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시선 288
김성규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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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중략)

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밝은 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게 불과 얼마 전이었구나. 오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니...대학 입학과 더불어 유년기를 보낸 서울에 다시 왔을 때, 무엇보다 놀란 건 지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현실이기도 했고, 불행의 일부가 되었다. 20대엔 지하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30대엔 겨우 지상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오랫동안 햇빛을 보기가 어려웠다.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은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지하 세계의 목격자가 되어 불행을 지켜보고 증언하는 듯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역시 불행의 목격자가 되는 건 대단한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다. 그의 시는 사산된 아이, 곰팡이, 썩어가고 있거나 죽어가고 있는 것들, 어둡고 불길한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어떤 강한 생명력이 감지된다. 그의 시들은 마치 온갖 부패물들이 쌓이고 쌓여 거름이 되고 그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자연의 이치를 연상케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어떤 강인하고도 질척거리는 어두움을 닮은 생명의 에너지를 내 안에 잔뜩 받아들인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시인은 아직도 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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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capitalist Politics (Paperback)
J. K. Gibson-Graham / Univ of Minnesota Pr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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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들자마자 좀 독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적 문헌에서는 간혹 필명을 사용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지만, 사회과학적 문헌에서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의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나만 그런가?) 암튼, 이 책의 저자 ‘J.K. 깁슨-그래엄’은 각각 호주 국립 캔버라 대학과 미국 매사츠세츠 앰허스트 대학의 페미니스트 경제 지리학자인 캐서린 깁슨과 줄리 그래엄의 공통 필명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1994년 이후 여러 차례 이 필명으로 몇몇 학술지에 글을 실은 바 있고, 이 책 [후기자본주의 정치학]은 1996년에 나온 [자본주의의 종말]의 후속물이다. 지리적으로도 저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학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공통의 성과물을 낸다는 것만으로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된 [액션 프로젝트]의 학문적 성과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도 놀라웠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역시 입장이 분명하고 ‘쌈박하게’ 주장을 제시하는 글이 마음에 든다. 논리적 자기완결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비판과 논쟁을 활발히 불러일으키는 글, 그래서 사유의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글이 생산적임은 물론 지적으로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저자들의 학문적 열정과 도전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이 책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대안과 대안적 경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현재적 국면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신 변화를 지향하는 ‘후기자본주의 정치학’이 왜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불가능성과 봉쇄의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를 그 정서와 태도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신랄하게 분석한다. 또한 이들이 지향하는 ‘가능성의 정치학’, 즉 대안적 경제를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찾아내어 그 목록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대안은 멀리 과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지구 여러 곳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을 개념적으로 구분해 보면 [포스트자본주의 정치학]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크게 경제 담론, 대안적 경제 사례 혹은 실천, 주체의 변화, 3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저자들의 논의는 1) 경제 담론을 바꾸는 것, 2) 경제적 주체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 3) 집단적 실천을 구축하는 것, 이 3가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요 논의의 핵심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경제의 (재)정치화, 경제적 다양성을 활성화하는 것, 현 단계의 자본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담론 질서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것, 2)‘부정의 정치학’이 아닌 ‘긍정의 정치학’, 즉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서 긍정적 정동(affect)을 활성화시키는 것, 3) '사회'의 윤리적 선택과 결정을 강조, '자본주의의 타자'로 간주되어 왔던 '코뮤니즘'을 재의미화하면서, ‘필요, 잉여, 소비, 공공재’ 등과 같은 맑시즘의 용어들을 재개념화하면서, '사회'를 상상하고 다시 만들어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들의 전략은 일종의 ‘경제적 풍경 다시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스페인의 ‘몬드라곤’ 사례부터 크고 작은 공동체 경제 사례들을 발굴하여, 개발 논리가 아니라 ‘상호의존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깨달음과 자각에 기반한 경제의 모습, 즉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외부’ 세계의 지도를 보여준다. 경쟁과 개발 담론이 추동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다만 경제 질서의 표면, 빙산의 일각(p70)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기실 경제라는 것, 즉 거래와 협상, 노동의 유형과 노동에 대한 보상 방식, 기업의 형태, 잉여를 생산하고 전유하고 분배하는 방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3장)을 각종 도표와 그림으로 시각화하고 목록화해서 보여준다.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자본주의 질서가 구축되기 이전에서 찾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과 마찬가지로 현재 존재하고 있으나 주류 담론 질서에 가려 가시화되지 않았거나 부정적으로 의미화된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처럼 '교환의 원칙'이 아닌 '증여의 원칙'이 살아있는 경제를 보여주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와 욕망,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책 [포스트자본주의 정치학]은 현재의 헤게모니적 담론 질서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외부를 동시대 안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외부'를 '자본주의'의 이전에서 찾고 있는 논의보다 어떤 면에서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도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보다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같은 인문학적 논의에서 더 감흥을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본주의 이후 혹은 외부의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앞서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가?”라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을 던져보는 건 중요한 것 같다.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먼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 있으므로. 4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다양성의 경제’의 현장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사례들을 취재한 다큐가 몇 개쯤 이미 나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주 노동자의 송금으로 버티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인 필리핀의 MSAI 프로그램은 돈의 일부를 모아 지역 공동의 자산으로 바꾸어 지역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낸 사례, 기업을 노동자가 소유하고 이윤 중 일부를 모아 사회복지를 제공하거나 다른 조합을 만들어낸 유명한 몬드라곤 사례,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 한 지역인 마라리큐람에서 20-40명 내외의 여성들이 저축 공동체를 만들어 극빈자를 위해 고용을 창출한 사례, 그리고 기업으로 하여금 이윤 중 일부를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에 기증하도록 함으로써 이윤이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다른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다시 쓰이도록 한 메사츠세츠주의 기업 모델...

