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란 암기과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달달 외워야 하는 과목. 하지만 나이를 먹고 조금씩 시야가 넓어질수록 역사나 세계사가 다른 무엇보다 재미있는 영역란 걸 깨닫게 된다. 만약 학생시절에 이 책의 저자처럼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좀더 일찍 역사에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말히기 전에 꼭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재위 시절은 노론의 세상이었다. 노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왕으로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미천한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장희빈을 왕후의 자리에서 쫓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소생의 연잉군이었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 행위였다. 노론은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추대하고 허약한 경종대신 연잉군을 대리청정하게 한다. 경종 재위 4년, 연잉군은 식사도 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다. 연잉군은 의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린다. 그 후부터 경종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연잉군은 인삼차를 마시면 죽을거라는 의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경종에게 인삼차를 올린다. 얼마 후  결국 경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연잉군 훗날의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영조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의원이 상극이라며 말리는 음식을 올렸는지는 영조 자신만이 알 뿐이다. 

  영조는 노론이 선택한 왕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노론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신하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연유로 탕평책을 실시했고 소론을 정사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노론의 힘은 영조가 억누르기에는 너무도 강했고 그때마다 영조는 의원의 진맥을 받지 않거나 왕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정치적인 쇼를 하며 노론의 기를 누른다. 또한 자신은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사실을 내보이기 위해 양위를 하겠다는 정치적인 쇼를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결국은 아들 세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재위 11년이 되어서야 태어난 아들이었다. 세자는 태어난 당일 원자로 책봉될 만큼 노론 소론 모두의 축복을 받았다. 영조 또한 총명하고 늠름한 풍모의 세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이 책에서의 사도세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신병적인 모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보였던 아버지 영조와는 다르게 감정적이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기를 즐기며 또한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효종처럼 북벌을 꿈꾸었던 큰 풍모가 느껴지는 인물로 나타난다. 저자의 편애인지 이것이 사도세자의 본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론은 세자의 이런 모습에서 어떤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는 노론의 편이 아니었다. 그 예가 나주벽서사건인데 내용의 골자는 노론의 집권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탕평책을 버리고 완전한 노론의 왕이 된다. 노론과 영조는 이들의 주범을 엄하게 처벌하자는 쪽이었고 세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세자는 소론의 편에 서 있었다. 노론이 보기에 세자는 위험한 인물이다. 노론은 세자를 제거할 계획에 들어간다. 불행하게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도 혜빈 혜경궁 홍씨도 노론이었다. 사위나 남편의 안위보다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이 먼저인 사람들이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나경언이란 인물을 사주하여 세자를 음모하는 투서를 쓰게 한다. 투서의 내용은 왕 가까이 있는 인물 즉 세자가 변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영조는 이를 계기로 세자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미 그때 영조에게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일 뿐이었다.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조차도 세자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왕에게 전한다. 저자는 실제로 세자가 궁안에 땅굴을 파고 무기고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왕이 세자를 대신해 갚았다는 빚이 향락이나 유흥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무기를 사는데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실제로 정변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을까. 영조는 분명히 세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영조 또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그것이 영조의 평생의 업보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세자는 끝까지 저항했고 결국 뒤주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그 뒤주를 이용해 세자를 죽이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 바로 장인인 홍봉한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위를 죽인 것이다. 혜경궁 홍씨 또한 남편의 죽음에 일조를 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은 정조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친정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일찌감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신중한 행동 덕분에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노론은 왕을 제거하기 위해 궁궐 안으로 자객을 보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한다. 다행히 실패하였지만 정조의 왕위는 늘 불안한 것이었다. 이미 100년 동안이나 집권해온 노론을 단번에 제거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조선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노론이 다스리는 나라였다.그러나 정조는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노론을 견제하는 한편 소론과 남인을 정계로 진출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후 노론이 득세하는 한양을 떠나 화성으로 새로이 수도를 삼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정조는 정치적 목표를 다 이루지 못하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200년 전에도 지금도 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란 그들의 배를 불리고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임금이란 얼마나 불안한 자리였던가. 어떤 사람들은 신하와 임금이 서로를 견제하며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임금이 신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시대였으니 조선이란 나라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짐작이 간다. 정조가 사망한 해가 1800년이었으니 바로 19세기 말엽의 수난이 이미 100여 년 전에 잉태되어 있었다. 열강들이 힘을 키워가는 그 무렵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당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당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식민사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의 정치를 보면 전혀 지나친 평가가 아닌 것 같다. 어떤 당은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섬기질 않고 또한 대통령은 한나라나 국민을 대표하기보다는 특정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비쳐질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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