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씨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14
요제프 라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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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이런 동화가 좋더라구요. 요즘 녀석들이 하는 말을 흉내내본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뭔가 어른스럽게 말하고 싶을 때는 ~라구요 란 말을 끝에 붙이곤 하는데 듣고 있으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우리 나라 작가들이 많이 쓰는 너무 사실적인 동화보다는 엉뚱하고 기발한 이런 동화가 훨씬 재미있다. 내가 낄낄거리며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들은 참 신기하다는 듯이 또 그 짓이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 하고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책은 내용은 저학년에 맞는 내용이지만 저학년이 보기에는 글자가 제법 빽빽해보이는 책이라 4학년 정도는 되야 부담갖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세상 물정에 닳을대로 닳은 녀석들은 이런 책들의 순수한 묘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나름대로 꽤 영리하다고 생각되는 아이들도 이야기 자체에 푹 빠져 읽기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평가해버리곤 한다. 그냥 재미있게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을 따라 읽어가면 좋을텐데 이런 걸 억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상상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어쨌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너도밤나무 오두막에 여우 한 마리가 들어온다. 너도밤나무 오두막에 사는 산지기 보비누시카 씨가 숲에서 어린 여우 한 마리를 주워온 것이다. 산지기의 딸 루젠카는 이 여우를 너무 사랑하여 책도 읽어주고 글씨도 가르쳐준다. 이 여우는 아무도 모르게 사람의 말을 따라하고 심지어 읽기 쓰기까지 완벽하게 배운다. 여우는 루젠카가 읽어주는 동화 속에 나오는 여우들처럼 멋진 여우로 살고 싶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우 씨(이쯤에서 우리는 여우 씨로 부르기로 한다. 이젠 꼬마 여우가 아니라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어른이므로)는 숲으로의 가출 아니 출가를 결심한다.

  출가한 여우 씨는 숲 속에 있는 동굴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문명을 경험한 여우에게는 너무 초라하고 깨끗하지 못한 곳이긴 하지만. 여우 씨는 배가 고프지만 문명인이므로 사냥을 할 수는 없다. 숲 속을 다니던 여우 씨는 또 다른 산지기 브제지나 씨가 사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브제지나 씨의 헛간에서 몰래 가져온 탁자에서 마침 여우 씨는 소시지 두 개를 얻는다. 여우 씨는 맛있는 소시지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여우 씨는 브제지나 씨의 오두막을 기웃거리다가 전화로 소시지를 주문하는 브제지나 씨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흉내내어 전화로 소시지를 주문하기도 하고, 고깃간 주인을 속여 소시지를 두 개나 훔쳐 오기도 하고, 고깃간 주인이 잃어 버린 돈을 찾아주고 소시지를 얻기도 한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여우 씨는 사람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아직까진 멋진 여우로 살아갈 기회가 찾아온 건 아니다. 드디어 여우 씨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엉뚱하게 아니 뚱뚱하게. 웬 뚱뚱하고 땅딸막한 남자가 숲 속에 함부로 들어온다. 여우 씨는  생각한다. 이 땅달보 녀석은 숲 속에 몰래 들어와서 사냥을 하거나 버섯을 따가려는 게 분명하다. 여우씨는 다짜고짜 땅달보를 쫓아낸다. 그리고 여우 씨는 이 숲의 주인인 영주님께 편지를 쓴다. 위의 행동을 증거로 자기는 훌륭한 산지기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여우 씨의 훌륭한 자질을 직접 목격한 땅딸보 아니 영주님은 여우 씨를 산딸기 언덕의 산지기로 임명한다. 거기다가 산지기  만이 살 수 있는 멋진 오두막도 준단다. 전용 요리사까지. 여우 씨는 산지기만이 입을 수 있는 유니폼에다 나무총(진짜 총은 위험하다며 여우 씨가 사양한다.)를 매고 산지기로서의 폼나는 삶을 시작한다. 산딸기 언덕에 가면 세상에서 제일 멋지게 사는 여우 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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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산 대교북스캔 클래식 5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오현수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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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깔스럽고 수다스럽다 못해 왁자지끌한 내용에 비해 제목이 너무 평범하다. 원제도 이런가. 사실 책장에 몇 달 동안 꽂혀 있는 걸 보고도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별 재미없으리란 인상을 받았다. 물론 내가 너무 좋아하는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빨간 머리 앤은 책보다는 만화를 너무 좋아했다. 대학생이 되고 그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고 나서도 유선방송에서 빨간 머리 앤을 방송할 때는 시간을 기억해서 꼭 보곤 했다.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뭔가가 있다. 앤이 아저씨와 마차를 타고 오면서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모습, 초록지붕 집 창문에 턱을 괴고 꽃이 만발한 들판을 내다보던 모습, 앤이 말라깽이 소녀에서 숙녀로 점차 변해가는 모습, 아저씨가 들판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던 모습은 지금도 가슴 아프고, 의젓한 처녀 총각이 된 길버트와 앤의 모습 등 기억나는 장면들이 끝이 없다.

