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 - 삶의 어두운 진상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
라오서 외 지음,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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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고전이, 단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수사도 필요없이 고전에서 느껴지는 그 묵직한 울림을 요즘의 가벼운 소설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읽어도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요즘의 소설이 아무리 신선하고 독특한 소재로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제대로 포착해내는 것은 고전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지금의 소설은 보다 신선하고 보다 충격적인 소설을 써내는 게 목표가 되어버린 듯하다. 한때는 그런 소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5권에서는 몰입도가 떨어지는 두어 편 외에는 하나하나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하나는 '초승달'이라는 단편인데 이 단편이 그렇게 뛰어난 것인지 잘모르겠다. 이문열은 이 작품이 문장이 유려하다고 하는데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으로 드러내면서 짧게 끊어지는 그 문장을 유려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가장 인상적인 단편이라면 아무래도 '나생문'이 될 것 같다. 다시 읽어도 감흥이 줄어들지 않는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비에 갇혀버린 사내가 라쇼몬 아래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내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했고 여러 재난으로 황폐해진 교토에서 하인을 받아줄 다른 주인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하인의 오른쪽 볼에 난 벌겋게 고름이 생긴 여드름이 만져지는 듯하고, 사내가 하룻밤의 잠을 청하기 위해 라쇼몬의 다락으로 기어오르는 장면을 꼭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라쇼몬의 다락은 시체가 버려지는 곳으로 사내는 그곳에서 잠을 자야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랴쇼몬의 다락으로 올라간 하인은 주변을 살피다 시체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뭔가를 발견한다. 백발의 노파가 여자로 보이는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하인은 한동안 그 노파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머리카락을 뽑아다 가발이라도 만들어서 팔려고 했다는 노파의 말을 듣게 되고 그 노파만큼이나 절박한 처지에 있던 하인은 그 가련한 노파의 옷을 모두 벗겨 달아나버린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노파의 불경한 행동에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였는데... 절박한 굶주림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모습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안톤 체홉의 "골짜기"는 중편으로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과 뚜렷한 힘있는 서사로 인해 장편 한권을 읽은 듯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듯한 골짜기 마을, 발전은 드디고 낡고 오랜 공장이 몇 채 있을 뿐 사람살이가 고단한 그런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번성하는 곳은 그리고리 영감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뿐이다. 그의 부는 질 나쁜 고기나 보드카를 속여서 팔거나 고리대금업을 하거나 뭔가 뒤가 구리는 방법으로 축적한 것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경찰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귀머거리 둘째 아들과 그리고리 못지 않게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난 둘째 며느리가 있다. 그리고 재혼한 아내. 장남까지 착한 아내를 맞게 되어 더없이 행복한 그 순간 그리고리의 집안은 허물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경찰인 장남이 은화를 위조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결국에는 시베리아행을 선고 받게 된다. 그 사이 그의 가난하지만 착한 아내는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리 영감은 재혼한 아내의 제안에 따라 둘째 며느리가 노리던 땅을 갓난 아기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둘째 며느리가 아기에게 펄펄 끓는 물을 뒤짚어 씌워 죽게 만든다. 하지만 그리고리 영감은 장남이 위조한 은화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화와 섞어서 유통한 바람에 둘째 며느리에게 꼬투리를 잡혀 그녀를 벌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전부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리 영감이 둘째 며느리에게 재산을 다 빼앗기고 굶주릴 때 만두 하나를 건네는 건 아기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첫째 며느리뿐이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선량한 마음을 간직한 그녀의 행동은 그래도 아직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거룩한 메시지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라는 작가가 쓴 "형리"라는 중편은 작가도 작품도 꽤 낯설었다. 한 목로주점에 핏빛 옷을 입고 이마에 망나니라는 낙인이 찍한 덩치 큰 사내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댄 채로 말없이 앉아 있다. 그는 작품의 말미까지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주점에 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배경이 될 뿐이다. 망나니의 칼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칼로 죽여야 하는 사형수 여인을 사랑한 형리에 관한 이야기, 사형장의 땅 속에 있다는 만다라게에 관한 이야기가 주점에 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산만하게 전개될 동안 그는 그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가 누구인지 그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마지막에 주점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우리 인류가 그동안 자행해온 수많은 폭력과 살인의 현장에 있었다. 인간을 대신해 그는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으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는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인간의 그 잔인한 폭력성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임을 우울하게 예언하며 목로주점을 떠나간다.

