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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평점 :
세계문학. 만국의 중고등학생들이여, 세계문학으로 단결하라!
이렇게 외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세계문학을 일독하길 권하는 건 많이 봤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아무래도 세계라는 어감의 영향으로 국가별로 떠올려보면-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정도다(프랑스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 출연한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대로 국가를 대표할 만한 대문호는 없지만 보들레르, 랭보, 발자크, 앙드레 지드,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어 탄탄한 미드필더(?)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삼국지나 서유기, 초한지, 수호지 같은 작품들은 '중국고전'이란 독립된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느낌이라 세계문학의 첫 인상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고, 천일야화는 문학보다 순수한 이야기에 가까운 느낌이라 역시 거리감이 있다. 우리가 세계문학이란 단어의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세계'가 유럽에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세계문학이라기보단 유럽문학.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나 근대소설이 유럽에서 처음 생겨났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유수의 출판사들이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이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언어로 쓴 작품들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있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좋은 작품들도 한글로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중에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 같은 '젊은' 고전을 표방한 세계문학들이 나와 독자들과의 소통에 좀 더 다가서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를 다루고 있어 중고등학생 같은 젊은 독자들도 소설과 경험을 공유해 동시대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1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 리뷰는 반토막짜리 리뷰가 아니라 리뷰 아닌 리뷰가 될 것이다. 책이 선정되기 전까지 '하진'이란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적까지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였다. 재밌는 점은 한국에 잘 알려진 위화나 모옌, 쑤퉁, 옌롄커 같이 중국어가 아닌 영어를 작가언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소개에 따르면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접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 같은 경우 영어와 프랑스어의 모두 능통했는데 자신의 작가언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는 이력을 들은 적이 있고, 언어의 마술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경우도 러시아어와 영어 두 개의 작가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하진의 경우 영문학 박사학위까지 따긴 했지만 톈안먼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 영향으로 외국어(영어)를 작가언어로 채택'당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중국에 남은 작가도 있고, 해외로 망명한 작가도 있고, 그들 각자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지만 대략적인 흐름만 보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의해 의도된 선택이라는 점에서 하진은 영어에게 선택당했다, 이렇게 써보기로 한다.
전미도서상, 펜 포크너상, 퓰리처상 최종 후보 같은 화려한 수상내역도 그의 소설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평소 아시아권 작가들과 유독 친하지 않았던 내게 영어로 글을 쓰지만 중국의 뿌리를 두고 있는(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이번 기회는 특별했다. 이런저런 지면에서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건을 접하면서 이 사건이 중국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허핑턴포스트에서 천안문 사건을 기록한 사진들을 본 터라(http://www.huffingtonpost.kr/2014/06/05/story_n_5450192.html)
소설은 이 사건을, 정확히는 이 사건을 통과해낸 이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궁금했으면 열심히 다 읽고 꽉 찬 리뷰를 쓸 것이지... 할 말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편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시집 아니면 철학서, 감각의 찬란 아니면 사유의 혁신. 기체적, 무정형의 상상력 아니면 지구보다는 금성에 어울릴 밀도의 숨 막히는 지적 투쟁... 극과 극의 호흡으로 갈리다 보니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장편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은 가독성이 뛰어나서 그래도 읽는 맛이 있었다. 주워들은 말로 중국소설은 서사가 강하다는 말은 들은 적 있는데 그런 중국소설의 전통의 영향으로 하진 역시 풀어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했지만 저자소개를 보니 그런 서술적 문체가 하진 소설의 특징이자 미덕이라 하더라(역시 책에 있어서만큼은 의심보다 믿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자유로운 삶>의 첫 문장은 이렇다. '마침내 타오타오가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작품을 읽어 나갈수록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자유로운 삶1권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자유를 위해 불안으로 다가서는 소설이다. 주인공 난은 작가 하진처럼 톈안먼 사건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아내 핑핑과 함께 이주한다. 타오타오가 뒤늦게 부부와 합류하지만 '타오타오는 미국에서 부모를 만났다' 결과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 담지 못할 인물 내면의 불안한 심리변화를 작가는 차분하게 추적해나간다. L'Etranger - 불안의 원인은 이방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 이는 언제라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근원적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타오타오가 핑핑이 쓰던 잘못된 표현을 교실에서 썼다고 웃음거리가 된 에피소드는 약과이고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의 타자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kkk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최근에 토니 모리슨 관련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님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미국 내 대학내에서 kkk단 표식을 한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닌다는 말이 내겐 꽤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세상에 달라지긴... 