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손발의 힘이 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행위의 일보 직전에 있었던 나는, 그곳으로부터 훨씬 멀리 물러나 있었다. "나는 행위의 일보 직전까지 준비했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행위 그 자체를 완전히 꿈꾸었고, 내가 그 꿈을 완전히 살았던 이상, 더 이상의 행위가 필요한 것일까? 이미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가시와기가 말한 것은 아마도 사실인 듯하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행위를 모방하려는 인식도 있다. 내 인식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행위를 완전히 무효로 만드는 것도 이런 종류의 인식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오랫동안의 주도면밀한 준비는, 오로지, 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최후의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266-267쪽

호주머니를 뒤지니, 단도와 수건에 싸인 칼모틴 병이 나왔다. 그것을 계곡 사이를 향하여 던져 버렸다. 다른 호주머니의 담배가 손에 닿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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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덮고 보니 총 쪽수의 거의 반이 포스트잇. 후- 아름다움의 극치, 영원한! 미숙함이 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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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마녀재판의 중세? 이 시대에 읽으니 이상향 같다. 정의와 양심이 제 역할을 하는, 작가의 따뜻한 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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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4-01-1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다치 마사카쓰, <왕의 목을 친 남자>가 마침맞은 논픽션 짝꿍이로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 정신분석학, 남녀의 관계와 고독을 이야기하다
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절판


사랑은 단지 말로 표현되는 것만이 아니다. 모든 말이 사랑의 요구인 만큼 사랑은 그 자체로 말이며,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헛수고」에서 남자들은 하루 종일 여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실제로 여자들을 만나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이것은 남녀관계를 주제로 한 희곡이지만 실제로는 일련의 말놀이의 확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치 그런 말놀이가 실제 연애관계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이 희곡에서 남자들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연인의 담론’을 생산하는 행위이자 사랑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문서화 작업을 경유하는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실상은 이런 경우 단지 사랑을 선포하는 과정 자체일 뿐이다.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말에 의해서 생산되는 듯 보인다. -102-103쪽

한 여성이 친구인 남성에게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아내가 아침에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는 모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이것이 터무니없고 실망스러운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파트너의 밝은 성격을 들먹이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현실적이다.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작은 세부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점은 매우 감탄할 만하다. 이 남자의 아내가 버터를 바르는 방식이 어머니의 방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세부의 어리석음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에 관한 한 전부이기 때문이다.-172-173쪽

도취는 흠 없는 이미지를 향하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상처 입은 이미지에 말을 건넨다.-178쪽

사랑은 라캉이 말하듯이 궁극적으로 결핍에 건네지는 것이다.-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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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1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것은 세부의 어리석음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에 관한 한 전부이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에서 '사랑'을 '소설'로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에 드는 소설은 모두 그렇죠.

에르고숨 2014-01-12 22:36   좋아요 0 | URL
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소위 '큰' 작품이 아닌데 완전 '취향'인 소설 같은 거 말이죠. 밑줄긋기 따위 아무도 안 읽으실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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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불안, 공포, 그리고 삶의 의지마저도 내 속에서 모두 꺼져버렸다. 완전히 사그라져버렸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주입하려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 믿음들을 던져버렸다. 그러자 독특하면서도 안락하고 기분 좋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죽음 이후에 그 어떤 희망도 갖지 않음, 이것이야말로 내 최대의 위안이 되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고, 절대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일생 동안 내가 살아온 이 세상에 단 한 순간도 익숙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또 다른 세상에서 적응해나갈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은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132쪽

다음 생에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두려울 지경이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구역질나는 세상과 인연이 없었다. 비루하고 역겨운 얼굴들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세상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미련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다니, 신은 허풍쟁이, 사기꾼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만약에 내가 다시 태어나 삶을 한 번 더 통과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 지각과 감각이 훨씬 더 무디고 둔감해져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래야만 힘들이지 않고 호흡할 수 있을 테니까.-133쪽

그러나 1951년 4월, 스위스에서 체류 비자 연장을 거부당한 뒤, 헤다야트는 파리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했다. 그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그는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죽기 직전, 쓰고 있던 원고를 자기 손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옮긴이의 말)-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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