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언어
제인 정 트렌카 지음, 송재평 옮김 / 와이겔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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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언어

어느 입양인에게 추천받은 책이다. 이 책의 제목, ‘피의 언어’라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을 이루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들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아이에겐 그럴지도 모른다. 입양 가족의 아이에겐 자신이 가족의 일원임을 증명해 주는 지속적인 확인이 요구된다. 입양 부모는 입양 자녀가 게이임을 밝히거나 규범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자신이 낳은 자녀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보다 더욱 비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녀의 경우엔 어찌되었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만, 입양 자녀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직접 ‘선택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validation’. 입양부모와 입양 자녀의 관계는 ‘유효기간’이 전제된 잠정적 관계일까. 저자, 제인 정 트렌카는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부모에게 입양되어, 그들이 정말 갖고 싶었던 ‘진짜 아이’의 대용품이라는 느낌으로 살았다. 입양아에게 ‘부모가 선택한 아이’라는 말은 “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이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말로 번역되어 들린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의 친어머니와 친자매들을 만나고,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친자매들과 함께 보살피고, 미국의 지인들과 함께 평생 그리워했던 친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추도식을 하면서, 비로소 미국 땅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네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더 좋았겠니?”  p289.

입양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모르겠다. 그 질문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해보라는 요구이다. p293.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해 보라는 요구'는 '추방당한 시인의 세계', 즉 입양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인 듯하다. ‘피’를 나눈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그들과 나눈 ‘피의 언어’를 통해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피의 언어’를 알게 되면서, 오래 전에 놓아버린 꿈,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텍스트를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피를 나눈 가족이 최고여!” 식의 고전적 독법은 이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섬세한 파장을 놓치게 만든다. 저자가 ‘추방자’라고 정의한 입양인의 경험을 당사자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다.

사족. 내가 읽은 입양인 작가들의 책에서는 유독 시가 많이 등장했다. 시적 언어는 역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조각난 자아를 통합하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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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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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출신으로 지식인이 된 사람 중에는 유년기 경험을 학문적 자원, 혹은 참조 지점으로 삼아 논의를 이어가는 학자들이 더러 있다. 바바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를 읽어보면 세상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인식론을 엿볼 수 있다. 지식인 엘리트로서 이들이 계급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 세계, 부모 세대의 세상과 자신이 향후 소속될 세상 사이에서 겪은 혼란과 모순, 그리고 온갖 딜레마로 점철된 경계 영역에서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 그것이다.

벨 훅스는 서문에서 그동안 이 책을 쓰는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비가시적이고 비언어적 상태로 남아있던 분열과 상흔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저자에게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치열함’에 있다. 자신의 유년기 경험, 무엇보다도 계급적 경계 넘기가 보장되어 있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겪었던 소외감, 가족과 세상 사이에서 느꼈던 단절감 등은 단지 개인적 경험, 사적인 서사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계급, 인종, 정체성의 정치경제와 문화논리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참조 지점이다.

단상 1.

재분배(경제)와 인정(문화)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적 구분이 개인의 경험 속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특히 타자화된 사람들의 경험을 살펴볼 때 그렇다. 벨 훅스는 빈곤, 계급의 문제와 인종의 문제를 결합된 방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12장에서 부동산과 인종 차별의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제시한 대도시 주택 정책의 사례들을 통해 부동산 분야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적 계급 투쟁’의 문제를 신랄한 어조로 비판한다. 벨 훅스는 Mary Barefoot, Dennis Altman의 논의를 끌어와 백인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가 갖고 있는 지위 향상의 꿈이 유색 인종 퇴출의 촉매제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계급화와 인종화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미국의 주택 정책에 대한 분석은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주목해 볼 만 하다.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이 논리를 한국의 상황에 이식시켜 분석해 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전 국민을 사로잡은 ‘부와 권력에 대한 꿈’이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타자화된 사람들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고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격리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없는 자의 서러움은 이러한 퇴출과 추방 과정에서 발생하는 낙인 효과가 아닐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이렇듯 부동산을 통한 계급화 프로젝트를 통해서 구축되니까 말이다.

