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 카이에 소바주 3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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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지만 매우 재미있게 읽은 텍스트이다. ‘사랑’과 ‘경제’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짝짓기한 건 타이틀을 ‘섹시하게’ 뽑으려는 상업적 의도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더랬다. 허나, 읽고 난 후엔 지적 창의성, 내용의 충실성 측면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게 되었다.

저자 자신은 ‘사랑과 경제가 하나로 융합되는 전체성의 운동을 파악’하는 학문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만 동원되는 어휘와 지적 계보가 다를 뿐이지 상품과 화폐의 등가교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외부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거나 가시화하는 시도는 저자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경제적 논리가 모든 가치를 독점한 바, 점점 종말을 예감케 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대안을 제시하려는 수많은 학문적 노력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다.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한 학자들의 개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사유의 리더들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책임감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학 및 철학이라는 지적 배경을 가진 저자(워낙 박식한 바 그냥 인문학자라는 호칭이 적절할지도), 나카자와 신이치는 ‘경제를 사유하는 방식’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는 로고스를 ‘모든 것을 근본에 해당하는 곳에서 통합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능력이 활성화되어 우리가 ‘세계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모든 것이 상품의 매매, 교환 가치라는 일원적 논리로 처리되고 구조화되는 황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제 현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욕망을 통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랑과 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유의 좌표로서 그가 제시하는 ‘전체성으로서의 경제학’은 교환․증여․순수증여의 원리가 서로 맞물려있는 지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교환’의 원리가 아니라 ‘증여’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학에 구조적 변동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 교환의 원리가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 포함된 증여의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의의 지적 계보는 신학적 사유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는 중심축에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상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교환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물건이 어떤 방식으로 오가며, 그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상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교환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등가교환) 그 가치가 ‘계산 가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물들 간에 이뤄진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 중에는 이 교환 원리를 적용시킬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면 마음을 담은 선물이나 부모님이 물려주신 반지와 같이 개인에 의미 있는 물건들은 그 가치를 매기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와 그에 대해 다른 무엇을 통해 보답하는 행위, 즉 ‘증여’와 ‘보답’의 순환 고리에서는 ‘무엇’을 매개로 사람 사이에서 인격적인 것이 이동하고 생겨나고 증식한다.

증여와 보답의 순환으로 이뤄져 있는 증여의 원리는 사물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 ‘증여의 원리’가 도덕적․경제적 가치의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증여가 이뤄지지 않으면 우주의 힘의 흐름은 정지하게 된다고 믿었고, 신의 영역에 속하는 순수증여, 즉 보답을 바라지 않고 누가 무엇을 증여했는지도 알 수 없게 하는 증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에서는 증여의 고리를 타고 대지와 인간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 사랑이라는 감정의 풍요로운 증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생산 자체를 소유가 아니라 증여로 이해했던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를 다시 불러오는 이유는 교환의 원리라는 일원적 가치가 지배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가 실종되고, 노동과 순수 증여를 제공하는 대지가 만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기쁨(열락)을 맛볼 수 없는 상황. 한때 인간이 누렸으나, 이제는 기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시대인들이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각성되는 걸 느끼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사회는 “이렇게 복잡한 증여 원리를 따르고 있는 사회의 조직 전체를 간단하고 합리적인 교환의 원리를 토대로 하도록 개조하려는 시도”(p53)이다. 근대 사회의 문제점으로 저자가 지적한 것 중에 특히 흥미를 끌었던 것은 이런 사회에서는 인격적 가치가 만들어지고 증식되는 ‘증여’의 실천이 극히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대목이었다. 『위조화폐』(보들레르)와 『어린 사환의 신』(시가 나오야) 등 소설의 텍스트 분석에서 저자는 ‘전체성으로서의 경제학’ 구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근대 사회에서 과연 고통이나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증여란 과연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비록 소설 분석을 통해 저자는 증여하는 자의 입장에서 증여의 어려움과 실존적 혼란을 성찰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일상적 현실에서 증여의 모순은 주로 증여를 받는 입장에서 더욱 예리하게 경험된다.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받게 되면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놓여났다는 안도감,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수치심, 굴욕감, 증오 등의 모순적 감정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사회에서도 사람 사이에 매개되는 물건을 통해 인격적인 무엇인가가 흐르고, 증식된다. 다만 그 흐름의 경제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증식되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인격, 불평등한 인간관계라는 점이 다르지 않을까. 비록 저자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여의 어려움과 불가능성’을 지적한 대목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족.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1. 중농주의자가 농업을 찬양하는 이유는 농경 사회에서는 ‘대지와 농민’간의 인격적 결합 덕택에 생산 자체를 일종의 증여로 파악하는 사고와 감각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 대지와 인간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는 것. -> 내가 생산한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나에게 준 선물’로 여긴다면, 응당 감사하는 마음, 그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며, 사랑의 에너지가 대기에 흐를 것이다. 소유자 사회(ownership society)에서 증여의 사회를 상상한다는 게 다소 낭만적으로 비춰질 수는 있겠으나, ‘생산 자체를 일종의 증여로 파악하는 감각과 사고’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2. 화폐의 출현을 목도한 마이다스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화폐가 대지를 죽인다”고. 대단한 통찰력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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