어쩌면 이런 사례들은 개별적으로 어딘가에서 한번쯤 들어본 것들일 수 있다. 저자들이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 ‘다양한 경제의 풍경’, 새로운 경제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데에는 ‘다양성의 경제’ 자체가 이들의 이론적, 실천적 지향점이라는 점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들이 ‘경제의 자연화’라고 명명한 현상이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담론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주류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역사적 산물인데도, 마치 인류 사회에 내재하는 ‘자연적 현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감치 이를 비판한 마르크스가 ‘물신숭배의 탈신비화’를 촉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 수많은 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상황은 어쩔 수 없다, 변화시킬 수 없다”는 논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의 주장, 이론적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탈산업화가 이뤄진 영국을 탄광 지역과 철강 산업 지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풀몬트]와 [브라스트오프]를 탈산업화와 남성성의 위기를 연결시켜 분석한 부분(1장)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좌파 정치학의 부정적 정서와 이론적 태도를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진단한 부분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논거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좌파 정치학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비판에 매몰되어 ‘경제의 탈정치화’라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은 논쟁적이지만 귀를 기울여볼만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실천, 깊은 고민과 오랜 성찰 끝에 공들여 나온 결과물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한국의 진보 정치학이 어딘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숙독해볼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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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의 네 가지 삶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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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샨사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바,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 읽어보고 싶었다. 샨사는 1972년에 중국에서 태어나 1990년, 그러니까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1989년 이듬해에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어를 배운지 8년 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샨사의 초기작이라고 하는데, 스토리와 구성, 문장 면에서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중국에서 죽음과 재탄생을 의미한다는 버드나무를 모티브로 하는 4개의 단편이 하나의 장편을 형성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버드나무가 왜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국적 소재를 프랑스어로 쓴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국적 배경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지, 역자의 역량인지 번역도 매끄럽고 잘 읽힌다.

소설에서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죽음과 환행을 거듭하여 인연을 맺게 되지만 어긋날 수밖에 없는 남녀의 운명이 중국의 역사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재미있는 것은 15세기, 청나라 말기, 1960년대 문화혁명기, 그리고 현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4개의 에피소드 문체가 에피소드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이다. 중국 시조가 많이 삽입된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문장 전반에 시의 운율과 여백이 녹아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청나라 시대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며, 마지막 두개는 현대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중국적 요소를 작가가 프랑스어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자못 궁금하다. 그게 샨사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그런데 샨사는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을까? 문화혁명기에 태어나 천안문사태 직후에 프랑스로 건너가 정주하여 살게 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중국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의 표정에서 ‘대국적’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샨사에게서도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바로 드넓은 땅, 오래된 역사, 그 속에서 오랜 세월을 부침을 거치며 살아온 민족에게 각인된 역사의 무게 같은 것이 작가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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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ulemono 2010-01-2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세기면 명나라 때 아닌가요??

