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아도르노의 페이퍼가 제공되었지만 3강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이트를 보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계성>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아를 구축하는 데 이 관계의 형식에 리비도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자아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차적 객체를 만들어내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데 반해 수동적 자아는 대상과 닮으려고 하는 모방(미메시스)으로 타자동일화를 수행한다. 앞선 강의에서 지적했던 서양의 시각의 절대적 우위성, 주체적 자아의 폭력성에 반하는 미메시스적 자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언급한 벤야민뿐만 아니라 '사물시'의 릴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주객을 분리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인도-유럽어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오정희를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해주셨던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이어졌다. 언어는 사물을 객체의 지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언어로 호명된 사물/대상. 바르트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 권력적 언어에서 타자동일화를 수행하는 탈코드적 언어로 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철학이 육체성의 언어이고, 따라서 에로틱하며, 소설이라는 설명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였던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은 아무래도 문학적 로고스를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하는 ^^ 헤겔에 대한 삽화가 재밌었는데 어렸을 때 정시에 '댕~댕~' 울렸던 성당의 종소리가 헤겔에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헤겔의 치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철학은 죽음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정신의 요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이 일종이 통과제의인데 통과제의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구강기에 머물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그 대표적 인물로 프루스트를 꼽았다. 육체가 병약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상실한 어머니의 육체, 불가능한 애도의 공간이었을 거라고 했다. 애도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난 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갔는데 거기서 70 먹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고 시인은 할머니에게 "그 기억을 믿으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하나는 자기연민일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감정의 내용이 원한일지라도 리비도가 운동하긴 할테니까. 

 

 그런데 통과제의를 잘 거쳤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건강성도 실은 자신의 일부를 타자화시켰을 때 갖춰지는 균형이라고 했다. 남성적 자아는 뱉는다, 여성적 자아는 삼킨다. 독일어 fressen이란 표현.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 여성은 남성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남성을 더 잘 알고 있다(남성 시스템에 과잉적응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다), 하인은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 신하는 군주보다 군주를 더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것, '혐오스러운 맛있는 음식'. 이 혐오스러운 맛있음의 양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폭력이 '혐오스러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먹기와 먹히기의 사례로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과 단식광대를 예시로 들었다.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여동생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갖다주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배불러서가 아니다.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이상 단식을 지속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단식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어'  먹기에서 쾌락은 먹히기에서 온다고 한다. 나Ich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먹기는 단순히 영양소섭취에 머물지만 자아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가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성을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때 도취는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마무리하고 아도르노의 역사철학, 문명사적 논의로 이어지면서 차원을 확장했다. 

 

선사 시대(애니미즘) - 마술적 단계 - 신화 단계 - 종교 단계 -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이 문명의 발전사를 인간의 주체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아도르노의 틀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신화인데,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원천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신화는 '자연'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권력'. 이 신화의 서사가 자연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배제와 추방이 이뤄진다. 특히 근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이었고, 이 근대성의 폭력에 반발해 다양성을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 뒤따랐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 근대라는 시스템이, 아우슈비츠의 참극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사형선고를 받은 근대(화)가 이성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근대화는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실상은 폭력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주먹도끼나 돌도끼가 아닌 원자폭탄 같은 첨단과학기술이나 관료제 같은 복잡한 법-시스템의 폭력으로 대체된 것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자들이 로그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에 대한 숙지(혐오스러운 맛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와 법폭력 이전의 근원적 폭력으로서, 폭력의 원형식으로서 언어/이성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p.s 어떤 분이 질문해주셔서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공부의 존재론/윤리학이랄까. 공부하기 힘든 시대이고, 공부를 하면 끝에는 그리스 시대처럼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소극적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았지만(멜랑콜리커라서 그런걸까?)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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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립도서관에 꽂혀 있는 녹색평론 1-2월호를 읽었다. 작년 9월 29일 시민행성에서 강의하신 나희덕 시인의 <대화적 스승 무지한 스승> 강의록을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에서 제안한 예술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 아니 길러낸다기보다 학생 내면에 잠재된 가능성을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 출처가 불분명해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필자가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청소부와 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의 문화적 수준에 대해 부러워했다는 내용.

