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보시(報施)

 

                            엄 영 훈

 

논 서 마지기에 첩실로 팔려 왔다 한 칸 뒤란방에서 불편한 그림자로 서방 나이 두 배의 일생을 마쳤다 선산 먼발치에 묻혔는데, 긴 장마에 젖은 벽지처럼 축대 무너져 검푸른 곰팡이 같던 삶이 드러났다 햇빛에 흩어진 골편이 삼복에도 추위를 탄다

 

백골과 뒤엉킨 뿌리를 본 적이 있는가 앙상한 백골에 서리서리 감긴 구렁이 같은 뿌리 말이다 초점 빼앗긴 검은 눈구멍에서 못 본 세상을 마저 보겠다고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촉수 말이다 저승의 초입을 미리 본 듯 몸 떨지 마라 죽음의 알몸이 부끄럽다고 외면하지도 마라

 

뿌리는 반가웠던 것이다 뼛속 먼지 색깔이 너무 같다고 착착 감기며 포옹한 것이다 지상에선 잊어버린 두 생이 서로 등 도닥이는 것이다 원래 하나였다고, 가야 하는 곳도 같다고 함께 가며 동무하는 것이다 뿌리는 한 판 끝난 삶을 조용히 귀향시키고 있는 것이다

 

뿌리는 한 생을 푸른 잎에 실어 올리고 있다 바람, 흠뻑 즐기다 못해 티벳 독수리 날아오르듯 상승기류 타고 날아서 가라는 것이다

 

지상의 장례식은 산 자들의 축제지만 뿌리는 죽은 자를 위해 격식에 맞춰 보시를 하는 중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oonhoon2 2017-06-13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블로그 시 연재한 힘으로
시전문 계간지 <예술가> 여름호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졸시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성일 2017-06-1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단 및 예술가 신인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재주녀 2017-06-14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빈 그네와 마찬가지로 어둡고 습한 세계네요
지상에서 잊어버린 두 생 핵심일까요?
1, 2연은 슬프고 처절하고 무서운데 3연은 뭐랄까 홀로코스트가 연상되요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보여주던
어둡고 참혹한 곳에서만 보여주는 아름다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네요

hoonhoon2 2017-06-14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 그네 심사평 이어서
뿌리의 보시에 해당하는 심사평 올립니다
빈 그네 심사평과 함께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찬일교수님 심사평
뿌리의 보시에서도 적나라하다.
백골과 뿌리가 주요제재이다 백골과 뿌리가 서로 엉켜 있다.
삶인가?/죽음인가? 꿈인가?/생시인가?
역시 아폴론적 가상이 말하는 것과 같다

조병금 2017-06-1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밤에... 선생님의 시 세 편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윤슬을 읽으며
와수리 남대천변에 멱감고 나와 앉아 한 여름 땡볕도 신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훅 지나갑니다.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런 소식에 너무 기쁘고
멋진 삶 걸어 가시는 선생님께는 오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