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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얼마 전에 투르게네프의 '살아 있는 송장'을 읽고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게 된 소설. 한 십여 년 전에 단편집에 실렸던 '살아 있는 송장'을 읽었을 때는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책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단편들 내용은 다 잊혀진 상태이고 어떤 단편들은 읽다보니 어떤 장면에서는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살아있는 송장'도 약간 기억이 나는 단편이었는데, 한때 빛나게 아름다웠던 루케리아가 숲속에 버려진 낡은 헛간의 침대에서 죽음 직전의 뼈만 남은 모습으로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있으면서도 그녀의 영혼만은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그녀는 세상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그녀의 그 맑고 순수한 영혼이 책을 읽는 동안 온몸으로 느껴지며 그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도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뭔가를 향해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긴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있는 뭔가를 그녀의 순수한 영혼이 건드린 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읽게 된 첫사랑. 이 소설은 예전에 읽었었는지 아니면 처음 읽는 건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고전은 워낙 제목에 익숙하다보니 제목만 알고 있는건지 진짜 읽었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열여섯 살의 순수한 소년 블라지미르, 그가 한눈에 빠져버리고 만 21살의 지나이다, 그녀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남자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미지의 한 남자... 열여섯 살 소년은 그녀의 눈빛,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이 휩쓸리게 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래로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나이다는 비록 주변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손안에 주무를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한 블라지미르가 사랑하기에는 타락한, 불완전한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주변의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듯이 보이는 지나이다도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그 남자와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관계이다. 그 남자가 누구인가는 읽어내려가다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에 실린 '귀족의 보금자리'가 내게는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구성이나 상류층의 가정문화나 프랑스의 살롱 문화 같은 것들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의 배경이나 그 시절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데 결말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처럼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좀 다르면서도 그게 진짜 삶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주인공 라브레츠키의 배경이나 인물의 성격 등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져서 꽤 몰입하면서 읽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여자에게 발목이 잡혀버리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리자는 그에 비해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수순한 여주인공의 모습 외에 뭔가 좀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다. '첫사랑'의 지나이다만큼 독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 주지는 못하는 인물인 것 같다.
마지막 단편 "무무" 역시 깊은 울림이 있는 단편이었다. 제법 이야기가 흐른 다음에야 이 '무무'가 등장하게 되는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거구의 농노 게라심이 강가의 진흙 펄에 빠져있는 걸 데리고와 기른 강아지의 이름이다. 제목이 '무무'이긴 하지만 이 단편은 게라심에 대한 이야기다. 러시아의 농노, 거주에 관한 권리도, 결혼에 관한 권리도 스스로 갖지 못한 채 지주의 결정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게라심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인물로 설정된 건 해방되기 전의 러시아 농노의 현실을 상징한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나마 게라심이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도 떠나고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이었던 '무무'마저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만은 스스로에 의한 선택이었고 그곳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이 자유로웠을 거라 위로해 본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좀더 어렸을 때 읽어야 그 서정적이고 순수한 감성들에 잘 몰입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유약한 소년의 감성처럼 서정적이지만은 않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사랑을 깨달아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서정적으로 서술하면서도 1800년대의 러시아의 상황, 지주와 농노제도, 서구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러시아의 열등의식,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통해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에는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한 긍정이 엿보이면서도 자기검열 같은 비판을 볼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에 비해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의 순수한 영혼이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다른 것들에 비해 그들의 순수한 내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