2. 스마트폰의 유해성을 중점적으로 논의한 대담도 재밌게 읽었다. 대담자로 나오신 시민운동가 분들이 참여한 EBS토론도 봤던 터라 생각을 연장해볼 수 있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직접 참여했던 토론회에서 '전문가' 어른들이 스마트폰이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 등등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아이들을 의식화하려는 계몽적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접근으로는 학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규제하는 걸 부추길 수 있겠지만 아이 스스로 자제력을 키우고 조절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적'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중독된 아이를 대화와 교육적 접근만으로 회유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보이는 동생을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대화를 '잘' 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겠지만 '가장 가까운 타자'인 가족 간 소통불능성이랄까... 외부의 도움을 청해볼 생각이다.

3. 사색/사유/고독 불능의 사태로 몰아가는 '스마트'폰은 학생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침해하고 있지만 정부는 스마트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이를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유아. 엄마들이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어준단다. 부모는 죄를 짓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무지를 탓하기 이전에 아무런 법적 규제나 공론화에 관심이 없는 정부와 핸드폰 파는 데 눈 먼 대기업을 비판해야 겠지만 시민사회에 스마트폰의 악영향에 대한 인식이 뿌리내리기 전까지 스마트폰이 뿌리내릴 몸들을 생각하면 무서운 이미지들이 육박해들어온다. 피해는 낮은 곳에서 발생한다. 스마트폰 랜덤채팅을 통한 여중생/여고생 성매매. 특목고나 자사고, 강남 지역의 아이들의 경우 스마트폰이 없거나 2G폰을 쓰는 비율이 높다는 내용이 대담에 나온다. 법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드러난 법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정의로 이끄는 법-폭력.

4. 작년 시민행성에서 들었던 도정일 선생님의 말씀.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도 스마트폰하느라 탈출하지 못했다는 내용. 지나가던 말씀으로 가볍게 던지셨는데 그땐 아마 평소에 대학강단 내지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부정적 효과에 대한 걱정이 크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라고 이해했다. 만약 스마트폰이 문제라 치더라도 누구/무엇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스마트폰에 중독된 당사자? 스마트폰을 사준 부모? 이렇게 중독성이 높은 유해상품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 그 스마트폰을 각종 혜택으로 치장해 팔아먹은 핸드폰 장사꾼들? 자본주의 사회에선 피해자/가해자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대기권 내에선 우리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세월호이지 않을까.

5. 중독. 작년 6월 7일 시민행성에서 진행한 세월호 시민 집담회에서 진은영 시인은 우리 모두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녹색평론 대담에서 김종철 선생님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쓸데 없이 이것저것하게 된다고 했다. 나도 평소에 책이 잘 안 읽힐 때 인터넷 사이트를 돌며 글을 봤던 습관이 있어 격하게 공감했다. 포털사이트에 걸린 기사들, 씨네21, 웹진 문장, 예스24 칼럼들, 페이스북, 대산문화, 민연, 블로그 등등... 하지만 그렇게 '발동'이 걸려 게걸스럽게 조각글을 읽을 때는 긴 글을 소화하기 무척 힘들었고, 읽고 나서도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모니터를 1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머리가 조금 띵해지고, 열받는 느낌이 드는데 전자파에 맷집이 약한 것 같다. 운 좋게 노트북이 고장났고 3달 가까이 노트북 없이 살고 있는 중이다. 필요할 땐 시립도서관 정보자료실을 이용하는 데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최대시간이 3시간이라 쓸데없이 서핑하는 시간을 줄이게 된다. 무엇보다 노트북으로 흘렀던 리비도로 인한 희미한 공허감, 권태감으로부터 해방된 게 최대의 수확이다. 도서관에 올 일이 많아지니 종이신문도 읽게 되고, 인터넷으로 딴짓(?)도 안 하게 되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도 좀 더 집중력이 붙은 것 같다. 문제는 이제 노트북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번 중독되면 끊기는 어렵지만 재개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는 중독의 위력을 상기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보게 된다. 조금 거창하게 이런 생각도 덧붙여보기도 한다. 중독된, 오염된 몸을 어떻게 정화할 것인지, 해방할 것인가.

6. 술, 담배 말고 한국형 중독 금은동을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스마트폰/SNS/야동/치킨(육식)/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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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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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분의 영도

 

기분stimmung. 기분.