 

  사실 이 작품은 의미가 분명히 와닿지 않는다.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의 의미를 알아채기는 쉽지가 않다. 내용이 좀 잊혀지기 시작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너무 분명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5권의 주제 '삶의 어두운 진상' 편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주제와 잘 부합되는 작품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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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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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반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 책을 읽었다. 다 읽는데 한 달 반 정도 걸린 듯하다. 집에 있는 책은 아니고 도서관에 있던 세 권짜리 책이었는데 출판사가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책이 좋았던 것은 아니고 어쩌면 독파하는데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지난 주 토요일 <TV 책을 보다>란 프로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 본 건 아니었고 보다 말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말한 만큼 나는 이 소설에서 재미, 공감, 감동이랄까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 나는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이 소설을 읽고 감동할 만한 수준은 아닌 걸까. 그럴지도... 무조건적인 찬사나 다름없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소설을 읽고도 이처럼 감흥이 일지 않았으니. 지금 쓰는 이 글이 그때의 느낌을 정확히 재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했던 것은 주인공(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프루스트 자신이 아닐까 싶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마음에 드는 유형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신경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해하고 감정의 폭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에 늘 붙어다니는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이 이 책을 이렇게 쓰게 했겠지만 어딘지 성숙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인물됨이 썩 미덥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안에서 작가의 모습이 읽혀지기도 하고.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주인공에 몰입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면서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주인공의 성숙한 내면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내가 느낀 바로는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주인공은 사춘기의 불안한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이 지난날을 기억해 쓴 책 한권(물론 방대한 분량이긴 하다.)이 아니었다면 그의 존재는 희미하고 때로는 무의미하기조차 하다. 책을 쓰기 전까지의 주인공은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특정한 직업도 없는, 상류사회를 기웃거리는, 지식인임을 자부하는, 지독히도 예민한, 그리 잘 생기지도 않은 병약한 젊은이일 뿐이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답답했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집에 숨겨 놓은 후 알베르틴이 동성애자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그녀가 동성애자임을 확신한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났음을 느끼면서도 그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들이 반복될 때였다. 스스로를 지적이라 자부하는 인물(그것에 대한 우월감이 그를 버티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넘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인물에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물이 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내 안에 있는 내가 싫어하는 면을 그 인물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주인공에게서 좀 벗어나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니 주인공에게서 벗어나자고 하는 것은 모순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그 유아기적인 애착에 머물러 있는 모습만 조금 걷어내면 주인공 마르셀의 눈을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인물들,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파리 귀족사회의 모습, 주인공이 속한 부르주아계층, 드레퓌스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 음악, 미술, 어원에 대한 남다른 지식 등 당시 프랑스 사회의 여러 모습을 읽는 재미가 특별하다. 만약 이 부분이 없었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나 찬사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물이 살아가는 사회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초점을 옮겨온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원경에서 바라볼 때는 그리도 매혹적이고 우아했던 인물들이 그 인물들 가까이로 다가간 후에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환상이라는 꺼풀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추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그게 그 인물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듯이...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샤를뤼스 남작일 것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잘생긴 사교계의 황제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여성스러운 목소리와 몸짓.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젊고 잘생긴 청년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늙고 뚱뚱해진 우스꽝스런 동성애자의 모습으로 주인공의 기억에 남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백 년 전에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길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공공연하게 만연하고 있는 동성애적 요소와 그것에 대한 불안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깊은 불안과 관심은 바로 주인공의 내면과 작가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주인공은 사람(혹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환멸을 오간다. 어쩐지 그 시선이 미덥지 못할 때도 있었다. 주인공은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너무 순수한 사람이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환상만으로 그 인물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고 자신의 환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환상의 영역에서 인물들을 추방시켜 환멸의 영역으로 가차없이 보내버린다. 