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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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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블로그에 쓴 글을 가져왔습니다 http://blog.naver.com/yadohy6407/220086859328)


최근 본 책들의 표지에서 유독 한 작가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문학과지성사 2008.10.01

 

 

 



김연수 소설가의 <밤은 노래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 배수아 옮김

필로소픽 2014.03.24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피라미드

윌리엄 골딩 | 안지현 옮김

민음사 2013.10.04

 

 

 



윌리엄 골딩의 <피라미드> 

 

의식

세스 노터봄 | 김영중 옮김

민음사 2014.05.09

 

 

 



세스 노터봄의 <의식>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 김춘미 옮김

민음사 2004.05.15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왜 에곤 쉴레일까? 쉴레의 그림이 책 판매에 도움이 줄 거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해골바가지에 피부를 덧씌운 것 같은... 그림의 첫 느낌은 <불쾌>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미술책이나 평소에 접했던 그림과 많이 다른데 그 차이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또 '명화'라고 불리는 과거에 그려졌던 그림들이 대상을 '아름답게' -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 이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힘썼다면(앵그르의 <오달리스크>의 여인의 허리가 길게 그려진 것처럼) 쉴레의 그림은 이런 표현이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위추'(일부러 추하게)적으로 보일 만큼 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리얼리즘과는 다른 지향성이 쉴레의 그림에서 풍겨지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형성한다. <밤은 노래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피라미드>의 책 표지를 처음 봤을 때 '이거...'하고 쉴레의 그림이 아닐까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독보적 아우라 때문이었다. 치명적 불온함, 포르노그래피의 적나라함과는 다른, 그렇다고 에로티즘의 언어로 해석하기도 애매한... 뼈와 살거죽! 

그의 그림을 보면 <소외>와 <고독>이란 키워드가 떠오른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건에 의해 '벌거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쓰곤 한다. 벌거벗겨짐. 상대방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맹목적 공격성과 이에 대응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의 자신, 숨막힐 정도의 부끄러움/수치심 앞에서 우리는 쥐구멍을 찾는다. 그리고 문득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나로부터 절대 도망갈 수 없구나' 아무리 자유로운 정신이라도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 글이나 음악, 미술 등에 정신을 옮겨놓거나 이식할 순 있지만 살아 있고 운동하는 정신은 인공지능을 제외하곤 육체를 토대로, 전제로 존재한다. 니체는 심신이원론,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사유하게 만든 소크라테스와 기독교를 거침 없이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 선언(서양정신사와 대결하고자 한 니체의 출사표라 볼 수 있다) 이후 유물론의 물결을 거쳐 다시 '신성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지구 반대편으로 하루나 이틀이면 갈 수 있고 이메일과 SNS 등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역설적으로 현대인이 호소하고 있는 감정은 '외로움'이다(SNS에 전시된 외로움을 보라!)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사유 아래 현대사회는 '과잉'연결되어 있다고 분석, 지적하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고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인권을 말하면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듯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고 살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의 카카오톡도 경박한 토크쇼의 웃음소리BGM도 침략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선 수행, 명상 + 자연 ... (+차담) 청년출가학교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 중 하나가 '명상' 시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미황사의 <참사랑의 향기> 프로그램도 참여해보고 싶다 ^^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과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보면 '커플'을 확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 르네 마그리트, 도스토예프스키, 에드바르트 뭉크. 장르는 다르지만 영혼으로 통하고 공명하는 영혼의 단짝(들). 에곤 쉴레의 영혼의 단짝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 나는 프란츠 카프카에 한 표를 주고 싶다. 카프카와 쉴레. 살과 살이 아닌 뼈와 뼈를 맞대고 사랑할 것 같은 커플. 고독의 실존의 발명자들.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과 <소송>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일독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고 한 번 쉴레의 자화상을 멍하니 쳐다보길... 뭔가가 벗겨지고 처음엔 불편함과 불쾌함에 시달릴 지도 모르지만 이내 자유로움을 느낄 지도 모른다. 나같지 않은 나와의 어색한 조우. 잘 지냈지? 어색한 관계 사이에 인사법이다.  


...