  몇 년 전 참 많이 슬펐었다. 그때 빨간 머리 앤을 책으로 보면서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많이 흘러가긴 했지만 작가의 말투가 앤의 말투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은 수다스럽고 핵심을 찌르는 정확한 표현하며. 이야기 전개가 경쾌하게 흘러가는 거 하며.

  이 소설은 작가가 자라난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작가가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인물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물론 처음에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 때문에 누가 누군지 헷갈리지만 대충 인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면 그 인물들의 개성이 확실히 드러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일지라도 절대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성격은 없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다크 집안과 펜할로우 집안은 대대로 결혼을 통해 끈끈하게 묶여져 있다. 그들 끼리는 때로는 아니 자주 서로 다투고 헐뜯을지언정 다른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험담을 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그들 가문의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베키 아주머니가 접견하례를 연다. 여든이 훨씬 넘은 베키 아주머니가 일족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기 위한 자리다. 다크 집안 사람들과 펜할로우 집안 사람들이 속여 모여들고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다크 단지"를 누구에게 물려줄까 하는 것이다. 그 단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로 보기에는 흠이 있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그 단지를 소유한 사람은 두 가문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다. 뭐 그렇다고 그 단지를 소유한 베키 아주머니가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하지만 여든이 넘은 베키 아주머니의 그 당당한 언행은 이 단지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베키 아주머니가 단지를 가질 욕심으로 참석한 사람들에게 죽은 뒤 남길 소소한 물건들을, 받는 사람들의 의향과는 아무 상관없이 물려주고(여인들이 그렇게 바라던 다이아몬드 반지는 베키 아주머니의 하녀에게 돌아간다. 이 결정으로해서 그녀가 인자하다든가 그런 오해는 하지 말기를. 어쩌면 낙심에 찬 여자들의 모습을 즐기기 위해 그런 결정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기다리던 유언이 공개된다. "단지는 이 섬에 사는 일족 중에서 결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으며, 쓸데없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나 입이 거친 사람이나 술과 친구하는 사람 등등은 가질 수 없다. 단지의 주인은 베키 아주머니가 죽은 일 년 후에 발표된다." 접견하례가 있은 얼마 후 베키 아주머니는 일족의 공동묘지에 묻힌다.    

