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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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고령화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나 현상들이 어떻게 ‘고령화’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5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을 읽다보면 책장을 넘길수록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시나브로 쌓인다. 저널리스트가 쓴 베스트셀러 중 ‘쇼크’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이 더러 있는데, 이 책이 안겨주는 ‘쇼크’는 좀 남다르다. 책에서 보여주는 고령화의 풍경들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p. 408-9. 그는 중국인들이 노인을 보살피는 것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문화와 전통의 한 부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때, 그들은 평균수명이 겨우 35세였을 때 그러한 전통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효도하는 자식들의 부담이 훨씬 가벼웠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그 병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는 현대의학과 공중보건이 발달하기 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아팠다가 금방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p. 462. (노동자들이 자살한) 폭스콘 사태는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크게 높아져서 임금이 하락하고 있는데다 연금 혜택을 받는 노동자들이 생산라인과 사무실에서 밀려나는 시점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울림이 컸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 사태는 가깝고도 먼 관계인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운명이 한편으로는 얽혀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잔혹하게 대립하는 곳에서 세대 간 이해관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계적 고령화 추세 속에서도 그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 사회에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젊음에 대한 강박과 동경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는 ‘노인들의 나라’로의 급속한 전환에 대한 인식과 대비가 결핍되기 쉽다. 세계화, 이민, 노동쟁의, 금융위기, ‘효’의 가치를 고령화라는 이슈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령화는 이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고령화 사회를 어떻게 읽어내고, 당면한 딜레마와 다양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바야흐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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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a True Story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1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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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재판에는 두 가지 차원이 얽혀있다.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가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충분한가’의 문제가 첫 번째다. 그것은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유죄 여부를 판단하면서 목사처럼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 피의자가 범인이라는 게 확정되었다면, ‘형량을 얼마로 보아야 하는가’가 두 번째 문제이다. 범인의 범죄가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 그에 알맞은 형량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하는 일에는 언제나 도덕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인생에서 어떤 경험을 했으며,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강력 사건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재미 중 하나는 인생의 복잡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드라마에서는 흔히 살인 사건의 디테일을 상세히 때론 심하다 싶게 스펙터클하게 묘사된다. 독일의 변호사가 쓴 이 논픽션에서도 마찬가지. 사건의 잔인성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의 삶이 보여주는 진정성과 대조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복잡하고 처연한 느낌을 갖게 한다.

얼마 전 살인 사건을 변호한 경험을 쓴 블로거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건 자체가 놀라운 소재인지라 읽을 때는 몰랐는데, 연달아 몇 편의 글을 다 읽고 나니 뭔가 불편한 여운이 남았다. 그것은 의뢰인의 사생활을 비록 익명으로 처리했다 할지라도 거침없이 써서 불특정다수에게 공개한다는 것이 법조인의 직업적 도덕성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 사건과 저자의 상상력 사이의 공간을 저자가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 블로거는 아예 그 공간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전지적 시점에서 내러티브를 풀어갔다. 그 블로거의 글이 논픽션이기 때문에 그런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그 공간의 존재, 그리고 그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을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삶에 대한 도덕적 화두로 제시한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잔혹한 죄를 저지른 살인자, 그러나 그도 인간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온 자신만의 인생사가 있는 법. 리얼 스토리, 인생극장은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정답의 전제를 흩으러 놓는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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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Woman: Nannies, Maids, and Sex Workers in the New Economy (Paperback)
Ehrenreich, Barbara / Henry Holt & Co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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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의(injustice)이다!

요즘 ‘정의’라는 화두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런 유례없는 현상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부조리가 극에 달한 탓도 있겠지만,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인 듯하다. 「글로벌 여성」은 정의(justice)에 대한 지적 갈망이 높아진 이 시점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다. 서구의 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바탕으로 한 책이기에 쉽게 읽힌다.

제목이 풍기는 학술적․전문적 분위기(「글로벌 여성: 신 경제에서의 유모, 가사도우미, 성노동자들」)에 비해 의외로 내용은 쉽게 잘 읽힌다(사회과학 서적 치고는 상당히 쉬운 영어로 씌어있다). 「감정노동」의 저자 앨리 러셀 혹쉴드, 「빈곤의 경제」의 저자 바바라 에렌라이히,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의 저자이자 ‘글로벌 시티’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사스키아 사센 등 다수의 저명하고 명민한 저자들이 그들의 지적 통찰력과 학문적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뭉쳤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거나 지배 담론에서 가려진 ‘세계화’의 이야기, 이른바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 서사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동안 주류 학계나 미디어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이주 여성들의 삶, 여성 노동의 세계화를 둘러싼 부조리한 국제적 노동 분업의 현실이다. ‘이주의 여성화’, ‘보살핌 노동’ 등을 주제어로 하는 이 앤솔로지 중에서도 앞에 언급한 3명의 저자들의 글이 제일 널리 읽히는 듯하다.