stonewriter 2010-01-2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한 일가의 일대기가 배경이에요~
 
아빠가 결혼했다 -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
마리나 레비츠카 지음, 노진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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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ractors in Ukrainian)>이고, 저자의 아버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크라이나계 영국인 2세.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팔순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30대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선언한다. ‘두꺼운 화장에 큰 가슴을 가지고 있고 자동차를 비롯하여 각종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며, 화가 나면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이 여자로부터 아버지를 떼어내기 위해 자매가 의기투합하여 벌여나가는 이야기.

“나는 인간 영혼 밑바닥에 도사리는 어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컸다.”


그 와중에 극중 둘째딸인 주인공은 부모와 언니가 영국으로 이주하기까지의 고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전쟁의 폭력에 죽어갔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전쟁 때 태어난 아이’인 언니가 왜 그렇게 괴팍한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지, 자신의 부모와 언니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 40년을 넘게 ‘가족’의 인연을 맺고 살아왔건만, 그 사람의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정서를 알지 못했던 것.

자기 자신 조차도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남을 웃게 만드는 만담가를 만나면 그 지성과 재치, 유머 감각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회학자, 세상의 모순과 불평등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지성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리분별력 없는 아버지에게서 위험한 팜므파탈을 떼어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관조한다. 이런 사람에게 매료되는 건 ‘까칠함’과 ‘삐딱함’이라는 주요 재료를 ‘패러디’와 ‘유머’라는 그릇에 담아내어 결국 원 재료와 전혀 다른 성격의 희극적 정서를 유발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무릎팍도사>에서 배우 윤여정씨를 보고 ‘완전’ 반했던 건 바로 이런 점이었다. 평소 이 배우가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 때문에 눈여겨 보았더랬다. ‘아줌마’도 ‘할머니’도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묘하게 ‘여자’로 보이는...깡마른 몸에 자타가 공인하는 안 좋은 피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하여 많은 어르신들을 질색하게 만들었던 금속성의 목소리. 쿨하고 솔직하고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까칠해 보이는 그런 아우라를 가진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던 것.

암튼, 이 책은 매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경쾌한 까칠함’이라고나 할까. 표지 뒷면의 추천사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혹은 ‘눈물 나게’ 웃을 정도는 아니지만 심각한 주제를 감동과 유머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전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국제 이주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서 찾아서 읽었던 소설이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나이 50이 넘어서 쓴 첫 번째 소설이라는데, 그래서 더 이 작가를 응원하게 된다.

사족. 이 책을 읽고나니 다문화주의자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는 시대의 소명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문화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빈곤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른바 세계화의 ‘생존회로’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노동이 나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세계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1차적 자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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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 카이에 소바주 3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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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지만 매우 재미있게 읽은 텍스트이다. ‘사랑’과 ‘경제’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짝짓기한 건 타이틀을 ‘섹시하게’ 뽑으려는 상업적 의도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더랬다. 허나, 읽고 난 후엔 지적 창의성, 내용의 충실성 측면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게 되었다.

