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는 곳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기에 낭떠러지에 매달린 목소리가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내가 보내달라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으로 내리엮은 참바였다 나도 너처럼 혼자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너는 카메라 렌즈를 보았는가 렌즈 너머 나를 보고 있는가 카메라는 1초를 250등분하여 그 중 한 순간만 가슴을 열었다가 찰나를 닫았다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순간 너의 마음은 빛살이 되어 심안에 꽂혔다 사진에 박힌 마음을 뽑아 전하는 통신은 없다 그런대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눈구름보다 높은 성층권에 난대성 기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사진 속 너를 본다 너의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폭설을 건너서 너를 만나는 것이다 엊그제 마주 할 땐 보여주지 못한 용기가 너를 응시한다 너의 눈빛이 북채가 되어 16분음표로 고막을 난타한다 내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진 너머 가슴도 북소리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모른다 아마 통행이 금지된 한계령 겨울처럼 폭설이 쏟아지는 캄캄한 빙판일 것이다 그렇지만 길을 잃은 고라니 한 마리 쉴 곳을 찾아 가도록 별빛처럼 비추어 줄 것이다 쓸쓸한 그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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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나하고 간극이 없어서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

항상 새된 바람이 스며든다

 

물은 저들끼리도 간극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간극을 없애는 것이다

물은 처음 보는 어떤 누구와도 간극이 없다

 

강물은

간극이 없이 나를 스치고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더 좋다

간극이 없어도 오래 머물면

물비린내가 난다

내가 알고 있는 강물은 늘 청량했다

 

강물은 간극 없이 나를 품지만

햇살처럼 깊이 스며들 줄 몰라서

말리면 금방 바람이 된다

강물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어 좋다

 

흐르는 강물에 오래 담그고 있으면

등줄기까지 떨린다

서산 그늘이 수심 깊이 꽂힐 때면 더더욱 그렇다

너무 많은 작별을 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돌아가라 말한다

 

돌아가 홀로

쉴 곳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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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과속방지턱 하나 넘을 때마다

통증이 퇴원을 말린다

 

집주인이 병이 나면

화초가 먼저 앓아 눕는다

모두다 중심을 잃고 바스라져있다

볕을 향해 치켜세웠던 꿈

신음을 깨물고 부서진다

 

잎이 말랐다는 것은

뿌리를 다쳤다는 진단서이다

구급차에 실렸던 때

장막너머 냉기를 처음 느꼈다

뿌리로부터 전해지는 오한(惡寒)이었다

 

흘렸던 눈물 수위만큼

들통에 물을 받아 화분 체로 담근다

식물도 물 먹는 소리가 달다

줄기는 모두 수술해 주었다

부끄러운 회한(悔恨)을 접듯이

 

집주인이 견뎌냈던 시간이

뿌리에게 전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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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렸다

감정없이 전달된 암 선고

마음이 먼저 서리 맞은 호박잎이다

한철 뻗친 무성한 욕망들

생명을 탈색한 잎이 비명도 없이 흩어졌다

 

문득 돌아본 세상

벌도 나비도 없었다

끝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호박줄기에는 소금끼 있는

눈물 자국이 흰 얼룩으로 남았을 뿐이다

 

수술칼날 보다 차가운 상강(霜降)

동결심도(凍結深度)보다 조금 깊게

아주 조금 깊게 뿌리를 숨겨두었고

바람 속에 자란 줄기는

흔들리던 만큼 억센 심을 속으로 키워냈다

 

초겨울 잔광(殘光)의 쇠락한 온기로도

서리를 견디는 늦은 순()

녹색 호박잎 몇 장은

매일 떠오르는 시상(詩想)의 파편이다

 

결국 완성하지 못한 시처럼

자라다 멈춘 끝물호박

배꼽에서 차마 떼어놓지 못한 비틀어진 꽃

이루지 못한 꿈의 흔적이다

아니다 아직 놓지 못한 소망의 끄트러미이다

 

왜 서리를 맞은 막물 호박이 더 달지

왜 시는 저녁놀에 더 젖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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짊어진 행장(行裝)

너무 무거워

길 끝이 뿌여니 가물거리거든

평창강 강변에 서보라

 

오대산에서부터 굴러 내려

각진 구석 다 씻겨 내리고

거기가 생의 마지막 자리인양

먼지 더께 앉은 무수한 침묵

자갈더미 깊이 내려앉은 무덤 무덤들

 

뜨겁게 출렁이던 용암의 꿈

바래고 닦이길 영겁의 날

이제는 숨결마저도 식어

안으로 차갑게 응어리진 중심(重心)

 

여름 장마 격한 물살에는

미동조차 없더니만

늦가을 안개비에 스스로 젖어

짙어진 무게를 불쑥 실어보낸다

화상(火傷)으로 가득한 무늬

바위는 살아 얼룩진 흔적을

얼굴에 새겼구나

 

바위도 비에 스며야 제 색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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