 

 

기분은 무엇인가. 기분은 감정, 정서, 느낌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명확히 구분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 명확한 구분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런 기분이 있다. 그런 기분. 언어의 칼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대명사'로 에둘러 설명할 요량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남근 중심- 팔루스 - 로고스 중심주의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것만 전달되면 된다.

 

이번엔 느낌. 느낌.

 

 

기분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보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좀 더 기분과 느낌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그와 만나기 전, 이를 테면 약속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웃음은 부서진 발음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언어의 질서를 뒤틀린 균열에서 웃음은 흘러나온다. 새어나온다. 논리의 그물을 포섭되지 않고 삐져나온 감정의 생동. 그런 웃음이 나온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건 좋은 기분일까, 좋은 느낌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무게추가 좀 더 기우는 쪽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느낌 쪽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면 기분은 희미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안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괴팍하게 나눠본다면 느낌은 액체이고, 기분은 기체이다. 느낌이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따른 반작용, 입력에 따른 출력으로 생성돼 농도가 짙다면 기분은 반대로 행동-사건에 대한 예감,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직접적 구체적 행동/사건에 대한 느낌이 아닌 주변 공기에 대한 느낌이라서 농도가 묽다. 

 

이 어설픈 정리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지만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의의를 두고 이렇게 정리해보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러 가는 동안 드는 건 좋은 기분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와 정말 잘 어울렸을 때, 그래서 네가 이전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사랑스러울 때, 신기하리만치 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드는 건 좋은 느낌이다.

 

기분이 부사라면, 느낌은 형용사? 

나는 내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느낌은 너와 나 사이 상냥한 무릎의 각도에서 나온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읊조리다 보면 좋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는 이미 일종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미 날씨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 마음의 지형을 주조한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기후이다. 등등.   

 

1 기분은 어떻게 오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문제는 형식. 화살처럼 한 점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강렬하게 꽂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비에 젖은 봄의 저녁공기 같은,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빗방울에서 느껴지는 온기 같은, 어제 같이 바람이 매서운 날 어묵국물이 뿜어대는 팔팔한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느낌적인 느낌. '~~'적인 것이란 표현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그 틀에서 삐져나오면서 매순간 자신을 재정의하는 존재를 붙잡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기분적인 기분이란 표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기분은 좀 더 흐릿하고 희미하고 큰 단위여서 한 번에 전체를 포착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나 생각된다.

 

2014.6.7 시민행성에서 세월호 집담회에 참여했다. 철학자, 시인, 평론가 등과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무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해 조금씩 기분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갖 문자매체에서 세월호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기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의 서사적 과정 파악의 부재와 나 자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 한 마디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구조과정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쁜 놈/년'인지,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장? 배에 탄 승무원들? 유병언 회장? 무능한 해경?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허위보도한 언론? 언론에게 그렇게 보도하라고 입김을 넣은 검은 입? 위기상황 속에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모르겠다. 몰라서 슬픔도 모호하다. 어정쩡한 슬픔. 슬픈 일인 줄 알겠는데 왜 슬퍼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 되는 슬픔. 멜랑콜리적인 것. 슬픈 느낌이 아니라 슬퍼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슬퍼하지 못하는. 잘 안 슬픈. 잘 안 슬퍼서 잘 지내는 것 같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잘 지내지 못해서 슬픈, 슬픈데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게 슬픈, 물음표 같은 슬픔.

 

느낌은 

즉각적으로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오고

가버리곤 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김소연, 그래서_수학자의 아침)

 