 한 권이 추가됐다. 성석제의 투명인간.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 푸는 걸 싫어해서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작품들을 포함한 한국문학을 알게 모르게 멀리 했다. 작가 성석제를 처음 알게 된 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였던 것 같다.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직접 읽어보기 위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고(읽었다기보다) 있었기 때문에 성석제 작가가 니체를 패러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기회에 고등학생들에게 두 가지만 말해주고 싶다. 1 고등학교에서 추천하는 추천책/필독서를 필히 읽지 말 것. 단테의 신곡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1,2... 나는 내 지적능력이 또래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권장'/'필독'도서를 꾸역꾸역 읽어야 했다. 그 결과 그 시간 동안 읽을 수 있었을 수많은 책들을 읽지 못하고 내 머릿 속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의미'에 대해 집착하는 경향이 그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평균 500페이지가 넘는 무의미와 씨름해야 했던 불임의 독서의 후유증...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고, 좀 더 어려운 책을 읽고 싶으면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요즘엔 아트엔스터디,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시민행성 등 이용할 수 있는 질 좋은 인문학 콘텐츠가 많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일정 수준의 경제력만 뒷받침된다면 혼자 헤매는 시간을 줄이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안광복 선생님 같은 분을 보니까 좋은 고등학교엔 '철학'교사가 있는 것 같던데 뭐, 대한민국도 언젠가 프랑스처럼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 가면 프랑스도 지금과 많이 달라지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서론이 길었다. 에곤 쉴레에 대한 다른 글까지 끌어오면서 서론을 길게 '끈' 이유에 대해 고백하고자 한다. 그 동안 독후감은 대부분 책을 읽자마자 썼다. 세세한 줄거리까지 모두 기억나는 것은 책에서 마음으로 스며든 감정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머리와 손이 달아올랐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A4 두 장 정도 분량은 거뜬히 채울 수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배출에 제동을 걸고, 양보다 질을 추구해보잔 생각에 공백을 만들었다. 망각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선명하고 세세하게 복원해보자는 마음으로 알라딘 리뷰들을 써보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 공백기간을 말 그대로 비워두었다면 또 달라겠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책을 읽고, 배우고 하는 '채움'의 시간을 거치면서 침전된 마음에서 순수한 결정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뜸'을 들이게 된 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컸다. 아마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인용한 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키는 여행기를 여행지에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지에서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돌아온 다음에 쓴다고 한다. 시간성을 획득한 기억, 마음의 결에 따른 자연스럽게 걸러지고 남은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접근방향은 좋았으나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잠에서 깬 직후 '따끈따끈'한 상태로 글쓰기를 즐겼다는 마르케스의 말을 듣고, 독후감 쓰기를 즐기기 위해 차분함보다 따근함/뜨듯함을 즐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 쉬운 사람


 에곤 쉴레의 그림이 있는 표지와 제목을 보았을 때 예상한 내용은 카프카적 소외였다. 이를 테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이 사회의 코드에 읽히지 않아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한다는... 뻔한 생각. 투명인간을 읽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소설은 성석제만이 쓸 수 있다. 성석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스타일이나 장점에 대해 '곰곰생각하는발'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키워드는 이랬다. 시골, 입말, 이야기꾼. 가독성이 뛰어났고, 묘사하는 대상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문장들의 달리기에서 가끔 냇물 바닥의 조약돌의 매끈매끈한 질감이나 반짝이는 윤슬(오호 내가 좋아하는 단어 ><) 같은 것이 느껴져서 지루하지 않았다. 


