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네

 

                                         엄 영 훈

 

겨울 빈 운동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난 빈자리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두가 돌아가면 비로소 찾아오는 사람이 있기에 그네는 자리를 비워 놓았다

 

텅 빈 교문에 이끌려 한 소녀가 운동장에 들어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네에 앉았다 소녀는 무심히 앉았지만 기다리며 늘어진 줄만큼 그네는 울렁거렸다 운동장에 차오르는 어둠에 발이 젖어서일까 땅을 차던 소녀는 신발 끝으로 그네를 밀어 조금 물러났다

 

발끝 쐐기를 풀자 그네는 직선 같은 짧은 호()에 소녀의 무게를 허공으로 실었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소녀의 눈에 물기가 출렁 넘쳐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묻었다 그네도 호의 가장 낮은 한 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지만 소녀의 가슴에서 오는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네 줄은 진동을 멈추었다

 

소녀는 다시 발끝으로 그네를 뒤로 밀었다 이번에는 까치발 끝이 닿는 힘껏 밀어 힘을 모았다 그네 줄은 팽팽한 반동으로 소녀를 밀어 올렸다 소녀는 한 손을 빼 줄을 잡았다 소녀는 그네의 활공에 고개를 들더니 두 손 다 줄을 잡았다 소녀는 땅을 차던 발끝을 가슴께로 높이 잡아당겨 그네에 마음을 실었다 그네의 예각은 이내 둔각으로 솟아올랐다 소녀가 가벼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무게를 벗어나 비상했던 소녀는 그네에서 폴짝 내려 손수건을 꺼냈다 안경을 벗고 마른 눈물자국을 꼼꼼하게 지웠다 무심히 내려다보는 별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만진 후 가로등 환한 거리로 나섰다

 

그네는 소녀가 떨구고 간 눈물의 무게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눈물을 날려 보낸 후에야 비로소 가벼워 질 수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는 심해처럼 어둠이 엉기고 빈 그네는 수초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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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06-1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가 좋던데, 신인상 당선작이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제주녀 2017-06-14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 세계가 있는 것 같네요 그네가 있는 어둠의 세계와 밖으 ㅅ밝은 세계
그네는 어둡고 무겁고 축축한 세계인 것 같아요
어둡고 무거운 것을 떨구고 가는 소녀의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그네가 하는 일이 빈그네의 마음을 찾으면 답이 될까요
이제 학교 그네를 보면 그네의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할 것 같네요

hoonhoon2 2017-06-14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 시는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닌데
아무튼 감사해요 읽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참고하게 심사평 올립니다

박찬일교수님 심사평
엄영훈의 <빈 그네>는 열린 형식(Offene Form)이 말하는 그대로이다.
주목되는 것은 맨끝에서만 열린 형식을 말하게 하지 않고
연 곳곳에서 열린 형식을 말하게 한 점이다.
빈 그네와 소녀가 주요 제재이다
등장인물은 소녀뿐이다
소녀의 거동은 조화와 절제 균형의 형식미를 떠올리게 한다.
삶에 대한 아폴론적 잔잔한 반주를 말하게 한다
소녀가 삶을 견딜 만한 것이고 참을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작 <빈 그네>는
<세계 현존은 오로지 미적 가상을 통해 정당화 된다>는
명제를 구체화시켰다
엄영훈의 <빈 그네>는 삶에 대한 아폴론적 잔잔한 반주다

hopemam 2017-06-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시가 너무 좋아요~! 제대로 읽고 싶어서 시험 끝나고 이제서야 봤는데 뭔가 중학교 때가 생각나네요ㅎㅎ 은퇴하시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모습을 응원합니다ㅎㅎ 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