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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 성장과 눈뜸 ㅣ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 이 단편집을 서점에서 한 권씩 사서 읽기 시작하다가 전체 열 권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읽기를 그만두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계속 읽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읽은 몇몇 단편은 굉장히 충격적일 만큼 오래 기억되고 신선한 작품도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읽을 거리가 없어서 집에 있는 단편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내가 단편을 참 좋아했었지,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네 싶었다. 그래서 아직 다 읽지 못한 단편들을 마저 사서 10권을 채워야지 싶어서 주문한 책.
그런데 모양새가 영 엉망이 되어버렸다. 전에 산 책은 책을 꽂으면 보라색 표지가 질서정연한 게 참 보기에 좋았었는데 이번에 배달되어 온 책은 표지가 짙은 나무색이다. 전에 샀던 책들은 순서대로 산 게 아니라 주제가 맘에 들거나혹은 안에 실린 단편들과 작가들에 호기심이 생기는 대로 들쑥날쑥 한 권씩 모아두었었다. 그 탓에1권부터 차례대로 꽂아두니 보라색과 짙은 나무색이 뒤죽박죽 섞여 영 눈에 거슬린다. 개인적으로는 보라색 표지가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다행히 앞표지와 뒷표지는 예전 그대로지만 책을 꽂았을 때 보이는 부분의 색깔이 다르다 보니 전집에서 볼 수 있는 통일성이랄까 이런게 떨어진다. 뭐 책 진열해 놓으려고 산 것도 아닌데 위로해 보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만약 살림에서 이 전집을 다시 찍어낸다면 원래의 보라색을 추천하고 싶다. 내용과 관련없는 쓸데없는 말이 길어진 듯도 하지만 이왕이면 예쁘게 잘 만들어진 책이 좋지 않을까.
사실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로 실린 이번 단편집은 전에 읽었던 다른 권에 비해 감동이 덜했다. 모든 단편들이 이 주제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대체로 작품 자체의 흡인력이 다른 권에 비해 부족한 단편들이 많았다. 어떤 작품을 하나의 주제 아래 규정짓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읽는 독자만큼의 다양한 비평이 존재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몇 작품만 소개하자면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읽는 내내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가 연상되었다. 크눌프 쪽이 훨씬 인생에서 한 발 더 비켜서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방랑의 기질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쓰고 평범한 아이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책들을 읽고. 아직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금발에다 말을 좋아하고 인기가 많았던 한스 한젠을 좋아했고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금발의 아름다운 잉에보르크 헬름이라는 소녀에게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건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행복하고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유전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이 삶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보다는 아마도 유럽의 남쪽 어딘가에서 왔다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더 강하게 물려받은 것 같다. 그는 결국에는 태어난 곳을 떠나 남쪽을 여행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으로서의 이름도 얼마간은 남기게 된다. 그러다 청춘이 모두 지나버린 30대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더 북쪽 도시를 방문하지만 그 곳에서 그는 낯선 사람일 뿐이며 여전히 그는 춤추는 사람들(아름답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방인일 뿐이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품으로서 재미있게 읽혀지는 단편이었다. 말그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소설적으로 흥미롭게 재현해 놓았고, 소년과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와의 은근한 신경전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때론 남자 대 남자의 대결로 냉정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는 "제3의 강둑"과 "보트 속의 남자"였다. 물론 배경이 강과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3의 강둑"에서는 어느 날 나의 아버지가 오직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보트를 주문하고 그 보트를 탄 후 강으로 가버린다. 하지만 아버지는 멀리 떠나지도 않았고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외로이 위태롭게 떠돌기만 했다. 단 한번도 배에서 내린 적도 없이 수십 년을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아버지에게 외친다. 아버지 이제 그만두세요. 제가 대신 배를 탈 게요. 그러나 나는 이미 노인이 된 아버지가 탄 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너무나 두려워 도망쳐버린다. 간단한 소품 같지만 이 단편은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도 의미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작품 말미에 이문열 작가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조각배와 강물 위에서의 생활은 외로운 떠돎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상징한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 대신 배를 타는 것을 그렇게나 두려워한 것이 이해가 된다.
"보트 속의 남자"는 어린 내가 죽음에 눈뜨는 과정을 신비롭게 표현한 작품이다. 나와 하칸은 벌목된 나무를 몰래 숨겨놓고 뗏목을 만든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고기잡이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하칸과 함께 뗏목을 타고 호수로 가게 된다. 두 아이들만 남은 호수는 이미 밤이 되었고 갑자기 하칸이 호수에 빠진다. 하칸이 어떻게 해서 다시 뗏목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등을 돌린 하칸과 만월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때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보트가 다가왔고 보트 속의 남자는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칸을 보트에 태워 반짝이는 수면을 지나 호수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다음날 아침에야 할아버지에 의해 구조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을에서 하칸을 볼 수 없었고 나는 하칸을 찾아헤매다 호수 위에서 보트를 탄 하칸을 보게 된다.
사실 난 이 장면에 와서야 하칸이 호수에서 빠졌을 때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보트 속의 남자는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 식으로 하면 저승사자일 수도 있겠다. 오랜 헤맴 끝에 바로 그 호수 위에서 위에서 하칸을 만나게 되고 주인공은 비로소 하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죽음과의 직면이 이토록 신비롭게 그려진 작품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이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완벽한 전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단편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좀더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