9월 24일 북촌창우 극장. 이 두 마디면 됐다. 시의 힘, 낭독의 힘, 슬픔의 힘. 그 말과 소리와 느낌엔 마술적, 주술적, 기적적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1월 31일 대학로 이음 책방에서 책을 읽다 304 낭독회 낭독문이 배달된 걸 보고 시간 맞춰 낭독회로 자리를 옮겼다.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들었던 시인 선생님이 내게 글을 써서 낭독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선생님이 애용하는 '마음을 뒤척여보라는' 말과 함께. 뒤척여보는 척하다 보면 뒤척여지기도 한다. 얻어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으로 써낸 글을 낭독하고 내 안의 부채감, 죄의식이 씻겨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무감하고 무정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을 감추려 한껏 과장된 포즈를 문인들이 득실거리는 낭독회에서 처참히 들키고 발가벗겨 질까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기분을 모으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느낌들이 모여 하나의 기분을 이루길, 또 그 기분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기분을 증폭시킬 수 있길, 그 슬픔과 애도가 하나의 정치학으로 발명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물과 차가움, 기다림과 배신에 세월호적 감각을 대입해보는 것, 이미 흘러가버린 어둠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한 몸부림, 뒤척임을 피하지 않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 한겨레에 편지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된 고통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으로 점철된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읽고 있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읽고 있다. 그렇게 불러낸 기분이 모이고 모여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강을 이루면 크게 한 번 쉼호흡하고 잠겨보리라. 작년 2월 타국의 수영장에서 발버둥처럼 필사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필사적이고 절박한 글쓰기는 카프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분 속으로 잠겨보기 위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애도의 기분을 내는 글이 아닌 기분에 젖어든 글, 읽는 사람의 기분까지 젖어들 수 있을 글이 나오면 그때 그 자리에 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도의 유효기간은 없을 테니까.  

 

2 기분은 어떻게 머무는가

 

금요일에 돌아오렴에 앞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단행본으로 묶이기 전부터 종로 반디앤루니스에서 서서, 쪼그리고 앉아서 읽었다. 김애란과 진은영의 글의 정서적 파장이 가장 짙었다. 뭐라고 썼는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글에서 받은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간절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디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흔들렸는지 그 물리적 파동의 강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분은 논리적 구조가 아닌 정서적 끈기에 의해 머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제 몸에 녹여내기 위한 부단한 몸과 마음의 부림들.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타자의 슬픔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슬픔이 자라기 시작한다면 기분의 공존co-existence는 가능하리라. 우리는 이를 슬픔의 연대, 애도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시인 이성복이 문학을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이라 명명했던 것처럼 불가능은 자신을 한 번 더 살아냄으로써 마이너스의 제곱이 플러스가 되듯 불가능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가까스로(심보선 시인이 이 표현을 애용한다고 한다).

 

 금요일에 돌아오렴과 눈 먼자들의 국가를 비교해본다면 전자는 유가족들의 슬픔의 속살을 (만져)볼 수 있다면 후자는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자세, 특히 타인의 슬픔을 육화하는 여성적 애도에 대해 많은 참조점을 주었다. 전자가 고통의 실체를 느끼게 해줬다면 후자는 그 고통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지, 그 고통을 어떻게 끌어안아 내 삶의 영역으로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정치학적, 철학적, 그러니까 학문적 접근이 이뤄져야 좀 더 깊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볼 수 있겠으나 시민사회 차원에서 세월호 사건을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삼는 자세가 없다면 '사회개조', 변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애도와 치유가 의사와 환자-개인의 영역이 아닌 공동체의 영역이란 것, 그런데 여기에 대고 경제적 침체를 운운하는 입이 직접적으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생긴 소시민들이 아닌 국가였다는 것, 누구보다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 이 정부와 광화문에서 폭식투쟁한 이들은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다. 왜 눈 먼자들의 국가인지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 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우리의 눈은 다시 침침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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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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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분의 영도

 

기분stimmung. 기분.

 

 

기분은 무엇인가. 기분은 감정, 정서, 느낌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명확히 구분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 명확한 구분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런 기분이 있다. 그런 기분. 언어의 칼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대명사'로 에둘러 설명할 요량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남근 중심- 팔루스 - 로고스 중심주의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것만 전달되면 된다.

 

이번엔 느낌. 느낌.

 

 

기분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보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좀 더 기분과 느낌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그와 만나기 전, 이를 테면 약속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웃음은 부서진 발음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언어의 질서를 뒤틀린 균열에서 웃음은 흘러나온다. 새어나온다. 논리의 그물을 포섭되지 않고 삐져나온 감정의 생동. 그런 웃음이 나온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건 좋은 기분일까, 좋은 느낌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무게추가 좀 더 기우는 쪽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느낌 쪽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면 기분은 희미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안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괴팍하게 나눠본다면 느낌은 액체이고, 기분은 기체이다. 느낌이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따른 반작용, 입력에 따른 출력으로 생성돼 농도가 짙다면 기분은 반대로 행동-사건에 대한 예감,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직접적 구체적 행동/사건에 대한 느낌이 아닌 주변 공기에 대한 느낌이라서 농도가 묽다. 

