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겨울 내의에 쏟아지는 살비듬처럼

나도 모르게 지게 하소서

계절이 지나도록

그악스런 손아귀 풀지 못해

나무에서 모진 서리 맞게 하지 마소서

지금 진다고 세상을 버리는 건 아닙니다.

할 일 마쳐 자리를 비워 줄 뿐

다만 간절히 기도하건데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신앙만은 주소서

 

어느덧 가녀리게 말라붙어

산들바람에도 지를 외마디 부끄럽게 하소서

첫 출항 부풀은 오색 돛으로

바람, 그 바람을 온 마음 받아들이게 하소서

떨어지는 잎에선

귀향의 설레임 검버섯 꽃으로 피어나

누울 자리와 벌써 한 빛깔

 

이승의 질긴 인연

잎자루 떨쳐내 나무엔 여린 상처

겨울 내내 찬바람이 곯려대겠지만

한 낮엔 그래도 추억같은 햇살이 어루만져

그렇게 한 철 아픔으로

잎눈 다시 무성한 소망할테니

 

발길 재우치는 첫서리 희게 바삭이면

기도는 하나뿐

등뼈 꾸부려 가볍게 부푼 목숨

바람이

조용히 거두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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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은

겹겹으로 꽃잎 올린

화려한 욕심이 부끄러워

무성한 잎 속에 숨었다

 

 

작약은

줄기에 지탱할 만큼만

꽃봉오리를 올리고

무성한 포기의 정점 한 뼘 높은 곳에서

하늘을 향해 터뜨린다

흰 꽃은 넘실거리는 초록 햇살에 몸 띄우고

바람 뒤쫓으며 몸을 흔든다

 

한해살이 삶이란

미련부터 줄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움켜쥔 손을 비워야 몸부터 가볍고

하얗게 속부터 비워내야 홀가분히 떠오를 수 있다

개화가 잠깐인 것처럼

삶의 절정도 순간이란 걸 지레 깨달았다

바람에 넉넉하게 흔들리고 있으면

낙화가 적시에 올 것 같은 예감도 있다

풀꽃 한살이의 종언은

꽃잎이 피는 순간부터인 걸

내림으로 터득해 슬프지도 않다

 

 

오월 한낮

바람은 먼 곳에서 불어도

꽃잎은 시간 맞추어 그늘에

조용히 몸을 눕힐 수 있는 것이다

 

 

산작약은

꽃색만 산마루 너머 구름을 닮은 것은 아니다

진녹색 무게를 허물벗고

가볍게 몸을 띄우는 모습이 닮았다

바람에 홀리는 것도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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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모란은 만개를 보여주지 않았다

 

오월이 되면

시인이 새로운 시상에 설레듯

너의 개화를 꿈꾸었다

티끌 같던 설렘이 주먹만큼 단단해 지면

꽃받침을 비집고 보이는 속치마 끝자락

 

그러나 모란이 필 무렵이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폭풍이 몰아쳤다

물에 젖은 습자지 같은 화관

밤새워 쓴 시처럼 남루했다

 

너는 왜 완벽한 개화를 거부하는가

나는 왜 목까지 숨이 차오르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가

누구도 표현하지 못하는 너만의 향기

어떤 시인도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색깔

 

평생 시를 내려놓지 못하듯

꿈을 단단히 움켜쥔 자는

다시 한 번 절정의 개화를 위해

흰 종이 조화처럼 구기며 새벽을 맞는다

 

우리가 찾는 영원한 것

사진에 박히는 찰나의 장면이 아니라

옛 사진 속 빛바랜 그리움 같은 것이고

모란의 만개를 다시 한 번 꿈꾸게 하는 힘이다

 

많은 밤을 혼자 견디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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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 꽃씨 하나
바람에 날려 풀숲이 품었다
모래알보다 작은 알갱이
생명이 있기는 할까
설레며 숨 감추고 있다


천성이 낯가림이 심한 걸까
바람 불어서 일까
비름나물 깊은 뿌리
자리 넓은 엉컹퀴 잎
그늘 짙으면 잠만 잔다
욕망 무성한 녀석들 뿌리까지 쳐내야
햇빛 비추고
성수 같은 실비로 축성 받아
비로소 기지개 켠다


재촉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마음 단장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도 줄일 수 없는 준엄한 시간
스스로 속 가득 채워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껍질 터지는 순간
땅거죽 들썩이는 심장고동 들리느냐
모든 출산은 숨죽여야 하는 엄숙한 것이다


이 티끌은 무수한 씨앗 품고
그 씨앗들 다시 꽃 피워
눈 시리게 벅차오르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꽃씨 눈 뜨는 걸 보면 모두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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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자리 잡은 전원주택
폭설 쏟아져
전화마저 불통인 외딴 섬 같다
어두운 밤새 눈이 내린 것이 아니라
짙은 눈보라가 어둠을 몰고 왔다
별빛이 눈 위에 뿌려졌으나
두꺼운 냉기에 사위어들고 있다
눈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방음벽처럼 소거했다
카지노로 가는 38번 국도엔 바람이 흔적도 없다
퇴역병 외등 두엇이 눈을 뒤집어쓰고
정지된 휴게소에 불침번을 서고 있다


넉가래로 눈을 치우며 길은 튼다
눈 쏟아진 3만 년 전 새벽의 혈거인도
잠에서 깨어나면 제 불씨 살리기 전
이웃 동굴까지 먼저 길을 냈을 것이다
넉가래는 꼭 사람 하나 만큼의 너비다
첫새벽엔 왕복 길을 낼 겨를이 없어서이다
사람보다 먼저 마실 다닌 발자국
산토끼도 이웃이 궁금했나보다


눈을 치워 길을 낼 때 네 동작이 필요하다
초등학생 보건체조 하듯
온몸에 힘을 뺀 체 넉가래를 뒤로 젖혀
헛동작은 없게 깊이 밀어 넣고
허투루 없이 눈을 푹 떠서
마음 비우듯 옆으로 던진다
이음새 없는 네 박자가 매듭 없는 길을 연다

 
벙거지에 김이 오른다
갓 구워낸 고구마다
그래 이 길로는 군고구마 따끈함이 가고
지짐이 기름 냄새도 묻어올 게다
눈을 치우며 마중 오는
이웃집 발자국도 네 박자다
조바심으로 꼬리치던 강아지가
친구 부르며 내달린 반가움을
눈 위에 먼저 남긴다


햇귀에 드러난 흙이
홍조 띄며 습기를 머금고
겨울을 견디고 있던 냉이의 초록이 햇살을 반긴다
네 박자로 눈 치워
길을 트는 동짓날 아침은
코끝이 쨍한 채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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