때로는 주인공이 드나드는 살롱에서 고귀한 인물은 자기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 주인공의 날카로운 관찰의 눈앞에 발가벗겨지는 인물들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주인공의 기억 속에 저장된 말과 행동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날이 올까. 그때는 주인공에게 좀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읽을 수 있을까. 왠지 그러기 힘들 것 같다. 나는 이미 제법 성숙해진 어른의 시선을 가졌고 시간이 흐를 수록 나는 좀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에 열광할 수 없는 것은 사랑에 대한 감정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무뎌져버린 나이에 이 소설을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기 힘들더라도 좀더 젊은 시절에 사랑과 사람에 대해 아직은 궁금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을 때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읽기 힘들다는 그 명성(?)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된 것이 내 감흥을 떨어뜨린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 읽기 힘들다는 책을 독파했는데 남들만큼 예찬할 수 없어서 어쩐지 허무하고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끝까지 드는 의문 하나. 정말로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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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 성장과 눈뜸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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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이 단편집을 서점에서 한 권씩 사서 읽기 시작하다가 전체 열 권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읽기를 그만두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계속 읽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읽은 몇몇 단편은 굉장히 충격적일 만큼 오래 기억되고 신선한 작품도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읽을 거리가 없어서 집에 있는 단편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내가 단편을 참 좋아했었지,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네 싶었다. 그래서 아직 다 읽지 못한 단편들을 마저 사서 10권을 채워야지 싶어서 주문한 책.

  그런데 모양새가 영 엉망이 되어버렸다. 전에 산 책은 책을 꽂으면 보라색 표지가 질서정연한 게 참 보기에 좋았었는데 이번에 배달되어 온 책은 표지가 짙은 나무색이다. 전에 샀던 책들은 순서대로 산 게 아니라 주제가 맘에 들거나혹은 안에 실린 단편들과 작가들에 호기심이 생기는 대로 들쑥날쑥 한 권씩 모아두었었다. 그 탓에1권부터 차례대로 꽂아두니 보라색과 짙은 나무색이 뒤죽박죽 섞여 영 눈에 거슬린다. 개인적으로는 보라색 표지가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다행히 앞표지와 뒷표지는 예전 그대로지만 책을 꽂았을 때 보이는 부분의 색깔이 다르다 보니 전집에서 볼 수 있는 통일성이랄까 이런게 떨어진다. 뭐 책 진열해 놓으려고 산 것도 아닌데 위로해 보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만약 살림에서 이 전집을 다시 찍어낸다면 원래의 보라색을 추천하고 싶다. 내용과 관련없는 쓸데없는 말이 길어진 듯도 하지만 이왕이면 예쁘게 잘 만들어진 책이 좋지 않을까.

  사실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로 실린 이번 단편집은 전에 읽었던 다른 권에 비해 감동이 덜했다. 모든 단편들이 이 주제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대체로 작품 자체의 흡인력이 다른 권에 비해 부족한 단편들이 많았다. 어떤 작품을 하나의 주제 아래 규정짓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읽는 독자만큼의 다양한 비평이 존재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몇 작품만 소개하자면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읽는 내내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가 연상되었다. 크눌프 쪽이 훨씬 인생에서 한 발 더 비켜서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방랑의 기질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쓰고 평범한 아이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책들을 읽고. 아직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금발에다 말을 좋아하고 인기가 많았던 한스 한젠을 좋아했고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금발의 아름다운 잉에보르크 헬름이라는 소녀에게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건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행복하고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유전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이 삶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보다는 아마도 유럽의 남쪽 어딘가에서 왔다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더 강하게 물려받은 것 같다. 그는 결국에는 태어난 곳을 떠나 남쪽을 여행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으로서의 이름도 얼마간은 남기게 된다. 그러다 청춘이 모두 지나버린 30대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더 북쪽 도시를 방문하지만 그 곳에서 그는 낯선 사람일 뿐이며 여전히 그는 춤추는 사람들(아름답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방인일 뿐이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품으로서 재미있게 읽혀지는 단편이었다. 말그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소설적으로 흥미롭게 재현해 놓았고, 소년과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와의 은근한 신경전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때론 남자 대 남자의 대결로 냉정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는 "제3의 강둑"과 "보트 속의 남자"였다. 물론 배경이 강과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3의 강둑"에서는 어느 날 나의 아버지가 오직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보트를 주문하고 그 보트를 탄 후 강으로 가버린다. 하지만 아버지는 멀리 떠나지도 않았고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외로이 위태롭게 떠돌기만 했다. 단 한번도 배에서 내린 적도 없이 수십 년을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아버지에게 외친다. 아버지 이제 그만두세요. 제가 대신 배를 탈 게요. 그러나 나는 이미 노인이 된 아버지가 탄 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너무나 두려워 도망쳐버린다. 간단한 소품 같지만 이 단편은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도 의미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작품 말미에 이문열 작가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조각배와 강물 위에서의 생활은 외로운 떠돎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상징한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 대신 배를 타는 것을 그렇게나 두려워한 것이 이해가 된다.

