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 지방대를 둘러싼 거대한 불공정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50
제정임.곽영신 엮음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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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지방대, 학벌주의를 주제로 한 신간이 오랜만에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3년 전에 읽은 <복학왕의 사회학>을 마지막으로 독서의 맥이 끊긴 상태였다.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가 나오자마자 주문해서 읽었다. 기획연재기사를 엮은 책이라 단행본에 기대하는 논리의 정합성이나 담론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긴 했다. 대신 지방대와 학벌주의라는 이슈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전체적인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밑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방대를 둘러싼 거대한 불공정'이란 부제가 시사하듯 지방대 소외, 지역 격차(불평등)를 중심으로 한 논의였다. 서문에 제시된 집필의도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지방대 소외가 비정규직 등 일자리 격차로 심화한 ‘경제적 불평등’과 서울 중심의 불균형발전으로 인한 ‘지역적 불평등’이 중첩돼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피라미드에서 한 칸이라도 나은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노동시장에서 좀 더 나은 출발을 가능케하는 학력·학벌에 관한 집착을 낳고, 이 경쟁에서 실패한 이들을 차별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1960년대 이후 서울 등 수도권에 모든 자원을 몰아준 불균형발전 전략이 지방 소멸과 지방대 소외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 자체의 개혁뿐 아니라 일자리 격차 해소, 증세·복지 확충 등의 경제적 불평등 완화 정책과 국토균형발전 전략 등 지역적 불평등 완화 정책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13)


요컨대 지방 소멸과 지방대 소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지역적 관점'이 강한 책이다. 내가 지방 소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방 중소도시가 독자적 경쟁력과 고유한 개성을 갖추지 못하고 관광산업에 크게 의존하거나 그마저도 안 되는 경우 발전이 정체된 상태에 머문다. 과거 제조업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융성했던 지방 대도시들도 제조업의 쇠퇴에 직격탄을 맞아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책으로 양승훈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가 있다. 이 책은 산업도시 거제의 빛과 그림자, 즉 제조업 분야의 블루칼라 남성노동자가 가부장으로서 생계부양을 책임지고, 여성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머무르는 성별 분업의 가족 모델이 가능했던 과거에서 경제적 토대의 차원에서나 문화적 차원에서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더 이상 꿈꾸기 불가능해진 오늘을 조명하고 있다. 지방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로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도모하기 어려워진 환경에서, 소위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산업구조의 변화 - IT 분야 일자리들이 서울/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조선회사의 서기로, 서울로 각자 뿔뿔이 흩어졌던 <땐뽀걸즈>의 멤버들처럼 내 주변에도 지방에 남거나 서울로 이주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인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추상적으로 여겨졌던 지역 불평등의 문제가 피부로 생생하게 체감되고 이런저런 질문들이 남곤 했다. 서울 소재 대학에 나온 친구는 취업을 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이었기에 서울 잔류에 필사적이었다. 지금은 교사가 된 친구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수도권에 위치한 친척네에서 생활했다. 스터디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한 학원 알바부터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을) 서울에 있는 친구/지인을 만나는 것까지 수도권에 남아 있기에 가능한 활동이었다(취업박람회, 스터디, 공모전, 경시대회 등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지역에 따른 기회의 차이가 극심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나온 이들에게 지방시민의 삶을 가정/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난이도의 과제일 거라 생각된다. 서울 토박이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비서울에서 살기 힘들 것 같다고, 그래도 한국에서 서울이 제일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나도 서울이 좋다. 살아보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지방 소재 대학을 나온 동창들 중 서울에서 방송계 일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이들도 있고, 지역신문사에 취업해 대학 소재의 지방도시에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이도 있다. 방송계 일을 하는 이들의 경우, 학과 동기로 친하게 지낸 덕에 같이 살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생면부지의 룸메이트를 구하거나 주거의 질이 상당히 떨어지는 원룸에 살아야 했을 테니까.

만약 나도 수도권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살았더라면 대학원 진학을 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인문 계열 대학원 전체가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방대 대학원은 좀 더 전망이 어둡다고 들어서다. 서울 잔류가 절실했던 친구가 고향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영화학도로서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대도시가 그나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나 고루한 젠더 의식에서 탈피해 도시적 근대성과 세련된 예절이 통용되는 공간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하기 위해' 지방근무를 기피한다는 세간의 말에 사태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실이 들어 있다. 연애 상대를 찾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교육시키고) '행복의 약속' 혹은 중산층 내지 화이트칼라 가족의 유토피아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주택문제가 심각하기에 서울에서 거주하고 생존하기 만만치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종종 지방도시를 여행하면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포맷이나 풍경이 그대로 옮겨와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서울 따라하기(좁히면 '강남 따라하기')의 일률적 원칙이 지역의 역사와 특색을 지우고 서울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사품으로 전락시킨 결과다. 불균형 발전, 압축성장, '따라잡기caught-up' 근대화, 중앙집중형 권위주의 체제 - 여전히 망령처럼 잔존해 있는 구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함에 있어 생태, 젠더와 더불어 지역은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전개된 문제의식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지방 소멸의 위기(서울/수도권의 인구가 타 지역 전체의 인구를 역전). 국토 불균형 발전에 대한 비판과 균형 발전으로의 전환을 촉구. 그러려면 지역의 인재들이 서울/수도권으로 유출되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조성이 요구됨. '대학의 공공성' 기능을 살려 지역 커뮤니티/지방 도시에 기여.