단상 2.

p55. 내가 자라면서 최고로 소중히 여긴 가지들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근면, 정직,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도 학업을 마칠 수 있을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노동 계급에 대한 충성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급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길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모순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계급 문제를 다루다보면 충돌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살펴보아야만 했다.

p59.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라는 신의 가르침과 매일 부딪히는 세속적인 상황은 필연적인 마찰을 낳았다.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은 종종 수치심을 유발하는 괴롭힘과 굴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다. 가난한 사람들, 성적 소수자들이 자신이 속해 있던 계급 및 공동체를 배반하고 주류에게 동일시하는 현상. 저자는 계급 간의 연대가 가능하리라는 저자의 기대와 희망이 철저하게 무너진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인식의 틀을 구축한다. 그것은 바로 타자화된 사람들이 겪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동정과 멸시, 굴욕은 왜 그들이 계급 배반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가를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 얼마 전 심리학자인 나의 지인이 영화화된 책 <더 리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겪는 부정적 감정의 근원에는 놓여있는 것이 수치심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말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추측컨대 설득력이 있었다.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세상에 귀속됨으로써 쉽고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 모순과 분열의 경험을 독특하고 창의적인 인식론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벨 훅스의 ‘사유하는 힘’이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사족. 경계인의 인식론, 디아스포라 인식론을 이야기하는 서경식의 글을 읽을 때, 그의 논의가 주는 통찰력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특권을 주장하는 방식에 살짝 나르시시즘이 감지될 때가 있다. 벨 훅스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쨌건 이 책을 읽고 벨 훅스에게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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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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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를 넘기면 일본 에도 시대 요괴그림집에서 발췌한 <우부메> 그림이 나온다.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아기를 안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고 있는 젊은 여자의 그림이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 겁에 질려 있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눈은 아래를 향해있지만 초점이 없다. 기괴하고 음산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게 슬픈 기운을 가득 담은 이 그림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책을 끝까지 읽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 말에 사서 읽기 시작했으나, 주인공 세키구치와 그의 친구인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 간의 지루한 대화가 좀 길다 싶을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했기 때문.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우유부단하고 어딘가 음울한 것이 어쩐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인 문학청년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주인공 세키구치.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민속학, 괴담, 전설 등에 일가견이 있는 고서점 주인인 교고쿠도. 고지식하고 순진한 세키구치와 괴팍하지만 요괴 괴담, 기담, 주술에 대한 전문 지식과 어울리지 않는 합리적 지성의 소유자인 교고쿠도가 주고받는 지루한 대화는 초반 1/3을 차지한다.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은 점점 가속화되면서 후반부가 되면 읽는 사람이 숨이 찰 만큼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비밀들, 얽히고 섥혀 잔뜩 꼬여 버린 실타래가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풀려버린다. 마치 잔뜩 집어삼킨 무언가를 한꺼번에 토해내듯이. 아마도 전반부의 지루한 대화는 후반부의 누적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초석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전반부의 복선들은 후반부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맞물려 있으니 말이다.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 봉인된 과거의 기억과 그로 인해 현재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비밀스럽고도 불안한 압력들,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 내러티브의 전개. 일본 소설,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들이다. 늘 그러하듯이 이 소설 역시 현재 시점에서 시작되어 봉인된 과거 기억의 편린들과 미래의 시점으로 점점 진행되는 현재 시점의 사건들 간의 조각 맞추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때는 1950년대 도쿄, 주인공인 소설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유서깊은 산부인과 가문의 한 남자가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임신 중이던 그의 부인은 그 후로 20개월째 출산을 하지 못하는 기이한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현재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주인공과 관련인물들의 과거, 그리고 한 집안의 역사가 되어 버린 비밀스런 내력들, 즉 개인과 집단의 과거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들의 재료가 되는데, 그 공통점은 ‘봉인된 기억’이라는 점이다. 즉 몸은 기억하고 있으되 의식의 수준에서는 밀폐된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압력은 현재라는 무대 위의 관련 인물들을 앞으로 닥칠 불행한 사건들로 초대한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사라지는 신생아들, 되풀이되는 비극을 은폐하고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자하는 집요한 욕망, 그리고 ‘전통’의 이름으로 증폭되어 되물림되는 또 다른 비극. 이 소설은 분명 한 가문의 비극적 역사와 등장인물들의 개인사가 매개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는 점은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산부인과 가문에 감춰져 있는 과거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주인공 세키구치 역시 그와 관련된 자신의 봉인된 기억과 대면하게 된다. 산부인과 가문의 과거에 오버랩되는 그의 과거에 살짝 노출되는 것이 전쟁터에서의 경험이다. 일본에서 1950년대는 전후 민주주의와 제2근대화로 ‘새로운 일본의 건설’이 그야말로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던 시점이다. 일본의 역사에서 ‘전후’라는 단어는 일본인에게 매우 복잡한 감정을 유발하는 듯하다.  