  "보트 속의 남자"는 어린 내가 죽음에 눈뜨는 과정을 신비롭게 표현한 작품이다. 나와 하칸은 벌목된 나무를 몰래 숨겨놓고 뗏목을 만든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고기잡이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하칸과 함께 뗏목을 타고 호수로 가게 된다. 두 아이들만 남은 호수는 이미 밤이 되었고 갑자기 하칸이 호수에 빠진다. 하칸이 어떻게 해서 다시 뗏목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등을 돌린 하칸과 만월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때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보트가 다가왔고 보트 속의 남자는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칸을 보트에 태워 반짝이는 수면을 지나 호수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다음날 아침에야 할아버지에 의해 구조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을에서 하칸을 볼 수 없었고 나는 하칸을 찾아헤매다 호수 위에서 보트를 탄 하칸을 보게 된다.

  사실 난 이 장면에 와서야 하칸이 호수에서 빠졌을 때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보트 속의 남자는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 식으로 하면 저승사자일 수도 있겠다. 오랜 헤맴 끝에 바로 그 호수 위에서 위에서 하칸을 만나게 되고 주인공은 비로소 하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죽음과의 직면이 이토록 신비롭게 그려진 작품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이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완벽한 전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단편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좀더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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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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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제목이 내 생각과 딱 맞아떨어져서 진작에 읽어야지 하다가 지금에서야 읽게 된 책. 이제 앞부분만 조금 읽긴 했는데 역시나 명쾌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생각을 풀어나가는 게 마음에 든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의 배후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리고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저자도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도 종교적이라고 인정한다. 어쩌면 나도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이지 않을까. 저자는 신 즉,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우리의 생각을 읽고 죄를 벌하고 기도에 답하는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그가 자란 서구 문화와 밀접한 종교인 기독교, 카톨릭, 이슬람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목이 극단적이긴해도 결국에는 종교적 극단주의를 우려하는 정도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종교 자체의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있다.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아니 욕이야 하든 말든 그는 자신의 진화생물학적 증거를 들이밀면서 신 즉 당신네들이 믿는 유일신 혹은 믿고 싶어하는 그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다고,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좀 깨달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 가깝다. 혹은 자연신이나 범신론에 가까운 듯도 하고. 난 평소에 신(인격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정신세계가 참 궁금했었고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 있나 궁금했었는데 이 책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진 못하겠지만 내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필요없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반면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같잖은 신화라고 치부한다. 글쎄 비록 내가 무신론자에 가깝긴 하지만 그렇게나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저자는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나같은 생각을 가진 부류에게도 화살을 날린다. 어쩌면 종교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자연발생적으로... 하지만 인위적으로 종교를 거부한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 가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종교의 해악에 대해 역설하는 사람들이 나오긴 하겠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공허하고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능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2장에서 보면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왜 더 우월한 종교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부분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 전엔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다신교 사회였다. 