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표지 뒷면)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 제목은 범상치 않은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제목이 풍기는 매력에 비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현상학을 끌어와서 일상적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 생활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간인 장소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은 병렬적이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수많은 저자들에 대한 인용의 연속, 그리고 아마도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루한 개념 분류 작업은 이 책이 아카데미아에서 ‘장소와 인간’ 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 선구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그 시기에, 논문으로서 구성 요건을 갖추기 위해 필요했던 인식론적 지도그리기였을 것이다. (혹은 자기 방어였을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특히 7장에서) 저자는 ‘경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조사하고 설명하려고 드는’ 합리주의, 그리고 “어디에서나 질서를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다”는 사회과학의 방법론 및 인식론을 비판한다. 합리주의에 입각한 지식 생산의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저자가 선택한 현상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지식 풍토에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주변적이었던 자신의 인식론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개념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문학자인 나의 지인은 이 책이 ‘너무 사회학적’(당연하지)이라는 평을 했지만, 최근 줄곧 ‘사회과학’ 서적만 읽어왔던 나로서는 ‘장소’와 ‘인간’ 개념에 대한 저자의 ‘인문학적’ 접근방식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장소의 기본적 의미, 장소의 본질은 위치에서 오는 것도, 장소가 수행하는 사소한 기능들에서 오는 것도,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오는 것도,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가 장소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장소를 인간 존재의 심원한 중심으로 정의하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의도성에 장소의 본질이 있다. (3장)

어쨌든,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placenes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확장시켰다는 사실 만으로 이 책은 앞부분의 지루함을 견딜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장소의 본질’ 혹은 ‘장소의 의미’는 ‘장소’, ‘장소감’, ‘장소 정체성’ 등의 단어를 통해 설명된다. ‘장소’는 단지 위치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며, 장소감은 장소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장소의 정체성은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해 구성된다. 저자는 이를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입을 빌어,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럼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무장소성의 개념은 ‘참된 장소감(혹은 장소 경험)’과 그렇지 못한 장소감의 구분에서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기 실존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인식한다”는 의미로 ‘현존재’라는 존재 양식을 설명한 바 있다. 저자는 이 ‘현존재’라는 개념을 끌어와 ‘참된 장소감’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참된 인간’이 갖는 장소에 대한 참된 태도, 즉 “장소에 대한 심오하고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장소감이란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깊이가 결여되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의 가능성만 제공하는 장소” 경험을 뜻한다. 무장소성 혹은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의 대표적인 예는 키치(‘거주를 위한 기계’가 되어버린 집, 관광), 대중문화(디즈니화, 박물관화, 미래화, 대중매체 등)이다. 이러한 저자 에드워드 렐프는 ‘무장소성’과 ‘장소’ 모두 실존적 삶의 조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저자가 문제삼는 것은 무장소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무장소성의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장소의 생활 세계 설계’의 변화를 통해서 대안을 추구할 것은 제안한다. 인용의 대가인 저자는 아마도 “장소 박탈에 대항할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키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브로워를 인용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한 듯하다. 물론 비록 저자가 무장소성을 추동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어떻게’ 대안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켜야한다는 결론에는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장소와 인간이 맺고 있는 역사성, 시간성, 깊이, 맥락성이 삭제되고 오로지 ‘경제적 가치’라는 획일적 기준에 의해 장소성(따라서 인간성)이 구획되고 표준화되는 이 시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 여기서 저자가 진정성/비진정성, 장소/무장소라는 이항대립간의 단절성과 연속선을 동시에 강조한 점, 양자 모두 존재와 실존 양식으로 똑같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비진정성이 진정성 만큼 인간 실존에 필요하고 중요하고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특징’이라고 보았지만, 현재적 시점에서 그것이 문제인 것은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하는 지배적 현상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무장소성의 지배화, 확산이 대체 ‘인간’에게 왜 문제적인 것일까? 저자는 장소 개념을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은 장소의 상실은 불가피하게 장소와 인간의 상호 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구제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의 논거를 따라가다 이렇게 주장해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 이유는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해 버림으로써 양자 간의 변증법적 결합이 어려워지고, 그러한 변증법적 긴장이 없는 공간에서 인간은 실존적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무장소성의 지배화, 그 공간에서 인간과 장소는 그저 ‘거주를 위한 기계’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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