 만수. 만수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이랬다. 착한 사람. 혹은 바보. 내 아버지 세대 정도가 쓴 글에서 '착한 바보'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응답하라. 그 많던 착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 가지 않았다. 시대가 변했다. 착한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었다. 조금 손해보더라도 착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바보들은 만수처럼 파산당했다. 생존경쟁이 흔해진 말이 보여주듯 약간의 손해가 아닌 생존 그 자체를 놓고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만수들은 온정주의에 빠져 과거를 그리워하고 현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자연도태되었다. 투명인간, 그것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다른 이름이었다. 죽여도 처벌당하지 않고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벌거벗은 생명. 투명인간은 자본주의의 만신전에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잉여적 존재이며, 죽여도 처벌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2009년 투명인간들을 보았다. 자본주의의 수도가 되려는 꿈의 이미지로 가득 찬 서울의 한 복판에서 다섯 명이 경찰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죽었고, 그들의 장례식은 치뤄지지 않은 채 300일 넘게 순천의 냉동고에 보관되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정체성의 승인을 요구해야 했던 절규의 건너편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나누는 정치/법 권력의 서슬 퍼런 기준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보다 '시민'이란 개념에 좀 더 가깝지만 무자비한 폭력 앞에 스스로 '인간'임을 말하고, 누군가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상황은 '뼈와 살'이 인간의 충분조건이 더 이사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뼈와 살 위에 어떤 사회적, 문화적 코드를 덧입어야 인간으로 해독되는 상황은 현대사회를 수용소라 설명한 아감벤의 규정이 대한민국의 입시체제를 설명하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삶 전반에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네이버가 민음사가 후원하는 <열린연단> 첫 번째 강좌에서 인문학자 김우창은 이런 말을 남겼다.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 착하게 살기 위해 예수나 부처, 루터 급의 결단이 필요한 사회는 지속되기 힘들다.


 조금 모자라도 이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웃음을 주고 빛이 되는 만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 그런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시란 생각에 김종삼의 시 한 편을 남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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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8-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쉴레의 표지, 제가 가진 책은 알라딘에서 받은 두 개인데, 다른 것들도 갖고 싶군요. 말씀하신 그 아우라 말에요. 작품성을 보증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암튼

rendevous 2014-08-21 18:14   좋아요 0 | URL
쉴레 그림 표지 책들을 일렬로 쭉 줄세워 놓으면 뭔가...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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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름


덥다


글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에어콘 24도 정도의 쾌적한 영화관에서 영화보고 싶다

(17도나 18도는 조금 야만적인 온도 같고) 

















1. 스티븐 킹 - 닥터 슬립 


스티븐 킹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다. 이번 기회에 읽어보고 싶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재밌게 봐서 그 다음 이야기 궁금하기도 하고, 책 한 권 다 읽고 다음 책 고를 때 짧은 책에 손이 더 간다. 2권 짜리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이후로 안 읽다 신간평가단 덕분에 하진의 자유로운 삶과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2권이나 읽었다. 맞다. 신간평가단 덕 좀 보려는 거다. 


 


















2. 귀스타프 플로베르 - 감정 교육 


요즘 밀란 쿤데라 전집을 읽고 있었다(투명인간 도착 이후 중단) 밀란 쿤데라, 르네 지라르 등 프랑스 문학계의 거장들이 하도 플로베르 플로베르 하니까 이참에 읽어보고자 한다. 

p.s 밀란 쿤데라를 보니 나만의 소설사 만드는 것 + 자신이 젖줄을 대고 있는 문학사를 꿰는 것 - 문학사조의 흐름 속에서 사조에서 사조로 어떻게 넘어가고, 각각의 신 세대가 기성세대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생각해보는 독서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 발군의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 세계시민 - 세계문학 읽기 - '지도' 그려나가며 읽기!


 















3. 레이먼드 카버 - 대성당


저번에 추천한 적 있지만 아쉽게 단성되지 못한 작품. 그런데 양장으로 이렇게 나와 주면서 재도전의 기회가 생겼다. 

















4. 토니 모리슨 - 자비


노벨문학상 출신 작가 토니 모리슨의 <자비>. 빌러비드 밖에 못 읽어봤지만 그렇게 취향에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자비는 어떨지 호기심이 생겨서 추천해본다. 
















