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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잘못 날아왔다 ㅣ 창비시선 288
김성규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중략)
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밝은 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게 불과 얼마 전이었구나. 오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니...대학 입학과 더불어 유년기를 보낸 서울에 다시 왔을 때, 무엇보다 놀란 건 지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현실이기도 했고, 불행의 일부가 되었다. 20대엔 지하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30대엔 겨우 지상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오랫동안 햇빛을 보기가 어려웠다.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은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지하 세계의 목격자가 되어 불행을 지켜보고 증언하는 듯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역시 불행의 목격자가 되는 건 대단한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다. 그의 시는 사산된 아이, 곰팡이, 썩어가고 있거나 죽어가고 있는 것들, 어둡고 불길한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어떤 강한 생명력이 감지된다. 그의 시들은 마치 온갖 부패물들이 쌓이고 쌓여 거름이 되고 그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자연의 이치를 연상케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어떤 강인하고도 질척거리는 어두움을 닮은 생명의 에너지를 내 안에 잔뜩 받아들인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시인은 아직도 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