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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capitalist Politics (Paperback)
J. K. Gibson-Graham / Univ of Minnesota Pr / 2006년 3월
평점 :
책을 펴들자마자 좀 독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적 문헌에서는 간혹 필명을 사용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지만, 사회과학적 문헌에서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의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나만 그런가?) 암튼, 이 책의 저자 ‘J.K. 깁슨-그래엄’은 각각 호주 국립 캔버라 대학과 미국 매사츠세츠 앰허스트 대학의 페미니스트 경제 지리학자인 캐서린 깁슨과 줄리 그래엄의 공통 필명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1994년 이후 여러 차례 이 필명으로 몇몇 학술지에 글을 실은 바 있고, 이 책 [후기자본주의 정치학]은 1996년에 나온 [자본주의의 종말]의 후속물이다. 지리적으로도 저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학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공통의 성과물을 낸다는 것만으로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된 [액션 프로젝트]의 학문적 성과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도 놀라웠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역시 입장이 분명하고 ‘쌈박하게’ 주장을 제시하는 글이 마음에 든다. 논리적 자기완결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비판과 논쟁을 활발히 불러일으키는 글, 그래서 사유의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글이 생산적임은 물론 지적으로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저자들의 학문적 열정과 도전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이 책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대안과 대안적 경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현재적 국면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신 변화를 지향하는 ‘후기자본주의 정치학’이 왜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불가능성과 봉쇄의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를 그 정서와 태도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신랄하게 분석한다. 또한 이들이 지향하는 ‘가능성의 정치학’, 즉 대안적 경제를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찾아내어 그 목록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대안은 멀리 과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지구 여러 곳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을 개념적으로 구분해 보면 [포스트자본주의 정치학]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크게 경제 담론, 대안적 경제 사례 혹은 실천, 주체의 변화, 3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저자들의 논의는 1) 경제 담론을 바꾸는 것, 2) 경제적 주체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 3) 집단적 실천을 구축하는 것, 이 3가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요 논의의 핵심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경제의 (재)정치화, 경제적 다양성을 활성화하는 것, 현 단계의 자본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담론 질서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것, 2)‘부정의 정치학’이 아닌 ‘긍정의 정치학’, 즉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서 긍정적 정동(affect)을 활성화시키는 것, 3) '사회'의 윤리적 선택과 결정을 강조, '자본주의의 타자'로 간주되어 왔던 '코뮤니즘'을 재의미화하면서, ‘필요, 잉여, 소비, 공공재’ 등과 같은 맑시즘의 용어들을 재개념화하면서, '사회'를 상상하고 다시 만들어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들의 전략은 일종의 ‘경제적 풍경 다시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스페인의 ‘몬드라곤’ 사례부터 크고 작은 공동체 경제 사례들을 발굴하여, 개발 논리가 아니라 ‘상호의존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깨달음과 자각에 기반한 경제의 모습, 즉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외부’ 세계의 지도를 보여준다. 경쟁과 개발 담론이 추동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다만 경제 질서의 표면, 빙산의 일각(p70)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기실 경제라는 것, 즉 거래와 협상, 노동의 유형과 노동에 대한 보상 방식, 기업의 형태, 잉여를 생산하고 전유하고 분배하는 방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3장)을 각종 도표와 그림으로 시각화하고 목록화해서 보여준다.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자본주의 질서가 구축되기 이전에서 찾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과 마찬가지로 현재 존재하고 있으나 주류 담론 질서에 가려 가시화되지 않았거나 부정적으로 의미화된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처럼 '교환의 원칙'이 아닌 '증여의 원칙'이 살아있는 경제를 보여주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와 욕망,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책 [포스트자본주의 정치학]은 현재의 헤게모니적 담론 질서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외부를 동시대 안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외부'를 '자본주의'의 이전에서 찾고 있는 논의보다 어떤 면에서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도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보다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같은 인문학적 논의에서 더 감흥을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본주의 이후 혹은 외부의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앞서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가?”라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을 던져보는 건 중요한 것 같다.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먼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 있으므로. 4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다양성의 경제’의 현장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사례들을 취재한 다큐가 몇 개쯤 이미 나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주 노동자의 송금으로 버티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인 필리핀의 MSAI 프로그램은 돈의 일부를 모아 지역 공동의 자산으로 바꾸어 지역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낸 사례, 기업을 노동자가 소유하고 이윤 중 일부를 모아 사회복지를 제공하거나 다른 조합을 만들어낸 유명한 몬드라곤 사례,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 한 지역인 마라리큐람에서 20-40명 내외의 여성들이 저축 공동체를 만들어 극빈자를 위해 고용을 창출한 사례, 그리고 기업으로 하여금 이윤 중 일부를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에 기증하도록 함으로써 이윤이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다른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다시 쓰이도록 한 메사츠세츠주의 기업 모델...
어쩌면 이런 사례들은 개별적으로 어딘가에서 한번쯤 들어본 것들일 수 있다. 저자들이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 ‘다양한 경제의 풍경’, 새로운 경제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데에는 ‘다양성의 경제’ 자체가 이들의 이론적, 실천적 지향점이라는 점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들이 ‘경제의 자연화’라고 명명한 현상이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담론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주류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역사적 산물인데도, 마치 인류 사회에 내재하는 ‘자연적 현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감치 이를 비판한 마르크스가 ‘물신숭배의 탈신비화’를 촉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 수많은 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상황은 어쩔 수 없다, 변화시킬 수 없다”는 논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의 주장, 이론적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탈산업화가 이뤄진 영국을 탄광 지역과 철강 산업 지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풀몬트]와 [브라스트오프]를 탈산업화와 남성성의 위기를 연결시켜 분석한 부분(1장)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좌파 정치학의 부정적 정서와 이론적 태도를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진단한 부분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논거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좌파 정치학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비판에 매몰되어 ‘경제의 탈정치화’라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은 논쟁적이지만 귀를 기울여볼만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실천, 깊은 고민과 오랜 성찰 끝에 공들여 나온 결과물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한국의 진보 정치학이 어딘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숙독해볼만 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