5. 2014 김유정문학상 - 이장욱 외 다수 


시, 소설, 평론, 러시아문학연구... 문단의 괴물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시집에 비해 소설은 못 읽어봐서 이번 기회에 단편이지만 읽어보고 싶어서 추천해본다. 2011년 젊은작가수상집 때 기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던 단편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장욱 월드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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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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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연순.박희석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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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령 퇴장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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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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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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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패밀리세일 덕으로 밀란 쿤데라 전집의 일부를 소장하게 되었다. 우스운 사랑, 생은 다른 곳에, 소설의 기술을 제외하곤 이미 소장하고 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농담-까지 합쳐 4/5 밀란 쿤데라 전집을 갖게 된 것이다. 당장 읽어야 할 책도 다 읽었고, 지금 당장 천착하고 있는 주제나 관심이 사라져서 무슨 책을 읽을까 책장을 살펴 보던 중 문득 전집을 독파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세계문학전집은 계속 출간되고 있고, 민음사의 경우 300권을 돌파하고 있기에 잘못 건들면 다치는(?) 상황이지만 15권의 밀란 쿤데라 전집, 확실한 동기부여와 고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 찬 독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쿤데라가 세르반테스-발자크-프루스트-카프카-곰브로비치의 자신만의 소설사를 갖고 있듯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보고 싶다는 욕구와 예의 가벼움/무거움의 문제, 에세이를 소설미학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도입한 작품세계의 독창성 등이 미학적으로 윤리적인 소설에 대한 고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장 얇은 <느림>부터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만남>이란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필립 로스에 대한 글이 있어 집중해서 읽었다. 


가속되는 역사 속의 사랑. 필립 로스, <욕망의 교수> 


글의 일부를 옮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관련된 모든 차원에서 성을 발견한다. 미국에서 소설은 도덕의 전복을 예고하고 동반하는데, 이 전복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1950년대만 해도 인정사정없는 청교도주의 안에서 답답해했는데, 그 후 단 십 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뀐다. 가벼운 첫사랑과 성행위 사이의 방대한 공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감상적인 무인 완충지대는 이제 섹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지 못한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냉혹하게 섹스와 대면하고 있다. 

 (...)필립 로스에게 있어서 성적 자유는 확실하고 집합적이며 평범하고 불가피하며 코드화된 하나의 주어진 상황에 불과하다. 그것은 극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서정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른다. 이보다 '더 이상'은 없다. 욕망에 반대되는 것은 더 이상 법이나 부모나 인습이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며, 유일한 적은 정체가 드러나고 환상이 깨져 버린 우리 자신의 벗은 몸이다. 필립 로스는 미국적 에로티시즘에 간한 위대한 역사가이다. 아울러 그는 버림받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마주할 때 느끼는 이 기이한 고독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하다.(p45~46)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에브리맨>을 접했을 때 받은 필립 로스에 대한 인상은 '어른'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인생 - 그러니까 소설을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와 씨름하는 소설가, 인생의 스승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생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는 '진실한' 인간. 폴란드계 유대인 미국 작가. 문호는 모르겠지만 거장이란 칭호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붙일 수 있는 작가.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통해 읽은 6권의 소설 중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성찰적인 작품(정서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소년이 온다>?!)  


 <미국의 목가>를 읽으면서 떠올랐던 작품이 있다. 아니 떠오른 정도가 2중주 수준으로 <미국의 목가> 텍스트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고하게 만든 텍스트.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예술가와 시민> 부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국의 목가>가 특정 설정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예술가의 입장에서 시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가만의 비애와 고통에 대해 설명하면서 타자화된 시민의 자기변호 및 반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올바른 미남과 아름답고 목가적인 미녀, 이들은 <토니오>의 머릿속에서 고뇌 없이, 그늘 없이 양지에서 즐거움을 탐닉하는 장밋빛 인생을 누릴 '승자'로 그려졌지만 <미국의 목가>는 이 건강한 시민의 철저한 전락과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그 몰락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스위드. 리뷰를 쓰기 위해 소설의 첫 장으로 돌아왔을 때 놀랐다. 이 소설이 '스위드'로 시작한다는 것을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이 삼음절은 <롤리타>의 롤리타만큼 마법 같은 단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름은 마법이었다(p.13)'. 이렇게 써놓고 있으니. 시모어 어빙 레보브. 본명은 알아두자. '우리 종족에 태어난 이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은 황금빛인 소년의 얼굴, 턱이 가파르고 왠지 비정해 보이는 그 바이킹 가면 같은 얼굴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정도면 <소나기>의 서울에서 전학 온 소녀보다 이질적이고 낯설었으리라. 가뜩이나 눈에 띄는 이질적인 외모의 스위드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지적 능력은 조금 떨어져보이지만 요즘 널리 쓰이는 '엄친아'라 해도 무방한 시민의 왕이었다. 


