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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숙영낭자전 ㅣ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이 두 소설은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힌 애정소설이라고 한다. 왕조 말기 정권의 레임덕이 심화되고, 민초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을 터. 역시 달달한 로맨스는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 큰 위로가 되는 법인가보다. 그런데 이 두 소설은 마냥 달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여주인공이 어찌난 극심한 고난을 겪는지 그 고생이 헤라클레스의 그것 못지않다.
숙향전은 주인공의 일대기로 태어나서 5번의 위기를 넘기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주인공 ‘숙향’은 택택한 집안에서 좋은 부모에게 태어나 사랑을 받다가, 5살 어린 나이부터 20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적에게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을 고비, 굶어죽을 고비를 겪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바닥까지 떨어진다. 고향과 부모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사회적 신분이 박탈된다는 것. 요행을 얻어 남의 집 수양딸로 잠시 잘 지냈으나 출신성분을 알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다시 길거리로 나앉는다. 화마를 만나 다 큰 처녀가 홀딱 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다가 술집을 운영하는 노인을 만나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 오딧세이가 이렇게 인간사의 버전으로만 전해졌다면 그렇게까지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숙향이 천상의 선녀였으나, 다른 선군과 연애를 하는 바람에 둘 다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그녀의 고난은 그 사랑이 연을 맺기 위해 치러내야 할 숙명이었다는 것.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숙향전의 조선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숙영낭자전은 전자에 비해 훨씬 환상적 요소가 적다. 게다가 신분차별이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남녀 간의 신분 차이가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진다. 더구나 죽음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시아버지, 그 갈등이 발생하는 장소도 시집이라는 공간이다. 영화로 치자면 진한 성애 장면이 여기 저기 나왔을 법한 이 숙영낭자전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떻게 ‘효’나 ‘충’이라는 가치와 충돌하고, 입신양명이라는 남성성의 규범을 와해시키는 ‘반동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어릴 적, 나는 사실 옥황상제의 딸이었는데,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 인간 세상에 태어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깜직한 상상을 하곤 했다. 주어진 상황을 감내하는 것 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이런 숙명론이 주는 위안이 있다. 숙명론적 세계관,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개고생은 가슴 아프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역사적 배경과 두 소설의 내러티브를 설명해준 역자의 해설도 재미있고 유익했다. 옛날이야기가 주는 재미, 그동안 참말이지 그리웠다! 다음엔 뭘 읽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