저자 자신은 ‘사랑과 경제가 하나로 융합되는 전체성의 운동을 파악’하는 학문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만 동원되는 어휘와 지적 계보가 다를 뿐이지 상품과 화폐의 등가교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외부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거나 가시화하는 시도는 저자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경제적 논리가 모든 가치를 독점한 바, 점점 종말을 예감케 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대안을 제시하려는 수많은 학문적 노력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다.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한 학자들의 개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사유의 리더들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책임감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학 및 철학이라는 지적 배경을 가진 저자(워낙 박식한 바 그냥 인문학자라는 호칭이 적절할지도), 나카자와 신이치는 ‘경제를 사유하는 방식’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는 로고스를 ‘모든 것을 근본에 해당하는 곳에서 통합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능력이 활성화되어 우리가 ‘세계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모든 것이 상품의 매매, 교환 가치라는 일원적 논리로 처리되고 구조화되는 황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제 현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욕망을 통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랑과 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유의 좌표로서 그가 제시하는 ‘전체성으로서의 경제학’은 교환․증여․순수증여의 원리가 서로 맞물려있는 지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교환’의 원리가 아니라 ‘증여’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학에 구조적 변동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 교환의 원리가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 포함된 증여의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의의 지적 계보는 신학적 사유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는 중심축에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상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교환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물건이 어떤 방식으로 오가며, 그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상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교환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등가교환) 그 가치가 ‘계산 가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물들 간에 이뤄진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 중에는 이 교환 원리를 적용시킬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면 마음을 담은 선물이나 부모님이 물려주신 반지와 같이 개인에 의미 있는 물건들은 그 가치를 매기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와 그에 대해 다른 무엇을 통해 보답하는 행위, 즉 ‘증여’와 ‘보답’의 순환 고리에서는 ‘무엇’을 매개로 사람 사이에서 인격적인 것이 이동하고 생겨나고 증식한다.

증여와 보답의 순환으로 이뤄져 있는 증여의 원리는 사물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 ‘증여의 원리’가 도덕적․경제적 가치의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증여가 이뤄지지 않으면 우주의 힘의 흐름은 정지하게 된다고 믿었고, 신의 영역에 속하는 순수증여, 즉 보답을 바라지 않고 누가 무엇을 증여했는지도 알 수 없게 하는 증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에서는 증여의 고리를 타고 대지와 인간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 사랑이라는 감정의 풍요로운 증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생산 자체를 소유가 아니라 증여로 이해했던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를 다시 불러오는 이유는 교환의 원리라는 일원적 가치가 지배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가 실종되고, 노동과 순수 증여를 제공하는 대지가 만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기쁨(열락)을 맛볼 수 없는 상황. 한때 인간이 누렸으나, 이제는 기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시대인들이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각성되는 걸 느끼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사회는 “이렇게 복잡한 증여 원리를 따르고 있는 사회의 조직 전체를 간단하고 합리적인 교환의 원리를 토대로 하도록 개조하려는 시도”(p53)이다. 근대 사회의 문제점으로 저자가 지적한 것 중에 특히 흥미를 끌었던 것은 이런 사회에서는 인격적 가치가 만들어지고 증식되는 ‘증여’의 실천이 극히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대목이었다. 『위조화폐』(보들레르)와 『어린 사환의 신』(시가 나오야) 등 소설의 텍스트 분석에서 저자는 ‘전체성으로서의 경제학’ 구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근대 사회에서 과연 고통이나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증여란 과연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비록 소설 분석을 통해 저자는 증여하는 자의 입장에서 증여의 어려움과 실존적 혼란을 성찰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일상적 현실에서 증여의 모순은 주로 증여를 받는 입장에서 더욱 예리하게 경험된다.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받게 되면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놓여났다는 안도감,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수치심, 굴욕감, 증오 등의 모순적 감정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사회에서도 사람 사이에 매개되는 물건을 통해 인격적인 무엇인가가 흐르고, 증식된다. 다만 그 흐름의 경제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증식되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인격, 불평등한 인간관계라는 점이 다르지 않을까. 비록 저자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여의 어려움과 불가능성’을 지적한 대목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족.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1. 중농주의자가 농업을 찬양하는 이유는 농경 사회에서는 ‘대지와 농민’간의 인격적 결합 덕택에 생산 자체를 일종의 증여로 파악하는 사고와 감각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 대지와 인간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는 것. -> 내가 생산한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나에게 준 선물’로 여긴다면, 응당 감사하는 마음, 그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며, 사랑의 에너지가 대기에 흐를 것이다. 소유자 사회(ownership society)에서 증여의 사회를 상상한다는 게 다소 낭만적으로 비춰질 수는 있겠으나, ‘생산 자체를 일종의 증여로 파악하는 감각과 사고’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2. 화폐의 출현을 목도한 마이다스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화폐가 대지를 죽인다”고. 대단한 통찰력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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