많은 듯하다. 평생 4번의 자살시도, 39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사양』이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은 모두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을 것 같다. 드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방 토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가 수많은 가난한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는 자각과 거기에서 비롯된 태생적 죄의식,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거칠고 정직한 평민들의 삶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했던 다자이 오사무. 이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심리적 경계지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순을 예민하게 자각하며,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냈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인식 세계, 그런 존재들이 뿜어내는 묘한 매력,...이 소설에 나오는 4명의 인물들은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인칭 화자인 가즈코, 마약중독인 남동생 나오지, ‘일본의 마지막 귀족’의 품성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나오지와 가즈코의 지인인 소설가 우에하라. ‘저무는 해’라는 뜻의 제목은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 황족 집안이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귀족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 근거 역시 상실한 가즈코의 집안은 남아있는 유산으로 근근히 버티지만 얼마되지 않는 돈은 떨어져 가고, 가즈코 역시 늙은 남자의 후처 자리나 친척 집 가정교사(겸 식모) 자리를 제안받는 등 계층 몰락의 처지에 놓여있다.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184p. 주인공의 남동생, 나오지의 유서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살한 남동생이 누나 가즈코에게 남긴 장문의 유서엔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들었던’ 그의 생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평민의 정직한 삶에 대한 동경, 귀족이라는 신분에 대한 죄의식,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서 발견한 ‘정직한 아름다움’....정직함의 미덕은 나오지가 먹고 사는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평민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흐르는 귀족의 피에서 부정할 수 없는 거부감과 애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 그래서 그는 귀족, 평민,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세상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어머니를 제외한 3명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순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양, ‘저무는 해’는 떠오르는 해를 내포하고 있다. 흔히 일본 문화엔 자살에 대한 도덕적 경계심이 희박하다는 비판이 가해지곤 하지만, 도덕적 판단에 앞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유의 방식을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일본의 마지막 귀족’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귀족 신분 간의 근본적 모순으로 괴로워하던 동생마저 자살한 후, 가즈코는 역시 죽음이 임박한 우에하라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로써 가즈코는 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가산 탕진, 그리고 사생아의 임신, 이로서 그녀는 ‘귀족적인’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녀에게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귀족의 태양은 저물어버린 것. 이제 그녀는 ‘혁명’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그 열정으로 아이를 키워내리라 결심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모든 것이 단절된 세상과 그녀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인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도덕적 가난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그녀에게 새로운 태양을 비춰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현대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오랜 만에 높은 수준의 소설을 읽으니 뿌듯하다. 영혼이 풍요로와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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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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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표지 뒷면)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 제목은 범상치 않은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제목이 풍기는 매력에 비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현상학을 끌어와서 일상적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 생활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간인 장소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은 병렬적이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수많은 저자들에 대한 인용의 연속, 그리고 아마도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루한 개념 분류 작업은 이 책이 아카데미아에서 ‘장소와 인간’ 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 선구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그 시기에, 논문으로서 구성 요건을 갖추기 위해 필요했던 인식론적 지도그리기였을 것이다. (혹은 자기 방어였을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특히 7장에서) 저자는 ‘경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조사하고 설명하려고 드는’ 합리주의, 그리고 “어디에서나 질서를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다”는 사회과학의 방법론 및 인식론을 비판한다. 합리주의에 입각한 지식 생산의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저자가 선택한 현상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지식 풍토에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주변적이었던 자신의 인식론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개념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문학자인 나의 지인은 이 책이 ‘너무 사회학적’(당연하지)이라는 평을 했지만, 최근 줄곧 ‘사회과학’ 서적만 읽어왔던 나로서는 ‘장소’와 ‘인간’ 개념에 대한 저자의 ‘인문학적’ 접근방식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장소의 기본적 의미, 장소의 본질은 위치에서 오는 것도, 장소가 수행하는 사소한 기능들에서 오는 것도,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오는 것도,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가 장소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장소를 인간 존재의 심원한 중심으로 정의하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의도성에 장소의 본질이 있다. (3장)