오히려 그 때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보다 더 관용적인 사회이지 않았을까. 그럼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에 왜 그렇게 기독교인에 대해 박해를 가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건 하나의 신만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다신교인 로마사회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어느 책에서인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엔 종교가 피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 종교를 이용하는 인간이 피를 부르는 것인가. 로마인들이 볼 때 역시 일신교인 유대교나 기독교가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만이 사회의 갈등을 유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로 배타적인 종교가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경우는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저자의 논조에 조금 억지스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서구의 지식인,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등 중에 무신론자가 많다거나 교육수준이나 지적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인이 되거나 신앙을 가질 확률이 적다는 근거를 신이 없는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어쩌면 권위에 의한 오류일수도 있다. 지성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무신론자가 많다. 그처럼 지성적인 사람들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신이 없는 게 분명하지 않겠느냐.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믿음 외에는 확실한 증거를 내밀지 못하듯이 이 또한 권위라는 막연한 증거밖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교육수준이나 지적 수준이 높을수록 신앙을 가질 확률이 적다는 것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리퍼드 도킨스는 그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인 진화론적 근거에 기대어 이 세계가 신의 설계에 따라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축적과 함께 원시생명에서 오늘에 이르는 신의 설계로 보이는 듯한 복잡한 생명으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초의 생명, 생명 탄생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빅뱅, 우주의 기원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 신이 없다는 쪽에 더 많은 표를 던지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기 바랄 뿐이다. 반론을 용납할 수 없는 명쾌한 증거... 물론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것처럼 신의 부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도 아직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러니 이런 논쟁은 다음 몇 세기까지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명쾌하게 밝혀진 세상을 사는 것은 좀 시들하고 재미없을 것 같다.

  3장에서는 신이 없는 것이 확실한 이유로 인본원리, 등 몇 가지 근거를 들고 있는데 나는 비록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아직 완전히 설득당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도 언급했지만 인본 원리는 신의 설계를 믿는 사람들에게 너무 갖다 붙이기 좋은 근거가 되지 않을까. 어느 쪽에서도 갖다 붙일 수 있는 가설이 정말로 훌륭한 가설인지는 모르겠다. 만약 완벽한 유신론자가 나에게 반론을 가해온다면 나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완벽한 근거를 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신론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더 읽어가다보면 좀더 정확한 근거와 확신이 들게 하는 주장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100퍼센트 유신론자도 100퍼센트 무신론자도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런 지경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만 고착되어 있어서 다른 반증이 나와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리처드 도킨스는 그런 면에서 무신론자들이 더 온건하다고 주장한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는 이 세상이 신의 설계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벽한 증거가 나와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나 자신은 진화론을 뒤엎는 완벽한 증거가 나온다면 가장 먼저 창조론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게 과학의 본질 혹은 유연함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가설을 뒤엎을 만한 증거가 나오면 가차없이 폐기되어 지는 것.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종교적 극단주의자는 모든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눈을 감아버린다고 말한다. 바로 리처드 도킨스가 우려하는 것이다. 종교는 진실을 가리고 사고의 유연함, 자유로움을 막는다는 것.