 '레보브 씨는 슬럼에서 자라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교양도 없었던 많은 유대인 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버리지 않고, 이미 열심히 노력해 대학 교육까지 받은 한  세대의 아들들 전체를 계속 몰아붙였다. 이 아버지들에게는 모든 일이 떨쳐낼 수 없는 의무이며, 옳은 길과 그른 길만 있지 그 중간은 없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민 1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거의 없다. 닥치고 돈 버는 것. 그것은 낯선 땅에 불시착한 씨앗이 생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돈균 평론가가 매일경제에 연재하고 있는 <사물의 철학> - 칠판 편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4&no=759162


 '`학교`라는 영어단어 `스쿨(school)`은 영어를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할 때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단어였다. 그 단어가 본래 그리스어(Σχολειο)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면서다. 


그리스 고전 유산을 이어받아 서양의 문화적 적통이 되려고 했던 로마는 이 단어를 자기들 말로 에콜(ecole)이라고 번역했다. 현재 프랑스어에서 `학교`라고 부르는 그 단어다. 

결과적으로 지금 `학교`라는 단어는 영미권에서는 그리스어식 표기로, 프랑스어권에서는 라틴식 표기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라틴어로 번역된 `에콜`은 본래 `여유`라는 뜻이다. 그들은 `학교`를 `여유`라는 일반명사를 이용하여 번역했다. 고대에는 노동하지 않는 계급인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교의 진정한 정신이 일상적 생존 본능과 거리를 두는 정신적 여유, 즉 반성과 성찰 같은 비판적 거리감각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는 대학 등록금이 거의 무료라고 한다. 언제 이런 복지체제가 갖춰졌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68 문화혁명이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좋은 기회가 있어 올해 초 싱가폴에서 한달 정도 체류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 만난 잉글랜드 출신 영어교사에게 68혁명에 대해 물었더니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해서 당황했었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많은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혹은 직장에 취직하기 전에 여행을 떠난다는데 학비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가능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대한민국은? 잘은 모르지만 '학'부모의 영향 아래 있는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정신적 여유를 잃고 살 거라 생각된다.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중학생들도 어느 대학 갈 것인지를 얘기한다고 한다. 사교육 줄인다고 어쩌구저쩌구 해봤자 입시제도 바꾸지 못하면 별 소용없다는 게 필자의 소견이다. '창조경제' 정부가 중시한다고 말하는 '실력'이 무얼 뜻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인터넷으로 손장난하는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다만...

