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斜陽, 다자이 오사무

해마다
눈 먼 새끼학
잘도 크는구나
가엾어라 살진 모습 (84p.)

전쟁 전후 일본 문학과 영화들 중에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루는 내용들이 많은 듯하다. 평생 4번의 자살시도, 39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사양』이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은 모두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을 것 같다. 드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방 토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가 수많은 가난한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는 자각과 거기에서 비롯된 태생적 죄의식,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거칠고 정직한 평민들의 삶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했던 다자이 오사무. 이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심리적 경계지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순을 예민하게 자각하며,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냈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인식 세계, 그런 존재들이 뿜어내는 묘한 매력,...이 소설에 나오는 4명의 인물들은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인칭 화자인 가즈코, 마약중독인 남동생 나오지, ‘일본의 마지막 귀족’의 품성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나오지와 가즈코의 지인인 소설가 우에하라. ‘저무는 해’라는 뜻의 제목은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 황족 집안이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귀족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 근거 역시 상실한 가즈코의 집안은 남아있는 유산으로 근근히 버티지만 얼마되지 않는 돈은 떨어져 가고, 가즈코 역시 늙은 남자의 후처 자리나 친척 집 가정교사(겸 식모) 자리를 제안받는 등 계층 몰락의 처지에 놓여있다.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184p. 주인공의 남동생, 나오지의 유서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살한 남동생이 누나 가즈코에게 남긴 장문의 유서엔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들었던’ 그의 생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평민의 정직한 삶에 대한 동경, 귀족이라는 신분에 대한 죄의식,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서 발견한 ‘정직한 아름다움’....정직함의 미덕은 나오지가 먹고 사는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평민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흐르는 귀족의 피에서 부정할 수 없는 거부감과 애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 그래서 그는 귀족, 평민,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세상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어머니를 제외한 3명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순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양, ‘저무는 해’는 떠오르는 해를 내포하고 있다. 흔히 일본 문화엔 자살에 대한 도덕적 경계심이 희박하다는 비판이 가해지곤 하지만, 도덕적 판단에 앞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유의 방식을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일본의 마지막 귀족’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귀족 신분 간의 근본적 모순으로 괴로워하던 동생마저 자살한 후, 가즈코는 역시 죽음이 임박한 우에하라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로써 가즈코는 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가산 탕진, 그리고 사생아의 임신, 이로서 그녀는 ‘귀족적인’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녀에게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귀족의 태양은 저물어버린 것. 이제 그녀는 ‘혁명’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그 열정으로 아이를 키워내리라 결심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모든 것이 단절된 세상과 그녀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인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도덕적 가난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그녀에게 새로운 태양을 비춰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현대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오랜 만에 높은 수준의 소설을 읽으니 뿌듯하다. 영혼이 풍요로와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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