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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 - 삶의 어두운 진상 ㅣ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
라오서 외 지음,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다시 고전이, 단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수사도 필요없이 고전에서 느껴지는 그 묵직한 울림을 요즘의 가벼운 소설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읽어도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요즘의 소설이 아무리 신선하고 독특한 소재로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제대로 포착해내는 것은 고전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지금의 소설은 보다 신선하고 보다 충격적인 소설을 써내는 게 목표가 되어버린 듯하다. 한때는 그런 소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5권에서는 몰입도가 떨어지는 두어 편 외에는 하나하나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하나는 '초승달'이라는 단편인데 이 단편이 그렇게 뛰어난 것인지 잘모르겠다. 이문열은 이 작품이 문장이 유려하다고 하는데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으로 드러내면서 짧게 끊어지는 그 문장을 유려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가장 인상적인 단편이라면 아무래도 '나생문'이 될 것 같다. 다시 읽어도 감흥이 줄어들지 않는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비에 갇혀버린 사내가 라쇼몬 아래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내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했고 여러 재난으로 황폐해진 교토에서 하인을 받아줄 다른 주인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하인의 오른쪽 볼에 난 벌겋게 고름이 생긴 여드름이 만져지는 듯하고, 사내가 하룻밤의 잠을 청하기 위해 라쇼몬의 다락으로 기어오르는 장면을 꼭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라쇼몬의 다락은 시체가 버려지는 곳으로 사내는 그곳에서 잠을 자야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랴쇼몬의 다락으로 올라간 하인은 주변을 살피다 시체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뭔가를 발견한다. 백발의 노파가 여자로 보이는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하인은 한동안 그 노파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머리카락을 뽑아다 가발이라도 만들어서 팔려고 했다는 노파의 말을 듣게 되고 그 노파만큼이나 절박한 처지에 있던 하인은 그 가련한 노파의 옷을 모두 벗겨 달아나버린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노파의 불경한 행동에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였는데... 절박한 굶주림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모습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안톤 체홉의 "골짜기"는 중편으로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과 뚜렷한 힘있는 서사로 인해 장편 한권을 읽은 듯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듯한 골짜기 마을, 발전은 드디고 낡고 오랜 공장이 몇 채 있을 뿐 사람살이가 고단한 그런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번성하는 곳은 그리고리 영감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뿐이다. 그의 부는 질 나쁜 고기나 보드카를 속여서 팔거나 고리대금업을 하거나 뭔가 뒤가 구리는 방법으로 축적한 것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경찰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귀머거리 둘째 아들과 그리고리 못지 않게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난 둘째 며느리가 있다. 그리고 재혼한 아내. 장남까지 착한 아내를 맞게 되어 더없이 행복한 그 순간 그리고리의 집안은 허물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경찰인 장남이 은화를 위조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결국에는 시베리아행을 선고 받게 된다. 그 사이 그의 가난하지만 착한 아내는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리 영감은 재혼한 아내의 제안에 따라 둘째 며느리가 노리던 땅을 갓난 아기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둘째 며느리가 아기에게 펄펄 끓는 물을 뒤짚어 씌워 죽게 만든다. 하지만 그리고리 영감은 장남이 위조한 은화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화와 섞어서 유통한 바람에 둘째 며느리에게 꼬투리를 잡혀 그녀를 벌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전부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리 영감이 둘째 며느리에게 재산을 다 빼앗기고 굶주릴 때 만두 하나를 건네는 건 아기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첫째 며느리뿐이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선량한 마음을 간직한 그녀의 행동은 그래도 아직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거룩한 메시지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라는 작가가 쓴 "형리"라는 중편은 작가도 작품도 꽤 낯설었다. 한 목로주점에 핏빛 옷을 입고 이마에 망나니라는 낙인이 찍한 덩치 큰 사내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댄 채로 말없이 앉아 있다. 그는 작품의 말미까지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주점에 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배경이 될 뿐이다. 망나니의 칼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칼로 죽여야 하는 사형수 여인을 사랑한 형리에 관한 이야기, 사형장의 땅 속에 있다는 만다라게에 관한 이야기가 주점에 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산만하게 전개될 동안 그는 그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가 누구인지 그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마지막에 주점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우리 인류가 그동안 자행해온 수많은 폭력과 살인의 현장에 있었다. 인간을 대신해 그는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으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는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인간의 그 잔인한 폭력성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임을 우울하게 예언하며 목로주점을 떠나간다.
사실 이 작품은 의미가 분명히 와닿지 않는다.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의 의미를 알아채기는 쉽지가 않다. 내용이 좀 잊혀지기 시작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너무 분명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5권의 주제 '삶의 어두운 진상' 편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주제와 잘 부합되는 작품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