 히틀러가 선거에 의해 당선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신적 여유의 부재. 아니 정신의 부재. 히틀러는 민중들에게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무너진 독일경제를 일으켜 세워줄 구세주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대통령.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재밌게도 용산참사로 인해 만들어진 작가선언 6.9은 용산참사를 대한민국판 아우슈비츠라 설명한다. 세월호 시국선언에 '아우슈비츠'가 호명되었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 조르조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가 호명되는 걸 보면 '일인당 국민 소득 3만불 지상주의(일인당 국민 소득 3만불이 되면 유럽식 복지가 가능하고 기타 등등 모든 게 해결되니 그때까지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자는 주의)'에 야만성에 치가 떨리고 토가 쏠린다. 지난 대선 얘기는 굳이 꺼낼 이유도 없지만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호에 실린 김진호 선생님의 글이 흥미로워 잠깐 얘기를 꺼내면 지난 대선은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의 대결구도였다는 것이다. 메시아주의가 마음에 안 들면 이렇게 고쳐도 무방할 것이다. 응답하라, 박정희. 응답하라, 노무현. 의료민영화 얘기가 다시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는데 이 나라 지도층(이라 쓰고 대가리라 읽는다)들은 정녕 국민들의 시체로 자신들의 윤택한 삶을 유지하려는 좀비가 되려 하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직후 한 보수논객이 진보정당이 시체로 장사하려고 한다는 망언을 한 걸 보면 단순히 좌우 대립을 넘어 이 나라에 생명관리정치와 호모 사케르, 목숨/생명과 돈의 교환관계가 무의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우리들의 '스위드'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아버지의 아바타로 자란다. 여기에 제동을 걸거나 방향전환을 할 만한 거리는 없어 보인다. 나는 이를 소극적 운명이라 부르고 싶다.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년기-아동기,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돼도 독립적 주체로 바로 서긴 불가능하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종속돼 있으니까. 스위드의 경우는 그의 인종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더 심했던 것 같다. '뭔가가 이 사람 위에 올라타 정지를 명령한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을 진부함의 표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에게 경고를 한 것이다-너는 어떤 것도 거스르면 안 돼.(p44)' 스위드에게 아버지는 한 사람이 아니다. 레보브를 '스위드'라는 이미지에 가둬놓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대중들, 이들은 아버지의 법의 공동편찬자들이다. 하지만 스위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연기한다. 아니 살아낸다. '스위드 레보브의 삶은, 내가 아는 한, 매우 단순하고 매우 평범했으며, 따라서 딱 미국인의 기질에 맞게 훌륭했다.(p56)' 최근에 유튜브에서 본 허경 선생님의 국립극단 강의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을 소개할까 한다. 아기 때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공통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는 이들이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사람들보다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들이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완벽하고 아름답게 불어를 구사한다는 것. 전자는 한국에 알게 되면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 간의 괴리가 심화되면서 분열에 이를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된 무지였고, 후자는 주류인 백인들과 다른 피부색으로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이들이 취해야 했던 자세-프랑스인보다 프랑스인답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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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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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만국의 중고등학생들이여, 세계문학으로 단결하라!

이렇게 외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세계문학을 일독하길 권하는 건 많이 봤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아무래도 세계라는 어감의 영향으로 국가별로 떠올려보면-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정도다(프랑스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 출연한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대로 국가를 대표할 만한 대문호는 없지만 보들레르, 랭보, 발자크, 앙드레 지드,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어 탄탄한 미드필더(?)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삼국지나 서유기, 초한지, 수호지 같은 작품들은 '중국고전'이란 독립된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느낌이라 세계문학의 첫 인상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고, 천일야화는 문학보다 순수한 이야기에 가까운 느낌이라 역시 거리감이 있다. 우리가 세계문학이란 단어의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세계'가 유럽에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세계문학이라기보단 유럽문학.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나 근대소설이 유럽에서 처음 생겨났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유수의 출판사들이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이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언어로 쓴 작품들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있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좋은 작품들도 한글로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중에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 같은 '젊은' 고전을 표방한 세계문학들이 나와 독자들과의 소통에 좀 더 다가서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를 다루고 있어 중고등학생 같은 젊은 독자들도 소설과 경험을 공유해 동시대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1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 리뷰는 반토막짜리 리뷰가 아니라 리뷰 아닌 리뷰가 될 것이다. 책이 선정되기 전까지 '하진'이란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적까지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였다. 재밌는 점은 한국에 잘 알려진 위화나 모옌, 쑤퉁, 옌롄커 같이 중국어가 아닌 영어를 작가언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소개에 따르면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접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 같은 경우 영어와 프랑스어의 모두 능통했는데 자신의 작가언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는 이력을 들은 적이 있고, 언어의 마술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경우도 러시아어와 영어 두 개의 작가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하진의 경우 영문학 박사학위까지 따긴 했지만 톈안먼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 영향으로 외국어(영어)를 작가언어로 채택'당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중국에 남은 작가도 있고, 해외로 망명한 작가도 있고, 그들 각자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지만 대략적인 흐름만 보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의해 의도된 선택이라는 점에서 하진은 영어에게 선택당했다, 이렇게 써보기로 한다. 