어쨌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밀실 공포, 과거의 봉인된 기억, 그리고 그와 연루된 현재 진행형의 비극적 사건들이라는 모티브는 전후 일본의 근대화 물결에 의해 봉인된 ‘전쟁의 기억’들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봉인된 집단적 기억들. 마치 미국인들에게는 인디언 선주민(先住民)에 대한 대량학살로 시작된 미국 역사에 대한 의식화되지 않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봉인된 집단적 죄의식이 있고,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샤이닝>은 미국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죄의식을 원료로 한 공포영화라는 ‘설’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일본이 훌륭한 추리소설, 공포소설 작가들을 배출하게 된 데에는 이와 유사한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쨌거나 분명 현재 일본은 학계이건, 문학계이건,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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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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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945405493000735497

"내가 나르마다 프로젝트의 재앙에 대한 글 <더 큰 공공선>을 쓸 때, 무엇보다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주어진 통계가 아니라 당연히 있어야 할 통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정부는 댐 건설로 쫒겨나야 했던 사람들의 수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가장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인도 국가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인도의 지식인 공동체도 용서받을 수 없다" -<9월이여, 오라> p11.

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번에는 이라크를 상대로) 사람들의 슬픔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세재와 조깅화를 파는 기업들이 후원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를 위해 슬픔을 포장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을 싸구려로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으 슬픔의 상품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도 가차없이 약탈하는 야만주의입니다." <9월이여, 오라> p69.

<작은 것들의 신>과 <9월이여, 오라>. 10년 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었을 때의 단상을 떠올려 보면, 다소 선동적이고 분노에 찬 듯한 어조로 쓰여진 <9월이여, 오라>는 아룬다티 로이에게 있어서는 '이유있는 변신'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작은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작은 세계'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태도...이것이 아룬다티 로이가 가진 저항적 힘의 원동력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그러한 힘에서 나오는 필력으로 인종주의,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본다. 놀라운 것은 단.지. '소설가'로만 알려진 이 사람이 이러한 질서에 기반하여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확한 정보와 명료한 분석력으로 독자들을 설득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이의 글이 그 어느 학자의 글보다 더 명료하게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건...다름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분석해 내는 로이 만의 독해과 지식 가공 능력이 다름 아닌 '작은 것들'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과 접합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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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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斜陽, 다자이 오사무

해마다
눈 먼 새끼학
잘도 크는구나
가엾어라 살진 모습 (84p.)

전쟁 전후 일본 문학과 영화들 중에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루는 내용들이 많은 듯하다. 평생 4번의 자살시도, 39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사양』이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은 모두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을 것 같다. 드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방 토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가 수많은 가난한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는 자각과 거기에서 비롯된 태생적 죄의식,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거칠고 정직한 평민들의 삶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했던 다자이 오사무. 이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심리적 경계지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순을 예민하게 자각하며,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냈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인식 세계, 그런 존재들이 뿜어내는 묘한 매력,...이 소설에 나오는 4명의 인물들은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인칭 화자인 가즈코, 마약중독인 남동생 나오지, ‘일본의 마지막 귀족’의 품성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나오지와 가즈코의 지인인 소설가 우에하라. ‘저무는 해’라는 뜻의 제목은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 황족 집안이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귀족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 근거 역시 상실한 가즈코의 집안은 남아있는 유산으로 근근히 버티지만 얼마되지 않는 돈은 떨어져 가고, 가즈코 역시 늙은 남자의 후처 자리나 친척 집 가정교사(겸 식모) 자리를 제안받는 등 계층 몰락의 처지에 놓여있다.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184p. 주인공의 남동생, 나오지의 유서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살한 남동생이 누나 가즈코에게 남긴 장문의 유서엔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 힘들었던’ 그의 생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평민의 정직한 삶에 대한 동경, 귀족이라는 신분에 대한 죄의식,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서 발견한 ‘정직한 아름다움’....정직함의 미덕은 나오지가 먹고 사는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평민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흐르는 귀족의 피에서 부정할 수 없는 거부감과 애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 그래서 그는 귀족, 평민,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세상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어머니를 제외한 3명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순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양, ‘저무는 해’는 떠오르는 해를 내포하고 있다. 흔히 일본 문화엔 자살에 대한 도덕적 경계심이 희박하다는 비판이 가해지곤 하지만, 도덕적 판단에 앞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유의 방식을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일본의 마지막 귀족’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귀족 신분 간의 근본적 모순으로 괴로워하던 동생마저 자살한 후, 가즈코는 역시 죽음이 임박한 우에하라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로써 가즈코는 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가산 탕진, 그리고 사생아의 임신, 이로서 그녀는 ‘귀족적인’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녀에게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귀족의 태양은 저물어버린 것. 이제 그녀는 ‘혁명’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그 열정으로 아이를 키워내리라 결심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모든 것이 단절된 세상과 그녀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인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도덕적 가난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그녀에게 새로운 태양을 비춰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현대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오랜 만에 높은 수준의 소설을 읽으니 뿌듯하다. 영혼이 풍요로와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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