  단지를 차지 하기 위해 욕설을 통해 인생의 참다운 재미를 맛보던 존 (나름의 이유로 익사자 존으로 불린다.)은 욕설을 그만두고, 일보다 깽깽이 켜기를 즐기던 크리스펜할로우는 1년 동안 깽깽이 켜기를 그만두고, 아내의 죽음으로 자살을 결심한 템페스트 다크는 자살을 유예한다. 섬 바깥에서 살던 일족이 결혼을 위해 하나 둘 돌아오고, 평생 결혼할 마음이 없던 페니퀵 다크는 노처녀 마가렛 펜할로우에게 청혼을 하고, 밀러 다크는 그동안 흐지부지 했던 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1년 안에 마무리지을 결심을 한다.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가슴졸이며 결말이 궁금해지는 사랑 이야기도 한두 건이 아니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인 것이다. 일족 중에서 가장 젊고 예쁜 가이와 일족이 탐탁찮아 하는 다른 성을 가진 노엘과의 사랑에다 가이를 약올리기 위해 노엘을 유혹하는 낸과 키다리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언제나 가이 곁에서 지켜주는 로저의 사랑도 지켜볼 만하다. 결혼한 그날 첫날밤도 치르기도 전에 드레스를 입은 채로 친정으로 돌아와 버린 조슬린과 그런 아내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10년를 지내온 휴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만하고, 평생을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베키 아주머니의 접견하례가 있던 날 평소에는 그렇게 미워했던 전쟁 미망인 도나를 한순간에 사랑하고 만 피터의 이야기도 끝까지 흥미있게 지켜볼 만한다. 사실 누구도 내가 주인공이라고 나설 수 없는 입장이므로 그냥 마음 끌리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여기고 읽으면 된다.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노처녀와 노총각은 결혼을 하게 될지 단지는 누구에게로 돌아갈지 미리 말하지 않겠다. 미리 알면 재미없으므로. 사실 단지의 최후는 예상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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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
필립 K. 딕 외 지음, 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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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실린 단편들은 그동안 읽어왔던 SF단편들에 비해 뛰어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단편집을 읽다보면 훌륭한 작품이라고 인정 받은 작품들을 싣기 때문에 중복되는 단편이 더러 있는데 그나마 이 작품집(2권)은 내가 읽은 단편들과 중복되는 작품은 없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편만이 지니고 있는 긴장감이랄까 압축미랄까 이런 것들이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다. SF장르지만 어슐러 르귄처럼 문학적인 향취가 나는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괜찮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첫번째로 실린 여신 마이라, 센 옌 바보와 천국의 군대, 고스트의 기준 등이다.

  '여신 마이라'는 벨신이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이 행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이 행성에서만 나는 엘돌린이라는 진통제를 채취하기 위해 지구로부터 보내어진 몇몇 사람들만 살아가는 행성이다. 주인공 마이라는 엔돌린 없이는 단 몇 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부유한 집안의 상속녀이다. 그녀의 남편 에드워드는 엔돌린을 채취해서 지구로 보내는 일의 책임자이며 엔돌린으로 인해 점점 건강해져가는 아내를 죽이려는 인물이다. 어느 날 마이라와 에드워드는 절벽에 있는 난초를 보기 위해 드라이브를 떠난다. 에드워드는 계획했던 대로 마이라를 절벽에서 밀어뜨리려는데 마이라는 이미 남편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다. 하지만 마이라는 결국 절벽으로 떨어지고 에드워드는 사고사로 위장하여 혐의를 벗어나게 된다. 그는 이제 부유한 독신남이 된 것이다. 그런데 행성의 일부인 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은 아내 마이라의 목소리였다. 마이라는 죽지 않았다. 비록 육신은 절벽에서 찢겨나갔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 행성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녀는 행성을 둘러싼 고리로 에드워드를 볼 수도 있었고 작은 힘만으로도 지진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엔돌린(엔돌린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행성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은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며 엔돌린을 채취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너만 이 행성에 남아 있으면 돼. 그러면 난 너를 위해 담배를 재배할 것이고 식량을 만들어낼 거야. 넌 나를 위해 책을 읽어주고 음악을 틀어줘. 

  '센 옌 바보와 천국의 군대'는 기독교의 텔레비전을 통한 전도와 프로 레슬링 중계를 결합하여 풍자한 작품이다. 수많은 광신자들의 함성 속에 전도 레슬링이 시작한다. 멋진 얼굴과 몸매한 천사역에 어울리는 선수와 누가 봐도 악마역에 어울리는 외모를 한 선수가 링에 오른다. 악마역의 선수가 천사 역의 선수의 팔(진짜 팔처럼 보이는 인공 팔이다.)을 부러뜨리면 관중들은 흥분해서 고함을 지른다. 그때 천사 역의 선수가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로 악마를 물리친다. 하느님의 승리로 관중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악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실은 악마의 역할을 충실히 한 후 계약한 돈을 받아갈 뿐이지만. 물론 이 경기를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 센 옌 바보 때문에 벌어지는 마지막 반전도 볼만 하다.   