 전미도서상, 펜 포크너상, 퓰리처상 최종 후보 같은 화려한 수상내역도 그의 소설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평소 아시아권 작가들과 유독 친하지 않았던 내게 영어로 글을 쓰지만 중국의 뿌리를 두고 있는(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이번 기회는 특별했다. 이런저런 지면에서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건을 접하면서 이 사건이 중국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허핑턴포스트에서 천안문 사건을 기록한 사진들을 본 터라(http://www.huffingtonpost.kr/2014/06/05/story_n_5450192.html)

소설은 이 사건을, 정확히는 이 사건을 통과해낸 이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궁금했으면 열심히 다 읽고 꽉 찬 리뷰를 쓸 것이지... 할 말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편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시집 아니면 철학서, 감각의 찬란 아니면 사유의 혁신. 기체적, 무정형의 상상력 아니면 지구보다는 금성에 어울릴 밀도의 숨 막히는 지적 투쟁... 극과 극의 호흡으로 갈리다 보니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장편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은 가독성이 뛰어나서 그래도 읽는 맛이 있었다. 주워들은 말로 중국소설은 서사가 강하다는 말은 들은 적 있는데 그런 중국소설의 전통의 영향으로 하진 역시 풀어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했지만 저자소개를 보니 그런 서술적 문체가 하진 소설의 특징이자 미덕이라 하더라(역시 책에 있어서만큼은 의심보다 믿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자유로운 삶>의 첫 문장은 이렇다. '마침내 타오타오가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작품을 읽어 나갈수록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자유로운 삶1권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자유를 위해 불안으로 다가서는 소설이다. 주인공 난은 작가 하진처럼 톈안먼 사건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아내 핑핑과 함께 이주한다. 타오타오가 뒤늦게 부부와 합류하지만 '타오타오는 미국에서 부모를 만났다' 결과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 담지 못할 인물 내면의 불안한 심리변화를 작가는 차분하게 추적해나간다. L'Etranger - 불안의 원인은 이방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 이는 언제라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근원적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타오타오가 핑핑이 쓰던 잘못된 표현을 교실에서 썼다고 웃음거리가 된 에피소드는 약과이고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의 타자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kkk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최근에 토니 모리슨 관련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님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미국 내 대학내에서 kkk단 표식을 한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닌다는 말이 내겐 꽤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세상에 달라지긴... 역시 힘든 것이다) 이 같은 모든 예외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일상은 실상 항시 비상상황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그들의 계급도 이 불안의 한몫을 하지만 핑핑이 토로한 적 있듯 돌아갈 곳이 없는, 조국/고향을 등지고 떠나 이방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미아와 같은 그들의 처지가 불안의 핵이다.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잃어가고, 어떤 이는 중국에서의 남성이 누리던 권위의 박탈과 밑바닥 생활로의 급작스러운 추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하지만 자신보다 자신감 넘치는 남성에게 빼앗기고 만다. 작품을 쭉 읽어나가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는데 조금 뜬금없을 지도 모르지만 마이클 무어의 <식코>가 어른거렸다. 소설의 배경은 1992년이고, 영화의 배경은 200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차는 존재하지만 충분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할 때 건강(의료보험), 사랑에 끊임없이 균열이 발생하는 자본과 개인과의 불화 양상이 꽤 비슷해보였다. 저 '충분한'이란 단어의 모호함, 도대체 어느 정도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다운 삶-그러니까 건강할 권리(건강의 위협이 발생했을 때 치료받을 권리), 사랑할 권리를 보장받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삶/행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방을 쌓아야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불안을 마음 속에 집어넣어야 부족한 자본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가. 이방인의 미국에서 홀로서기는 그야말로 고통과 눈물의 대서사시이다. 이 지난하고 핍진한 투쟁에서 내면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고 생명력, '다시 한번'의 의지의 원천이 되는 건 가족 간의 사랑이고, 난의 경우 '시 쓰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 번 질문해봐야 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왜 시 같은 걸 쓰는가. 반대로 시 같은 걸 써야만 생을 버텨낼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글쓰기의 구원이 있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최근 글쓰기의 구원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글을 접한 기억을 공유하고자 한다. 6월 11일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에서 장장 8명의 시인과 4명의 평론가-출연진의 리스트를 공개하면 김민정, 김행숙, 박상수, 송승환, 이영광, 이원, 한강, 함성호/ 김수이, 양경언, 함돈균, (한 분의 이름이... ㅜ죄송합니다)가 참여한 '시민과 함께 하는 시 낭독회'가 열렸다. 막간을 이용해 에피소드를 전하면 거기서 필자는 낭송자로 선정되어 이영광 시인의 '아프면 안 된다던 말'을 낭송하고, 부상으로 '나무는 간다' 시집을 받아 시인께 친필사인을 받았다 ㅜㅜ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감상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자극했던 시집이었던만큼 나름 각별한 시집을 시인의 사인과 애정 어린 코멘트와 함께 받게 되어 나에겐 정말 '선물' 그 자체였다.(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놀러와주세요 ^^ http://blog.naver.com/yadohy6407/20197297971)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함돈균 평론가는 황병승 시인의 <육체쇼와 전집>에 대한 평론을 낭송해주셨는데...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정말 뼈의 뼈만 남긴, 그래서 상대방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 폭력적 언술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 문장이다. 


