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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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반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 책을 읽었다. 다 읽는데 한 달 반 정도 걸린 듯하다. 집에 있는 책은 아니고 도서관에 있던 세 권짜리 책이었는데 출판사가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책이 좋았던 것은 아니고 어쩌면 독파하는데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지난 주 토요일 <TV 책을 보다>란 프로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 본 건 아니었고 보다 말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말한 만큼 나는 이 소설에서 재미, 공감, 감동이랄까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 나는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이 소설을 읽고 감동할 만한 수준은 아닌 걸까. 그럴지도... 무조건적인 찬사나 다름없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소설을 읽고도 이처럼 감흥이 일지 않았으니. 지금 쓰는 이 글이 그때의 느낌을 정확히 재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했던 것은 주인공(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프루스트 자신이 아닐까 싶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마음에 드는 유형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신경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해하고 감정의 폭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에 늘 붙어다니는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이 이 책을 이렇게 쓰게 했겠지만 어딘지 성숙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인물됨이 썩 미덥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안에서 작가의 모습이 읽혀지기도 하고.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주인공에 몰입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면서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주인공의 성숙한 내면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내가 느낀 바로는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주인공은 사춘기의 불안한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이 지난날을 기억해 쓴 책 한권(물론 방대한 분량이긴 하다.)이 아니었다면 그의 존재는 희미하고 때로는 무의미하기조차 하다. 책을 쓰기 전까지의 주인공은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특정한 직업도 없는, 상류사회를 기웃거리는, 지식인임을 자부하는, 지독히도 예민한, 그리 잘 생기지도 않은 병약한 젊은이일 뿐이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답답했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집에 숨겨 놓은 후 알베르틴이 동성애자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그녀가 동성애자임을 확신한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났음을 느끼면서도 그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들이 반복될 때였다. 스스로를 지적이라 자부하는 인물(그것에 대한 우월감이 그를 버티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넘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인물에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물이 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내 안에 있는 내가 싫어하는 면을 그 인물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주인공에게서 좀 벗어나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니 주인공에게서 벗어나자고 하는 것은 모순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그 유아기적인 애착에 머물러 있는 모습만 조금 걷어내면 주인공 마르셀의 눈을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인물들,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파리 귀족사회의 모습, 주인공이 속한 부르주아계층, 드레퓌스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 음악, 미술, 어원에 대한 남다른 지식 등 당시 프랑스 사회의 여러 모습을 읽는 재미가 특별하다. 만약 이 부분이 없었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나 찬사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물이 살아가는 사회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초점을 옮겨온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원경에서 바라볼 때는 그리도 매혹적이고 우아했던 인물들이 그 인물들 가까이로 다가간 후에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환상이라는 꺼풀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추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그게 그 인물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듯이...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샤를뤼스 남작일 것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잘생긴 사교계의 황제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여성스러운 목소리와 몸짓.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젊고 잘생긴 청년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늙고 뚱뚱해진 우스꽝스런 동성애자의 모습으로 주인공의 기억에 남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백 년 전에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길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공공연하게 만연하고 있는 동성애적 요소와 그것에 대한 불안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깊은 불안과 관심은 바로 주인공의 내면과 작가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주인공은 사람(혹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환멸을 오간다. 어쩐지 그 시선이 미덥지 못할 때도 있었다. 주인공은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너무 순수한 사람이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환상만으로 그 인물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고 자신의 환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환상의 영역에서 인물들을 추방시켜 환멸의 영역으로 가차없이 보내버린다. 때로는 주인공이 드나드는 살롱에서 고귀한 인물은 자기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 주인공의 날카로운 관찰의 눈앞에 발가벗겨지는 인물들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주인공의 기억 속에 저장된 말과 행동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날이 올까. 그때는 주인공에게 좀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읽을 수 있을까. 왠지 그러기 힘들 것 같다. 나는 이미 제법 성숙해진 어른의 시선을 가졌고 시간이 흐를 수록 나는 좀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에 열광할 수 없는 것은 사랑에 대한 감정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무뎌져버린 나이에 이 소설을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기 힘들더라도 좀더 젊은 시절에 사랑과 사람에 대해 아직은 궁금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을 때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읽기 힘들다는 그 명성(?)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된 것이 내 감흥을 떨어뜨린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 읽기 힘들다는 책을 독파했는데 남들만큼 예찬할 수 없어서 어쩐지 허무하고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끝까지 드는 의문 하나. 정말로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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