 

이 어설픈 정리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지만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의의를 두고 이렇게 정리해보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러 가는 동안 드는 건 좋은 기분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와 정말 잘 어울렸을 때, 그래서 네가 이전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사랑스러울 때, 신기하리만치 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드는 건 좋은 느낌이다.

 

기분이 부사라면, 느낌은 형용사? 

나는 내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느낌은 너와 나 사이 상냥한 무릎의 각도에서 나온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읊조리다 보면 좋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는 이미 일종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미 날씨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 마음의 지형을 주조한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기후이다. 등등.   

 

1 기분은 어떻게 오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문제는 형식. 화살처럼 한 점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강렬하게 꽂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비에 젖은 봄의 저녁공기 같은,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빗방울에서 느껴지는 온기 같은, 어제 같이 바람이 매서운 날 어묵국물이 뿜어대는 팔팔한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느낌적인 느낌. '~~'적인 것이란 표현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그 틀에서 삐져나오면서 매순간 자신을 재정의하는 존재를 붙잡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기분적인 기분이란 표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기분은 좀 더 흐릿하고 희미하고 큰 단위여서 한 번에 전체를 포착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나 생각된다.

 

2014.6.7 시민행성에서 세월호 집담회에 참여했다. 철학자, 시인, 평론가 등과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무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해 조금씩 기분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갖 문자매체에서 세월호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기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의 서사적 과정 파악의 부재와 나 자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 한 마디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구조과정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쁜 놈/년'인지,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장? 배에 탄 승무원들? 유병언 회장? 무능한 해경?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허위보도한 언론? 언론에게 그렇게 보도하라고 입김을 넣은 검은 입? 위기상황 속에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모르겠다. 몰라서 슬픔도 모호하다. 어정쩡한 슬픔. 슬픈 일인 줄 알겠는데 왜 슬퍼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 되는 슬픔. 멜랑콜리적인 것. 슬픈 느낌이 아니라 슬퍼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슬퍼하지 못하는. 잘 안 슬픈. 잘 안 슬퍼서 잘 지내는 것 같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잘 지내지 못해서 슬픈, 슬픈데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게 슬픈, 물음표 같은 슬픔.

 

느낌은 

즉각적으로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오고

가버리곤 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김소연, 그래서_수학자의 아침)

 

9월 24일 북촌창우 극장. 이 두 마디면 됐다. 시의 힘, 낭독의 힘, 슬픔의 힘. 그 말과 소리와 느낌엔 마술적, 주술적, 기적적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1월 31일 대학로 이음 책방에서 책을 읽다 304 낭독회 낭독문이 배달된 걸 보고 시간 맞춰 낭독회로 자리를 옮겼다.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들었던 시인 선생님이 내게 글을 써서 낭독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선생님이 애용하는 '마음을 뒤척여보라는' 말과 함께. 뒤척여보는 척하다 보면 뒤척여지기도 한다. 얻어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으로 써낸 글을 낭독하고 내 안의 부채감, 죄의식이 씻겨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무감하고 무정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을 감추려 한껏 과장된 포즈를 문인들이 득실거리는 낭독회에서 처참히 들키고 발가벗겨 질까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기분을 모으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느낌들이 모여 하나의 기분을 이루길, 또 그 기분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기분을 증폭시킬 수 있길, 그 슬픔과 애도가 하나의 정치학으로 발명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물과 차가움, 기다림과 배신에 세월호적 감각을 대입해보는 것, 이미 흘러가버린 어둠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한 몸부림, 뒤척임을 피하지 않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 한겨레에 편지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된 고통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으로 점철된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읽고 있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읽고 있다. 그렇게 불러낸 기분이 모이고 모여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강을 이루면 크게 한 번 쉼호흡하고 잠겨보리라. 작년 2월 타국의 수영장에서 발버둥처럼 필사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필사적이고 절박한 글쓰기는 카프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분 속으로 잠겨보기 위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애도의 기분을 내는 글이 아닌 기분에 젖어든 글, 읽는 사람의 기분까지 젖어들 수 있을 글이 나오면 그때 그 자리에 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도의 유효기간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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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 Trauer und melancholie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저명한 애도와 우울증 논의를 바탕으로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힐링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뗐습니다. 힐링을 '하는' 주체는 무의지적, 무의도적으로 우월, 예외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다가서려 해도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힐링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뜸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도 높고,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결정적'으로 받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 