이중 혹쉴드의 논의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혹쉴드(2장 “사랑과 금”)는 신경제의 그림자, 비공식 섹터인 보살핌 노동 및 감정 노동에 종사하기 위해 제3세계의 여성들이 제1세계로 이주하는 현상을 ‘부드러운 제국주의’ 혹은 ‘정서적 제국주의’로 명명한다. 예전에는 금이나 상아, 고무 등과 같은 자연 자원, 즉 물질적 자원이 주된 약탈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1세계가 3세계로부터 ‘사랑’이라는 정서적 자원을 착취하여 재분배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착취가 강압이나 폭력을 동원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조리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세계화로 인한 불균등한 발전과 이로 인해 더욱 극심해진 국가 간 빈부 격차, 그리고 이것이 제3세계에 야기한 빈곤과 빚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야기한 부조리와 그것의 비가시성 문제에 대해 혹쉴드는 보살핌 노동의 사용자-피고용인 사이에서 그 노동이 인식되는 방식의 차이를 조명함으로써 신랄하게 분석한다. 혹쉴드는 이주 여성 유모가 아이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노동 과정에서 소외가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를 ‘사랑의 페티시화’로 설명한다. 이주 여성 유모는 사용자(고용자)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로 ‘소비’될 뿐,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겪는 감정이나 보살핌 노동 과정의 어려움들은 간과된다. 1세계의 ‘있는 집 자식들’은 여러 명의 어른들(부모, 유모)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는다. 이 아이들이 애정의 ‘과식’을 향유하는 반면 남겨진 3세계의 아이들은 정서적 결핍 상황에 놓여 있다. 노동 과정에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과 맥락이 무시된 채, 최종적으로 제공되는 상품이 독립적인 대상으로 간주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페티시즘. 혹쉴드는 이 용어를 가져와 유모의 노동 행위의 핵심인 ‘사랑’을 고립적으로 사고하여 그것이 속해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질서와 분리시키는 현상을 비판한다. 1세계(부유한 고용주 부모)가 3세계 유모의 애정을 소비하고 낭만화하면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유모가 겪고 있는 외로움, 딜레마,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혹쉴드는 이와 같이 ‘사랑’이라는 정서적 자원이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현상을 ‘부정의 injustice’의 문제로 볼 것을 제안한다.

대안으로 제시된 “보살핌 노동의 가치를 올리자”, “글로벌한 윤리 감각을 개발하자”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성 노동의 세계화의 비가시성”을 가시화하고, “여성을 완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 서론에 제시된 이 책의 목적이다. ‘글로벌한 윤리 감각’이라...어떻게 이것을 획득할 수 있을까. 저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비가시적인 정의의 영역을 가시화하고, 정의(justice)의 인식론적 지도를 바꾸는 것, 이를 통해 이른바 집단 지성을 확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한편 개인적 차원에서의 ‘글로벌한 윤리 감각’이란 다름 아닌 ‘의존’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리는 행복, 나의 생존과 삶이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닌 다른 사람들,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고, 타자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정의 감각을 일깨우는 가장 큰 동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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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02-1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번역은 안되어 있는건가요?

stonewriter 2015-02-1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가 읽을 때는 번역되지 않았어요. 좋은 책인데 말이에요.
 
한국의 가난 (반양장)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김수현.손병돈.이현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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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가난’, 특히 한국 사회의 신빈곤 현상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정리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3명의 저자가 일반인을 위해 작정하고 쓴 아주 친절한 책이다. 교과서처럼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새로운 빈곤 현상을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나 개념을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사회과학 서적임에도 저자들의 ‘가슴’이 감지된다. 그렇다고 독자의 감성이나 도덕성에 호소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자료와 사례를 근거로 최근의 학문적 논의의 흐름을 정교하게 엮어서 한국의 빈곤 현상에 대한 인식론적 지도를 제시한다. 읽고 나면, 빈곤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신문 기사나 미디어 등을 통해 어렴풋이 가늠하고 있을 문제의식이 명료해지고, 사유의 지평이 더욱 확장된다.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도 가난했다. 그러나 지금의 가난과 그때의 가난은 질적으로 다르다. 당시엔 계층의 수직 상승이 가능했고, 교육은 빈곤에서 벗어나는 사회적 기능을 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시대였다) 또한 가난해도 서로 아이들을 돌봐주고,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문화, 사회적 연계망이 작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일을 해도, 국가 경제가 성장해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일자리가 없어서 가난하고, 일을 해도 가난하다. 교육은 오히려 빈곤과 양극화를 고착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고, 도시 개발로 가난한 사람들이 보금자리에서 내몰림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파편화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가족,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다.  

한국 사회의 빈곤은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 ‘빈곤 위험 사회’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빈곤은 단지 물질적 결핍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배제와 소외의 문제라는 것, 가난을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는 한, 결코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메시지다.   