  이 책은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다. 특히 4장까지가 그런 것 같다.  너무나 많은 학자들, 인용글, 이론들이 각 단락마다 끊임없이 제시되다 보니 인용된 한 부분만을 보고 사실로 받아들일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내 독서의 깊이가 이 책을 모두 이해할 만큼 깊지 못한 탓이기도 하고. 하지만 원래 이론이나 학문이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고 언제든 후대의 연구자에 의해 바뀔 수 있는 대상이고 혹은 똑 같은 이론이나 주장도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대로 변형되고 오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없다고 단정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이 없다는 증거로 그 반대인 사람에게는 반대의 증거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5장에서는 종교의 뿌리가 얼마나 허약하고 때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바누아투의 탄나 섬에서 '존 프럼'이라는 인물(실존인물인지 가상인물인지 알수 없는데 시간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는 그의 모습이 변형된다)을 신으로 섬기는 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근래 보여지는 몇 가지 것들은 무지한 사람들의 우스꽝스런 미신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사례가 세계의 변방이 아닌 인류의 문명이 번성하게 되는 곳에서 수많은 인류와 함께 퍼져나갈 수 있는 힘(경제력, 군사력, 정치력 등등)이 있었더라면 오늘날에 볼 수 있는 지배적인 종교의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6장에서는 도덕이 종교에서 나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에는 충분히 공감이 된다. 도덕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없이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배경과 종교 속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직관적으로 판단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도덕적 직관은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화적 유산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진화적 유산은 종교없이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릴 때 했던 질문 중에 하나가 특정 종교를 가지지 않은 착한 사람들도 죽으면 지옥에 가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대답은 그렇다였는데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살라고 하지 않느냐고. 그렇다면 그 대답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어떤 신을 믿는지와는 상관없이 착하게 산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사실이 아니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왜 아니오 인지에 대한 의문은 7장의 구약성서와 신약 성서를 인용한 부분을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서도 주변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변 부족에 대해 아주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부족간의 전쟁이 빈발하던 시기였지 않았을까. 그래서 부족내의 결속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다른 부족에 특히나 다른 신앙을 가진 부족에 그렇게도 잔인하고 배타적인 성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리처드 도킨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 내 이웃에 포함되는 민족은 유대인뿐이었고 요한 계시록을 통해 구원받는 민족도 유대인 뿐이라고... 이것이 올바른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유대인 부족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수집된 이야기(그 근원은 수메르 문명 등을 포함한 인류의 초기 문명이겠지만)가 로마를 통해 다른 민족에게로 유입되고 그리고 2000년이 흐른 현재에 이르러 동양의 작은 나라에까지 퍼져나간 지금,  천국의 문은 이 나라의 기독교인에게도 허용된 것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 믿음을 가진 모든 기독교인이구원받을 거라는 생각은 기독교인의 착각일까. 구약성서나 신약성서가 씌어질 당시 이 동방에 사는 작은 나라의 기독인들까지 염두에 두었을까.  

  그런데 늘 생각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정말로 신(유일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왜 그토록 많이 존재하며 신의 모습은 왜 그토록 다양한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통해 신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토록 다양한 신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본래의 모습은 하나지만 각각의 인간에게 맞게 특수한 모습으로 바뀌어 존재를 드러내는 건가? 다 쓸데없는 질문이고 사념일지도 모르겠다. 신을 믿든 안 믿든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신을 믿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의 부재를 믿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생각도 종교의 유해함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8장에는 자신이 왜 종교에 적대적인지 여러 예( 순교를 목적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어린 이슬람교도들, 그들에게 그런 맹목적 열정을 부추기는 이슬람 근본주의 자들)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아니라 종교 자체를 비난해야 한다. 끔찍하게 왜곡된 종교가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 말이다" 볼테르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다."

  이 말들을 읽으면서 나처럼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도 있겠고 그의 생각도 종교적 극단주의 만큼 극단적이라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봐야 하는 구절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9장에서는 부모의 손에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속한 문화 속에서 종교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서 스스로 자신의 종교를 혹은 신이 없다는 믿음을 선택할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고 말한다. 흔히들 모태신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내가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서 사회화 과정을 거치듯이 기독교인의 가정에 태어난 아이는 기독교인으로 불교 가정에 태어난 아이는 불교인으로 자라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도 그 아이는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10장에서는 부르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여인들을 빗대어 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사고의 지평을 좁게 하는지 역설한다. 우리는 중간계(우리의 눈에 명확히 보이는 3차원의 세계)에서 진화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는 3차원적인 존재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바위는 그저 단단한 어떤 물체로서만 인식할 뿐 서로 멀리 떨어진 수많은 입자들로 가득찬 텅빈 공간이라는 걸 알지 못하며, 우리의 우주가 아주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바로 신이라는 그 부르카를 벗어던지면 3차원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인식의 세계가 원자에서 우주까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신을 버려야하는 이유다. 신을 버려야 세상의 진실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그가 진정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 무신론자의 영역에 가까워졌을까. 