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엄 영 훈

 

학교 가는 외길 오른쪽에 그 집이 있었다 토해 낸 양잿물 냄새는 비 맞은 개 비린내처럼 역했다 까만 바지 계집애가 무늬 삭은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방문을 지켜보는데 겨울 밭에 얼어있는 대파 외줄기 같았다 높은 신음은 짐승 소리였고 낮은 신음은 풀숲을 기어오던 구렁이였다 신음에 끊기는 애원은 문장이 되지 않았지만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갈라진 여자 목소리는 계집애를 부르고 있었다 제발 죽여달라고 빨리 죽여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신음에 뒤통수를 맞으며 잰 걸음으로 학교로 달아났다 신음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낮은 신음만 흙벽 구멍 난 수숫대 사이로 간간이 기어 나왔다 계집애는 아침처럼 방문 앞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빈 포대기를 허리에 두른 채 이남박에 든 것을 먹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먹고 있었다 누가 건네준 늦은 아침인지 이른 저녁인지를 허겁지겁 퍼 넣고 있었다

 

바람은 신음을 더 전하지 않았다 등굣길에 계집애도 보이지 않았다 빈집을 지날 때마다 가슴에 서늘하게 차올랐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고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삼동에 시든 햇살은 눈구름을 통과하며 바늘로 변해 대기에 부서져 흩날렸다 겨울나무는 진창에 발목이 잡힌 채 시커멓게 언 살을 패이며 맞바람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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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신 부처

 

                                                         엄 영 훈

 

이미 전신으로 퍼졌어요 그냥 덮어야겠어요 의사는 푸른 마스크에 감정을 가리고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 아들은 벗을 수 없는 짐이 무서워 말로 털어내려 하였다 회복실에서 마취가 풀리며 아들 눈을 찾은 엄마는 미소부터 지었다 대장부가 울면 쓰나요 난 괜찮아요 서른이 넘은 아들은 아직도 이불을 더럽히는 오줌싸개 도련님이었다 링거 바늘이 꼽은 손이 아들 체온을 쬐고 있었다 엄동 강변 얼음구덩이에서 한 광주리 빨래를 마친 손이었다 난 괜찮아요 어디 병원 앞에 가서 맛있는 거로 요기해요 삶의 경계에서도 모정은 탯줄에 매달렸던 새끼의 허기를 먼저 알아챘다

고량주는 말똥말똥한 각성제여서 회복실을 떠멘 귀갓길은 롤링과 피칭이 함께 오는 풍진 뱃길이었다 떨쳐지지 않고 따라오는 그림자를 향해 오줌을 갈겼다 눈 위에서도 그림자가 짙은 것은 보름달을 등진 자세였기 때문이다 제 그림자에 검은 총알구멍이 드르륵 뚫렸다 눈물로 막힌 속도 뒤집어내고 일어서다 보니 부처의 얼굴이 하필 거기 있었다 이목구비가 없는 등신이었다 불쌍한 중생에게 다 내주고 알몸뚱이 형상만 남은 머저리였다 천불산 모퉁이에 그냥 누워있지 팔다리도 없는 몸으로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허벅지 살 한 점 베어내지 못하는 놈의 오줌 배설물을 받아 뒤집어쓰려고 길가에 그렇게 오도카니 서 있었던가 고개를 반가사유상 각도로 기울이고 낮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줌 줄기가 백호와 두 눈을 토사물이 두상을 완성했다니 술값이 맺은 업이었다

솜씨 없이 빚은 눈사람에게서 차가운 손이 뻗어 나왔다 새끼의 머리칼을 쓰담쓰담 흐트러뜨리며 불길을 삭혀주고 있었다 꿰맨 수술자리보다 새끼의 마음이 더 따가운 바늘이 되었던가 오물속 등신부처가 가래 가랑가랑한 소리로 난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달빛처럼 환한 얼굴 셋이 겹쳐 갸웃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공을 가득 채운 달빛이 방금 벼린 칼날로 쏟아져 가슴을 빠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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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立冬) 풍경

 

만추(晩秋) 품은 동강 어라연을 뒷강물이 밀어내고 있다

목에 감긴 찬피동물 옷깃 새로 으슥하게 기어든다

 

일 년을 밥 준 길고양이가 젖 뗀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왔다

앞구르기 가르치더니 밥그릇 물려주고 의연하게 떠났다

말리지 못한 입동(立冬)도 짠하다

 

나뭇가지에 알집 슬어놓은 사마귀, 서리 죽창에 꽂혔다

영정사진은 뒤집혀 숙연하다

 

달팽이 빈 껍질은 하마 바람구멍이 숭숭 났다

햇볕이 쓰다듬자 구름도 거들고 있다

명 끊긴 삭신을 재촉하고 있다

 

숲속에 빈 둥지 깃털 구르고 있다

하늘로 터 옮긴 겨울새는 한층 더 가벼워졌겠지

 

높바람 가뿐히 올라 탄 낙엽, 검버섯 알몸으로 겨울 따라나섰다

허공에 이는 파도 어디로 닿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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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에 만난 꽃은

                                             엄영훈

 

소설(小雪)에 만난 꽃은 한난(寒蘭)이 아니다

홍옥 가지 끝에 연분홍이 사과꽃으로 붙었다

 

꾸짖지 마라 절기마저 초탈한 미련퉁이

무명(無名)이 한스러운 거다

 

귀동냥으로는 모른다

달빛마저 쪼개는 북풍한설

칠흑을 삭이는 일경다화의 청향

 

열매가 뭔 대수일까

서릿발 개화의 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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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왔다

 

                                                             엄 영 훈

 

일곱 살 소년은 배나무에 얹힌 새 둥지를 털었다 할딱거리는 어린 생명을 솜 둥지 만든 종이상자에 넣었다 조바심으로 종지 씻어 샘물을 먼저 넣어주었다 밥알도 먹여보고 배추벌레도 입에 물려주었다

 

그것은 졸린 눈 희끄무레한 새벽빛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더라

가는 목 꺾인 채 멈춘 숨인데도 시나브로 다가오더라

시퍼렇게 날 선 칼로 가슴을 알알하게 폭폭 찌르더라

핏방울 가슴 위에 쿵쿵 떨어지며 오는 파동이더라

썰물처럼 피 쫙 빠져나간 혈관을 다시 채우는 얼음이더라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천으로 얼굴을 덮어씌우더라

 

죽는다는건몸이차가워지는건가한번날아보지도못한어린새도죽는건가죽으면다시물릴수없는건가어미를애타게찾던마음은대체어디로가는건가

 

그것은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어미 새 부리에 맺힌 피멍울이었다 잊기를 기도하며 얼른 땅에 묻었던 차가운 눈물방울이었다 그 자리에 낙엽 다시 덮이기를 육십 번 저절로 무거워만 지는 그림자였다

 

그것이 썩어가며 피우는 냄새는 형사미성년자인 일곱 살 때 미필적 고의로 새 새끼를 죽였던 일곱 살 빨간 코 끝에 차갑게 묻어 처음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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