  '고스트의 기준'은 짧은 콩트이다. 우주선이 난파되고 겨우 갈아탄 구조선에 인간인 키드, 인간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갑각류인 투에추침 (이들은 서로 언어가 통하며 똑같이 프로그래머이다.), 컴퓨터 말콤 투비스 이렇게 세 존재가 있다. 문제는 구조선에는 식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던 행성에서는 하등존재인 갑각류를 먹을 수 있었고, 갑각류인 투에추침이 살던 행성에서는 영장류를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하므로 그들은 게임을 한다. 컴퓨터를 심판관으로 해서. 물론 게임에서 이긴 쪽이 진 쪽을 먹을 수 있다. 고스트라는 게임인데 낱말 맞히기 같은 거다. 컴퓨터의 교묘한 편가르기로 결국 갑각류인 투에추침이 인간의 먹이가 된다. 그들의 구조선이 구조된 후 그들은 재판을 받게 된다. 광범위한 우주 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인 만큼 다른 종이라고 하더라도 지능이 있는 개체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법이 마련된다. 인간인 키드에게는 약간의 벌금 형이 부과 되었고, 인간의 식인 행위를 도운 컴퓨터에게는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외에 영화배우 빌리 크리스털이 쓴 지구 방송국 찰리는 새로산 텔레비전을 통해 이웃집을 몰래 들여다보게 된다는 내용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 같기도 했다. 다른 작품들도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면에서는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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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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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이다. -본문 중에서-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  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 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 본문 중에서 -

  이 말의 의미가 뭘까.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든 총을 쏘는 행위든 대상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저 나에게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사람(타인)은 나처럼 말하고 웃고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익명의 존재로 여겨질 따름이라는 것. 미국이나 서양의 사진작가들은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는 반면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저곳이라고 생각되는 나라의 사람들을 찍을 때는 참혹한 시신의 얼굴 모습까지도 노출시킨다. 사진 속 그들은 저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가진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의 불행한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얼굴이 없다.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전쟁의 이미지는 넘쳐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텔레비전 그리고 사진은 전쟁을 고발하는 대신 뉴스로 이미지로 재해석해서 전쟁을 팔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나 신문 구독자는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구경한다. 아주 잠깐 사진 (혹은 텔레비전) 속의 참혹한 모습에 동정심이 일긴 하지만 신문 넘기는 그 순간 우리는 곧바로 어제의 축구 게임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가십 같은 흥미거리를 찾아낸다. 전쟁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들일 뿐이고 전쟁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타인들일 뿐이다.

  때로 진실은 불편하다. 수잔 손택은 바로 이 당혹스럽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녀는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제 집 안방에서 스위치 몇 개로 전쟁을 지휘하고 텔레비전은 이라크 상공에서 떨어지는 폭격을 무슨 영화를 방영하듯 중계한다. 하지만 폭격을 당한 이라크 사람들의 고통스런 모습과 전쟁 중에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미군의 모습은 철저히 숨긴다. 전쟁은 먼나라에서 일어나는 스펙터클한 영상 이미지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진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아닐까. 오늘은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테러에 관한 뉴스를 보았지만 내일은 또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접할 것이다.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한 장의 고발 사진이 전쟁이나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전쟁이나 폭력이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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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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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란 암기과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달달 외워야 하는 과목. 하지만 나이를 먹고 조금씩 시야가 넓어질수록 역사나 세계사가 다른 무엇보다 재미있는 영역란 걸 깨닫게 된다. 만약 학생시절에 이 책의 저자처럼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좀더 일찍 역사에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말히기 전에 꼭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재위 시절은 노론의 세상이었다. 노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왕으로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미천한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장희빈을 왕후의 자리에서 쫓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소생의 연잉군이었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 행위였다. 노론은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추대하고 허약한 경종대신 연잉군을 대리청정하게 한다. 경종 재위 4년, 연잉군은 식사도 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다. 연잉군은 의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린다. 그 후부터 경종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연잉군은 인삼차를 마시면 죽을거라는 의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경종에게 인삼차를 올린다. 얼마 후  결국 경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연잉군 훗날의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영조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의원이 상극이라며 말리는 음식을 올렸는지는 영조 자신만이 알 뿐이다. 