역시 힘든 것이다) 이 같은 모든 예외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일상은 실상 항시 비상상황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그들의 계급도 이 불안의 한몫을 하지만 핑핑이 토로한 적 있듯 돌아갈 곳이 없는, 조국/고향을 등지고 떠나 이방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미아와 같은 그들의 처지가 불안의 핵이다.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잃어가고, 어떤 이는 중국에서의 남성이 누리던 권위의 박탈과 밑바닥 생활로의 급작스러운 추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하지만 자신보다 자신감 넘치는 남성에게 빼앗기고 만다. 작품을 쭉 읽어나가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는데 조금 뜬금없을 지도 모르지만 마이클 무어의 <식코>가 어른거렸다. 소설의 배경은 1992년이고, 영화의 배경은 200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차는 존재하지만 충분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할 때 건강(의료보험), 사랑에 끊임없이 균열이 발생하는 자본과 개인과의 불화 양상이 꽤 비슷해보였다. 저 '충분한'이란 단어의 모호함, 도대체 어느 정도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다운 삶-그러니까 건강할 권리(건강의 위협이 발생했을 때 치료받을 권리), 사랑할 권리를 보장받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삶/행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방을 쌓아야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불안을 마음 속에 집어넣어야 부족한 자본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가. 이방인의 미국에서 홀로서기는 그야말로 고통과 눈물의 대서사시이다. 이 지난하고 핍진한 투쟁에서 내면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고 생명력, '다시 한번'의 의지의 원천이 되는 건 가족 간의 사랑이고, 난의 경우 '시 쓰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 번 질문해봐야 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왜 시 같은 걸 쓰는가. 반대로 시 같은 걸 써야만 생을 버텨낼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글쓰기의 구원이 있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최근 글쓰기의 구원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글을 접한 기억을 공유하고자 한다. 6월 11일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에서 장장 8명의 시인과 4명의 평론가-출연진의 리스트를 공개하면 김민정, 김행숙, 박상수, 송승환, 이영광, 이원, 한강, 함성호/ 김수이, 양경언, 함돈균, (한 분의 이름이... ㅜ죄송합니다)가 참여한 '시민과 함께 하는 시 낭독회'가 열렸다. 막간을 이용해 에피소드를 전하면 거기서 필자는 낭송자로 선정되어 이영광 시인의 '아프면 안 된다던 말'을 낭송하고, 부상으로 '나무는 간다' 시집을 받아 시인께 친필사인을 받았다 ㅜㅜ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감상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자극했던 시집이었던만큼 나름 각별한 시집을 시인의 사인과 애정 어린 코멘트와 함께 받게 되어 나에겐 정말 '선물' 그 자체였다.(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놀러와주세요 ^^ http://blog.naver.com/yadohy6407/20197297971)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함돈균 평론가는 황병승 시인의 <육체쇼와 전집>에 대한 평론을 낭송해주셨는데...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정말 뼈의 뼈만 남긴, 그래서 상대방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 폭력적 언술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 문장이다.
시인은 실패의 기록을 고백함으로써, 아니 고백의 언어로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진실의 윤리에 닿고,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내일은 프로'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에 실패한 시인에게 남은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패배자의 이미지, 절망이나 좌절의 포즈가 아니라 '내일은 프로/내일은 프로'라는 희망의 자세였다. 이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는 다시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으로 돌아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대해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 <얼굴 없는 노래> 중
효율성을 신봉하며 인간을 무자비한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에서 성공과 승리는 무엇에 대한 성공과 승리이며, 무엇을 위한 성공과 승린가.죽음과 고통을 은폐한 야만적 체제에 대한 반성적 물음 없이 주어진 답을 푸는 기계적 운동을 삶이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작동이나 실행, 주어진 명령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업그레이드'의 신화에 인간의 이야기는 없다. 승리와 성공의 제2의 자연이 지배하고 있는 신화에서 깨어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형식은 실패이다.실패는 패배와 다르다. 히틀러가 제국의 건설에 실패했다면 돈 키호테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어떤 패배는 성공보다 더 멀리 우리를 데려다놓는다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가능의 세계에서 정답을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의 대결을 통해 질문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일 것이다.1대 99. 1명의 성공자와 99명의 패배자를 낳는 구조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함에 기인해 공멸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실패의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성공의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성공의 실패가 아닌 실패의 성공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그 어떤 대상에 대한 투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투쟁, 자신 자신의 실패와 투쟁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세계의 성공의 신화, 성공성의 제 2 자연을 찢고 패배성의 자연을 불러내는 시인은 '실패의 성자'이다. 제대로 된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로 말을 하는 그는 실패에 실패함으로써, 성공이 보여주지 못한 무엇을 보여줬다. 한 진실한 영혼은 이 실패를 읽고, 구원의 가능성이라 썼다.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 빈약한 부분을 채우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리뷰다. 하지만 이 실패가 성공보다 더나은 실패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한 줄을 '덤'으로 남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