 

 선생님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너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 또 너를 만져보고 싶다. 한겨레 신문에 유가족들의 편지가 실리는데 저도 거기서 너를 한 번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비식별역에서 묻혀 있는 9명의 실종자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접촉욕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감각성과 접촉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했습니다. 접촉이 단절된 채 오직 시각으로만 향유하는 온라인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고,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도 양성화되지 않았을 뿐 음지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중, 고등학생들 중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야동중독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서구의 역사는 시각의 역사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사물/자연을 파악해 자연을 인간화, 도구화해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오히려 눈을 찌르는(부정하는) 결말을 통해 눈의 이성이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승인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프로이트의 말하기-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를 활용하는 방식에 유념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자신이 진찰한 집단 내에서 도출된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의 외교적 글쓰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만으로도 자신의 결론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둘을 연결하는 접속사 'und'(영어의 and)에 주목했습니다. 이 등위접속사는 양가성을 띠는데 1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치적으로(versus의 관계) 보고자 함을 드러내고, 2 둘의 동일한 영역이 존재함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부분이 재밌었는데요.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의사는 탐정 같이 환자의 거짓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거짓에 거짓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말실수가 발생하게 되고 의사는 말실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선 저번 글에서 이현우 선생님이 쓴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개념 정리를 하고 넘어갔는데요. 이번 시간의 설명이 간명하게 직관적인 느낌을 전달해줘서 부연합니다. 애도는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멜랑콜리는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애도는 주체가 있지만 멜랑콜리는 주체가 없다. 멜랑콜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리비도나 내면의 에너지가 외부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주체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분리 상태에서 분리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리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처, '열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애도에는 주체 '나Ich'도 있고, 대상도 확실하기 때문에 애도 작업(Trauer Arbeit)이 이뤄질 수 있지만, 멜랑콜리는 대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랑의 에너지가 슬픔 자체로 가게 된다. '나는 내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내가 사랑했다고 믿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애착 관계의 견고성, 확실성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Arbeit' - 난제를 이성적으로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1에서 새로운 대상2로 넘어가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진보progress하지만('새로운 사랑') 멜랑콜리는 퇴행Regression한다. 이 퇴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멜랑콜리커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로 도피한다. 대상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길/방향을 잃은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스스로에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구강기(구순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뱉어낸다, 여자는 삼킨다' 


여기서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은 자를 먹었으나 결국 죽은 자에게 먹히는 격이 된다.  


 이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은 원초적 나르시시즘 -구강 단계-카니발리즘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될 수 있다. 구강단계에서는 타자를 자기화하려 한다. '상상적 자아를 먹고, 상상적 자아에게 먹힘' 자/타의 미분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미즘 역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물/자연에 투사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먹고, 자연에 먹힌 사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분리 상태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입/통과한 것을 반대로 보면 그 원초적 세계(어머니의 자궁/탯줄)에서의 추방으로 볼 수 있다. 상징계, 기호 세계로의 진입은 분리의 고통을 수반한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아기의 입을 빌어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세계로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밀어냈다. 그물에 걸려 들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호출되었다. 이 분리고통은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육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통과제의를 고통 없이 완벽하게 통과해낼 수 없기 때문에 '열린 상처'를 갖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태어나기의 망설임> 우리는 태어나기를 망설인다. 우리를 옭아맬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보지만 태어난 이상,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세계의 코드-시스템-언어를 습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이런 운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1,2강에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있다는 표현이 3강에서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는 나르시시트가 되었다로 변주되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타자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시대에 길 잃은 사랑이 가엾는 나 자신의 '빈 집'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빈 집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내 사랑이 갇혀 있는데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 이런 빈 집의 사랑을 내가 텅 비어 있다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 잃은 가엾은 사랑이 빈 집을 만들어냈고, 그 빈 집에 사랑이 갇혀 영영 갇혀버린 꼴이라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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