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결혼했다 -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
마리나 레비츠카 지음, 노진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ractors in Ukrainian)>이고, 저자의 아버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크라이나계 영국인 2세.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팔순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30대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선언한다. ‘두꺼운 화장에 큰 가슴을 가지고 있고 자동차를 비롯하여 각종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며, 화가 나면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이 여자로부터 아버지를 떼어내기 위해 자매가 의기투합하여 벌여나가는 이야기.

“나는 인간 영혼 밑바닥에 도사리는 어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컸다.”


그 와중에 극중 둘째딸인 주인공은 부모와 언니가 영국으로 이주하기까지의 고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전쟁의 폭력에 죽어갔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전쟁 때 태어난 아이’인 언니가 왜 그렇게 괴팍한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지, 자신의 부모와 언니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 40년을 넘게 ‘가족’의 인연을 맺고 살아왔건만, 그 사람의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정서를 알지 못했던 것.

자기 자신 조차도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남을 웃게 만드는 만담가를 만나면 그 지성과 재치, 유머 감각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회학자, 세상의 모순과 불평등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지성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리분별력 없는 아버지에게서 위험한 팜므파탈을 떼어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관조한다. 이런 사람에게 매료되는 건 ‘까칠함’과 ‘삐딱함’이라는 주요 재료를 ‘패러디’와 ‘유머’라는 그릇에 담아내어 결국 원 재료와 전혀 다른 성격의 희극적 정서를 유발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무릎팍도사>에서 배우 윤여정씨를 보고 ‘완전’ 반했던 건 바로 이런 점이었다. 평소 이 배우가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 때문에 눈여겨 보았더랬다. ‘아줌마’도 ‘할머니’도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묘하게 ‘여자’로 보이는...깡마른 몸에 자타가 공인하는 안 좋은 피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하여 많은 어르신들을 질색하게 만들었던 금속성의 목소리. 쿨하고 솔직하고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까칠해 보이는 그런 아우라를 가진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던 것.

암튼, 이 책은 매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경쾌한 까칠함’이라고나 할까. 표지 뒷면의 추천사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혹은 ‘눈물 나게’ 웃을 정도는 아니지만 심각한 주제를 감동과 유머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전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국제 이주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서 찾아서 읽었던 소설이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나이 50이 넘어서 쓴 첫 번째 소설이라는데, 그래서 더 이 작가를 응원하게 된다.

사족. 이 책을 읽고나니 다문화주의자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는 시대의 소명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문화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빈곤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른바 세계화의 ‘생존회로’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노동이 나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세계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1차적 자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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