어쨌든,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placenes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확장시켰다는 사실 만으로 이 책은 앞부분의 지루함을 견딜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장소의 본질’ 혹은 ‘장소의 의미’는 ‘장소’, ‘장소감’, ‘장소 정체성’ 등의 단어를 통해 설명된다. ‘장소’는 단지 위치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며, 장소감은 장소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장소의 정체성은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해 구성된다. 저자는 이를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입을 빌어,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럼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무장소성의 개념은 ‘참된 장소감(혹은 장소 경험)’과 그렇지 못한 장소감의 구분에서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기 실존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인식한다”는 의미로 ‘현존재’라는 존재 양식을 설명한 바 있다. 저자는 이 ‘현존재’라는 개념을 끌어와 ‘참된 장소감’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참된 인간’이 갖는 장소에 대한 참된 태도, 즉 “장소에 대한 심오하고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장소감이란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깊이가 결여되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의 가능성만 제공하는 장소” 경험을 뜻한다. 무장소성 혹은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의 대표적인 예는 키치(‘거주를 위한 기계’가 되어버린 집, 관광), 대중문화(디즈니화, 박물관화, 미래화, 대중매체 등)이다. 이러한 저자 에드워드 렐프는 ‘무장소성’과 ‘장소’ 모두 실존적 삶의 조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저자가 문제삼는 것은 무장소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무장소성의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장소의 생활 세계 설계’의 변화를 통해서 대안을 추구할 것은 제안한다. 인용의 대가인 저자는 아마도 “장소 박탈에 대항할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키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브로워를 인용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한 듯하다. 물론 비록 저자가 무장소성을 추동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어떻게’ 대안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켜야한다는 결론에는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장소와 인간이 맺고 있는 역사성, 시간성, 깊이, 맥락성이 삭제되고 오로지 ‘경제적 가치’라는 획일적 기준에 의해 장소성(따라서 인간성)이 구획되고 표준화되는 이 시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 여기서 저자가 진정성/비진정성, 장소/무장소라는 이항대립간의 단절성과 연속선을 동시에 강조한 점, 양자 모두 존재와 실존 양식으로 똑같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비진정성이 진정성 만큼 인간 실존에 필요하고 중요하고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특징’이라고 보았지만, 현재적 시점에서 그것이 문제인 것은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하는 지배적 현상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무장소성의 지배화, 확산이 대체 ‘인간’에게 왜 문제적인 것일까? 저자는 장소 개념을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은 장소의 상실은 불가피하게 장소와 인간의 상호 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구제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의 논거를 따라가다 이렇게 주장해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 이유는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해 버림으로써 양자 간의 변증법적 결합이 어려워지고, 그러한 변증법적 긴장이 없는 공간에서 인간은 실존적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무장소성의 지배화, 그 공간에서 인간과 장소는 그저 ‘거주를 위한 기계’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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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상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 소화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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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당시에 무려 60만부가 팔렸다는 이 책은 “나는 숙명적으로 방랑자이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로 시작된다. 아무리 근대가 ‘떠돌이 인간(재미삼아 학명으로 만들어보자면 homo wanderer쯤 될까?)’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시대였다고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감히 ‘고향 없음’과 ‘방랑’을 선언하기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태생적으로 ‘고향’이 없고, 게다가 돈도 집도 없고,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라고는 ‘여자의 몸’ 밖에는 없는 어린 여자. 저자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인 이 책은 한 여성의 유년기부터 20대 중반까지의 방랑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일기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문체였다. 당시 일본에 ‘사소설’이라는 장르가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내면 깊은 곳까지 침잠하여 섬세하고도 치열한 언어를 구사한 이 책이 1920년대에 작성된 것이라는 게 놀라웠다. 요즘 이 시기의 일본 소설에 푹 빠져있는 지인의 말을 빌자면,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근대적 언어를 갖춘 소설이 이미 1900년대에 등장했다는 것.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일본에서 근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1860년대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암튼 1930년 당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어떤 재미,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가 ‘위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국민, 문화 등 ‘일본적인 것’에 관한 서사가 유신 엘리트에 의해 생산되고 유포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어쨌거나 이 책의 재미는 당대 도덕이나 규범의 문법 등 모든 것을 일체 ‘확 깨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태생적으로 안주하는 것, 주저앉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다. ‘솔직함’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 싶다. 추측컨데, 아마도 당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매력은 ‘솔직함’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행상을 시작하여, 술집 종업원, 가정부, 여공, 사환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시, 소설, 동화를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문학’이 주는 낭만적 세계에 대한 동경도, “비록 몸은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내 정신만은 고귀한 취향으로 가득하다”는 식의 자기 방어적 자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저 문학에서 그녀가 맛볼 수 있는 ‘기쁨’, 그것은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부박한 밑바닥 인생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솔직하기 그지없는 저자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 주인공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유곽에 몸을 팔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느낀다. 동거하는 남자로부터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녀는 비루한 외로움 때문에 남자와 쉽사리 헤어지지 못한다. ‘남자에게 얻어먹는 것은 진흙을 씹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자신을 저버리고 등쳐먹는 남자들 사이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관조한다. 방세는 밀려있고 당장 내일 끼니를 해결할 돈도 없을 때, ‘결혼’에 대한 제안은 유혹적이다. 이 방랑자의 일기는 그렇게 어떤 것에도 안주할 수 없는 영혼을 가진 한 사람이 그 온갖 비루한 실존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오직 문학에만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삶을 어렵게 이어가는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배고픔과 성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과 삶에 대한 열정에 그토록 솔직했던 여성, 그것은 저자 하야시 후미코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타임 머신이 있다면 1930년대로 돌아가 이 책에 매료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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