 

결국 우리의 빈곤 대책은, 조금 비꼬아서 표현하면,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원하는 정책’에 그치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주는 지원은 진정한 의미의 빈곤정책이 아니다.  
복지는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다. 살피고 듣고 필요한 무언가를 전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p. 291

 

아울러 저자들은 빈곤선 이하의 가난뿐만 아니라 빈곤선 주변에서 진입과 탈출을 반복하는 ‘반복 빈곤층’에 주목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빈곤 극복 대책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3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 그리고 고용 불안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꿈을 감히 빈곤 극복이라고 정하자. 한국 사회의 놀라운 역동성이 빈곤 극복의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해봄 직하지 않은가? p. 304

 

빈곤 대책 프로그램 중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지역사회 구성원의 사회자본 형성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던 영국의 ‘동네 재생(Neighbourhood Renewal)’ 프로그램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국가 정책 수준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영토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하고 공통의 자원을 만들어내는 풀뿌리 정신과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빈곤 문제 해결의 가장 큰 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좋은 책이다. 책의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아 안타깝다. 많이 읽혀져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면 좋겠다.

사족. 읽으면서 놀랍고도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노숙인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노숙인 중 60%는 평생 가족을 형성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노숙인 중 30% 가량이 고아원 출신이고, 60% 가량이 결손가정이나 알코올 의존증 부모를 두었거나,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빈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더욱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만이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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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빠의 몰락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황해선 옮김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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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국가에서는 물질적 복지의 평균 수준 보다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정도가 치명적 폭력 수준을 결정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 윌슨과 바스데브- 이 책의 3장.

이 책의 요지는 주로 소득 분배의 불평등 심화가 양극화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재정, 복지, 행복 등 총체적 차원에서 중산층의 몰락(falling behind)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승자독식의 급여 구조가 전체 노동 시장에 확산되면서, 지난 30년간 대부분의 이자 및 배당수입이 소득분배의 상위 5%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질서에서 저자가 핵심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소득 분배의 불평등 문제가 경제적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 이른바 ‘지출 연쇄’라고 명명한 비효율적 지출 패턴을 야기시켜 중산층의 재정 압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출 연쇄’란 상위 5% 부자의 소득 증가가 사회 전체의 소비 참조틀을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모두가 손해 보는 지출 경쟁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구체화하자면, 부자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부자의 소비가 증가하고, 이는 중산층의 소비 참조틀에 영향을 주면서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지출 연쇄 발생하고, 중산층 가계의 재정에 압박을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4장 “무엇이 우리를 소비를 내모는가”에서 이러한 소비 패턴의 변화를 참조틀frame of reference’ 및 ‘정황context’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감정 보다는 소비자의 수요를 유발하는 일상적인 품질 판단의 원천인 context와 구체적 보상이 주어지는 상대적 지위에 대한 관심이 소비 패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소비에 대한 인간의 동기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며, 동시대 사람들의 핵심적 소비 동기는 상대적 지위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지위재, 즉 자녀교육, 가시적 소비, 옷차림과 같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소비(context에 가장 민감한 소비재)가 급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 패턴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재정적 압박 차원에 그치지 않고,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길어지고, 저축이 감소하며, 부채가 증가하고, 통근시간 증가, 수면부족, 공공서비스 삭감 등으로 총체적 몰락에 이르게 된다. 그는 정황에 민감한 재화에 너무 많이 지출하게 만드는 승자독식시장이 점점 더 확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진소득세 보다는 누진소비세를 제안한다. 누진소득세에서는 높은 한계세율이 저축과 투자의 동기를 약화하지만, 반대로 누진소비세에서는 높은 한계세율이 실제로 그런 동기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적절한 집’에 대한 사회규범이 달라지게 되고, 이는 지출 연쇄를 축소하여 중산층 가계의 재정압박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얼마 전 해외 지사에 근무하는 지인을 방문하고 온 한 친구가 들려준 얘기. 우리나라 기준으로보자면 상당히 호화스런 저택에서 살고 있는 지인을 부러워했더니, 그 지인 왈, 그 지역 한인들 모임에서 ‘어느 정도 사는 수준’이라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어울릴 수 없기에 과도한 월세부담을 안고라도 이런 저택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다는 게다. 요즘 중산층, 맞벌이의 몰락을 다루는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책들이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건 양극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사는 계층이라고 여겨지는 중산층 삶의 실제 모습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위기상황 혹은 사방에 낭떠러지가 있는 유사-위기 상황, 즉 언제나 몰락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그것을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의 총체적 상황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 ‘어느 정도 사는 수준’이라는 게 부자의 그것에 맞춰져 있고, 그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것을 쫓아가는 한, 우리 모두 몰락의 가능성이라는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소득분배의 불평등사회에서 누가 과연 이득을 볼까? 저자의 시각을 빌어보자면 우리 사회는 최상위층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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