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렸다

감정없이 전달된 암 선고

마음이 먼저 서리 맞은 호박잎이다

한철 뻗친 무성한 욕망들

생명을 탈색한 잎이 비명도 없이 흩어졌다

 

문득 돌아본 세상

벌도 나비도 없었다

끝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호박줄기에는 소금끼 있는

눈물 자국이 흰 얼룩으로 남았을 뿐이다

 

수술칼날 보다 차가운 상강(霜降)

동결심도(凍結深度)보다 조금 깊게

아주 조금 깊게 뿌리를 숨겨두었고

바람 속에 자란 줄기는

흔들리던 만큼 억센 심을 속으로 키워냈다

 

초겨울 잔광(殘光)의 쇠락한 온기로도

서리를 견디는 늦은 순()

녹색 호박잎 몇 장은

매일 떠오르는 시상(詩想)의 파편이다

 

결국 완성하지 못한 시처럼

자라다 멈춘 끝물호박

배꼽에서 차마 떼어놓지 못한 비틀어진 꽃

이루지 못한 꿈의 흔적이다

아니다 아직 놓지 못한 소망의 끄트러미이다

 

왜 서리를 맞은 막물 호박이 더 달지

왜 시는 저녁놀에 더 젖어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