그렇지는 않다. 원래 내가 서 있는 무신론자의 지점에 나는 그대로 서 있다. 나의 생각을 확인한 정도. 예전보다 더 굳건한 무신론자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종교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없는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종교를 가진 수억(수십억?) 명의 사람들의 믿음이 헛된 거라고 어떻게 매몰차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과학의 힘으로도 풀지 못하는 영역의 존재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회색분자,하고 비웃는 리처드 도킨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놀랐던 것은 이 책의 번역자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데 서구문화 특히 미국문화에서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와의 결별을 각오해야 할 만큼.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경직된 사회에 또 하나의 작은 금 하나를 추가하는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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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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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투르게네프의 '살아 있는 송장'을 읽고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게 된 소설. 한 십여 년 전에 단편집에 실렸던 '살아 있는 송장'을 읽었을 때는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책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단편들 내용은 다 잊혀진 상태이고 어떤 단편들은 읽다보니 어떤 장면에서는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살아있는 송장'도 약간 기억이 나는 단편이었는데, 한때 빛나게 아름다웠던 루케리아가 숲속에 버려진 낡은 헛간의 침대에서 죽음 직전의 뼈만 남은 모습으로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있으면서도 그녀의 영혼만은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그녀는 세상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그녀의 그 맑고 순수한 영혼이 책을 읽는 동안 온몸으로 느껴지며 그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도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뭔가를 향해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긴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있는 뭔가를 그녀의 순수한 영혼이 건드린 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읽게 된 첫사랑. 이 소설은 예전에 읽었었는지 아니면 처음 읽는 건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고전은 워낙 제목에 익숙하다보니 제목만 알고 있는건지 진짜 읽었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열여섯 살의 순수한 소년 블라지미르, 그가 한눈에 빠져버리고 만 21살의 지나이다, 그녀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남자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미지의 한 남자... 열여섯 살 소년은 그녀의 눈빛,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이 휩쓸리게 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래로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나이다는 비록 주변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손안에 주무를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한 블라지미르가 사랑하기에는 타락한, 불완전한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주변의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듯이 보이는 지나이다도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그 남자와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관계이다. 그 남자가 누구인가는 읽어내려가다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에 실린 '귀족의 보금자리'가 내게는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구성이나 상류층의 가정문화나 프랑스의 살롱 문화 같은 것들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의 배경이나 그 시절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데 결말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처럼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좀 다르면서도 그게 진짜 삶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주인공 라브레츠키의 배경이나 인물의 성격 등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져서 꽤 몰입하면서 읽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여자에게 발목이 잡혀버리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리자는 그에 비해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수순한 여주인공의 모습 외에 뭔가 좀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다. '첫사랑'의 지나이다만큼 독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 주지는 못하는 인물인 것 같다.

  마지막 단편 "무무" 역시 깊은 울림이 있는 단편이었다. 제법 이야기가 흐른 다음에야 이 '무무'가 등장하게 되는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거구의 농노 게라심이 강가의 진흙 펄에 빠져있는 걸 데리고와 기른 강아지의 이름이다. 제목이 '무무'이긴 하지만 이 단편은 게라심에 대한 이야기다. 러시아의 농노, 거주에 관한 권리도, 결혼에 관한 권리도 스스로 갖지 못한 채 지주의 결정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게라심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인물로 설정된 건 해방되기 전의 러시아 농노의 현실을 상징한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나마 게라심이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도 떠나고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이었던 '무무'마저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만은 스스로에 의한 선택이었고 그곳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이 자유로웠을 거라 위로해 본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좀더 어렸을 때 읽어야 그 서정적이고 순수한 감성들에 잘 몰입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유약한 소년의 감성처럼 서정적이지만은 않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사랑을 깨달아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서정적으로 서술하면서도 1800년대의 러시아의 상황, 지주와 농노제도, 서구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러시아의 열등의식,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통해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에는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한 긍정이 엿보이면서도 자기검열 같은 비판을 볼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에 비해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의 순수한 영혼이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다른 것들에 비해 그들의 순수한 내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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