  영조는 노론이 선택한 왕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노론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신하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연유로 탕평책을 실시했고 소론을 정사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노론의 힘은 영조가 억누르기에는 너무도 강했고 그때마다 영조는 의원의 진맥을 받지 않거나 왕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정치적인 쇼를 하며 노론의 기를 누른다. 또한 자신은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사실을 내보이기 위해 양위를 하겠다는 정치적인 쇼를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결국은 아들 세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재위 11년이 되어서야 태어난 아들이었다. 세자는 태어난 당일 원자로 책봉될 만큼 노론 소론 모두의 축복을 받았다. 영조 또한 총명하고 늠름한 풍모의 세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이 책에서의 사도세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신병적인 모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보였던 아버지 영조와는 다르게 감정적이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기를 즐기며 또한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효종처럼 북벌을 꿈꾸었던 큰 풍모가 느껴지는 인물로 나타난다. 저자의 편애인지 이것이 사도세자의 본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론은 세자의 이런 모습에서 어떤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는 노론의 편이 아니었다. 그 예가 나주벽서사건인데 내용의 골자는 노론의 집권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탕평책을 버리고 완전한 노론의 왕이 된다. 노론과 영조는 이들의 주범을 엄하게 처벌하자는 쪽이었고 세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세자는 소론의 편에 서 있었다. 노론이 보기에 세자는 위험한 인물이다. 노론은 세자를 제거할 계획에 들어간다. 불행하게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도 혜빈 혜경궁 홍씨도 노론이었다. 사위나 남편의 안위보다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이 먼저인 사람들이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나경언이란 인물을 사주하여 세자를 음모하는 투서를 쓰게 한다. 투서의 내용은 왕 가까이 있는 인물 즉 세자가 변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영조는 이를 계기로 세자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미 그때 영조에게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일 뿐이었다.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조차도 세자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왕에게 전한다. 저자는 실제로 세자가 궁안에 땅굴을 파고 무기고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왕이 세자를 대신해 갚았다는 빚이 향락이나 유흥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무기를 사는데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실제로 정변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을까. 영조는 분명히 세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영조 또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그것이 영조의 평생의 업보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세자는 끝까지 저항했고 결국 뒤주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그 뒤주를 이용해 세자를 죽이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 바로 장인인 홍봉한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위를 죽인 것이다. 혜경궁 홍씨 또한 남편의 죽음에 일조를 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은 정조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친정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일찌감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신중한 행동 덕분에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노론은 왕을 제거하기 위해 궁궐 안으로 자객을 보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한다. 다행히 실패하였지만 정조의 왕위는 늘 불안한 것이었다. 이미 100년 동안이나 집권해온 노론을 단번에 제거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조선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노론이 다스리는 나라였다.그러나 정조는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노론을 견제하는 한편 소론과 남인을 정계로 진출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후 노론이 득세하는 한양을 떠나 화성으로 새로이 수도를 삼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정조는 정치적 목표를 다 이루지 못하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200년 전에도 지금도 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란 그들의 배를 불리고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임금이란 얼마나 불안한 자리였던가. 어떤 사람들은 신하와 임금이 서로를 견제하며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임금이 신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시대였으니 조선이란 나라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짐작이 간다. 정조가 사망한 해가 1800년이었으니 바로 19세기 말엽의 수난이 이미 100여 년 전에 잉태되어 있었다. 열강들이 힘을 키워가는 그 무렵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당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당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식민사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의 정치를 보면 전혀 지나친 평가가 아닌 것 같다. 어떤 당은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섬기질 않고 또한 대통령은 한나라나 국민을 대표하기보다는 특정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비쳐질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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