 시인은 실패의 기록을 고백함으로써, 아니 고백의 언어로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진실의 윤리에 닿고,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내일은 프로'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에 실패한 시인에게 남은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패배자의 이미지, 절망이나 좌절의 포즈가 아니라 '내일은 프로/내일은 프로'라는 희망의 자세였다. 이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는 다시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으로 돌아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대해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 <얼굴 없는 노래> 중 


 효율성을 신봉하며 인간을 무자비한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에서 성공과 승리는 무엇에 대한 성공과 승리이며, 무엇을 위한 성공과 승린가.죽음과 고통을 은폐한 야만적 체제에 대한 반성적 물음 없이 주어진 답을 푸는 기계적 운동을 삶이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작동이나 실행, 주어진 명령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업그레이드'의 신화에 인간의 이야기는 없다. 승리와 성공의 제2의 자연이 지배하고 있는 신화에서 깨어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형식은 실패이다.실패는 패배와 다르다. 히틀러가 제국의 건설에 실패했다면 돈 키호테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어떤 패배는 성공보다 더 멀리 우리를 데려다놓는다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가능의 세계에서 정답을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의 대결을 통해 질문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일 것이다.1대 99. 1명의 성공자와 99명의 패배자를 낳는 구조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함에 기인해 공멸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실패의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성공의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성공의 실패가 아닌 실패의 성공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그 어떤 대상에 대한 투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투쟁, 자신 자신의 실패와 투쟁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세계의 성공의 신화, 성공성의 제 2 자연을 찢고 패배성의 자연을 불러내는 시인은 '실패의 성자'이다. 제대로 된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로 말을 하는 그는 실패에 실패함으로써, 성공이 보여주지 못한 무엇을 보여줬다. 한 진실한 영혼은 이 실패를 읽고, 구원의 가능성이라 썼다.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 빈약한 부분을 채우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리뷰다. 하지만 이 실패가 성공보다 더나은 실패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한 줄을 '덤'으로 남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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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6-2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리뷰라기 보다는 전문가가 쓴 한 편의 컬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네요. 특히 마지막 문단. 멋있어요~. 천안문 사진도 낭독하신 시도 잘 봤습니다.

하진의 이 소설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처럼 느껴졌어요. 기록의 뭉치 같았어요. 아주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모이고 또 모이고 모여서 소설이라는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깊이있는 진솔함이 느껴졌어요. 큰 사건이 없어도, 반전이 없어도, 화려한 문장이나 대단한 사유가 없어도 단지 생각과 일상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고나 할까요

rendevous 2014-07-10 23:50   좋아요 0 | URL
하진의 이 소설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처럼 느껴졌어요. 기록의 뭉치 같았어요. 아주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모이고 또 모이고 모여서 소설이라는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깊이있는 진솔함이 느껴졌어요. 큰 사건이 없어도, 반전이 없어도, 화려한 문장이나 대단한 사유가 없어도 단지 생각과 일상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고나 할까요

이 문장 읽고 <자유로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더니 제가 읽어내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판단하려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 오만을 반성하게 됩니다. '한 번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밀란 쿤데라의 문장을 상기하면서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기다림>과의 만남을 기다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