- 피라미드 식으로 위계화된 차별적 노동시장. '바보야, 문제는 불평등이야'. (이 책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비판의 논지가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구분했던 현실적 능력주의를 향한 것인지, 이상적 능력주의를 포괄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 파악을 하지 못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벌(자매품으로 수능점수)이 물화된 자본으로, 능력을 입증하는 능력으로 기능하여 차별을 양산함(고용, 승진, 인사평가 등등). 책에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같은 업무능력을 가진 경우, 혹은 업무능력이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지더라도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우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지적 격차의 사회사/문화사'(천정환 - <대중지성의 시대>에서 미네르바 사건을 다룬 바 있음). 격차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격차에 따른 차별을 긍정하는 분위기에서 혐오는 필연적으로 발생함. 자유롭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파괴하여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짐.

- 학벌주의 내지 대학 서열주의의 대안으로 국공립 대학 네트워크 등이 있음. 일정한 수준의 학습능력/수학능력이 입증되면 제비뽑기/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대학을 배정하는 방식. 서울 소재 사립대학과 비교해 점점 위상과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지방 국립대학의 부활 도모. 서울대는 학부교육을 하지 않고 대학원 중심의 연구 특화 기관으로 전환(하지만 서울대를 비롯해 서울 소재 사립대학들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거센 저항이 예상되고, 중산층 이상의 기득계층 또한 현재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자신들이 경쟁에 유리한 조건임을 알기에 변화/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할 것으로 예상됨) '인구 절벽'이라 명명되는 학령 인구의 감소로 지방대 소멸 및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어떤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대학을 다시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 대학 개혁은 초중고 교육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침. 부모의 소득수준과 거주 지역이 자녀의 대학을 결정하는 세습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만큼 불평등을 완화하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기 위한 변화가 필요함. 혹자가 말했듯 돈도 실력, 부모도 스펙이 되고 있는 실정이기에.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라는 고전적인 사회학적 명제의 확인에서 더 나아가 코로나 시국에서 교육이 불평등의 격차를 확대하고 있음이 확인된 만큼 교육 개혁이 필요함(제일 어렵지만...).

[능력주의]

박권일 작가는 한국사회에서 지방대 혐오가 심해지는 이유 중 하나로 ‘과잉 능력주의’를 꼽았다. 그는 “지방대에 다니는 것이 그 사람의 다양한 능력을 곧장 대변해주는 바로미터가 아닌데도 사회가 공부와 시험 등 몇 가지 한정된 능력만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입시 성적으로 ‘학벌 피라미드’의 아래 칸에 위치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당연시된다는 얘기다. (35)

박남기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절대적인 믿음으로 퍼져 있는 ‘실력주의’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취라는 이유로 승자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보상과 패자에게 주어지는 극심한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실력주의가 가져온 불공정과 평등을 직시하고 그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실력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갖춰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능력과 집념과 같은 ‘천부적 운’,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와 같은 ‘사회적 운’, 그 밖에 뜻밖의 행운과 같은 여러 가지 비실력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엘리트나 큰 이익을 얻은 대기업은 과도한 보상을 당연시할 게 아니라 자신의 성취를 사회 또는 타인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활력을 위해 어느 정도 차등은 있어야겠지만, 지금처럼 승자독식에 따른 극심한 격차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드시 줄여나가야 합니다.” (75-76)

학벌이 민주시민의 자격과 역할까지 침해하는 현상이 한국에 유독 심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교육이 희망이다>(2017) 저자 장은주 영산대 성심교양대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잘못된 능력주의 속에서 시민적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진단한다. 그는 “능력지상주의는 능력 있는 승자만 존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면서 그렇지 않은 절대다수의 패자는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킨다”며 “이 때문에 많은 지방대 출신이 자존감을 상실하고 사회정치적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103)

“한국 교육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능력주의’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원리를 가르치고, 시험을 통해 서열 높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능력으로 여기며, 그에 맞춰 지위와 재화를 얻는 게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 능력이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소질과 소양, 또는 천재성이라기보다는 한국 시험체제에 잘 적응하는 것을 말하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거의 비례합니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사회를 정의롭고 공정하게 만들기보다 불의를 정당화, 영속화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습니다.” (243-244)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과)


[지방대 혐오/소외 와 학벌주의 ]

20대 국회에서는 지방대 문제와 관련해 학력차별금지법, 출신학교차별금지법 등 5개 법안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학력·출신 학교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학력·출신 학교를 이유로 고용, 국가자격 등의 부여,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의 영역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한다”고 못 박았다. (39-40)


노동경제학에서 통계적 차별이란 고용주가 개인의 역량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을 때 인종·성별·출신 학교 등 제한된 정보를 활용,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수하다는 기존의 경험과 고정과념을 바탕으로 차별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차별당하는 집단은 실력을 갖췄더라도 충분한 기회와 보상을 얻지 못하고, ‘해도 안 된다’고 낙담하면서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악순환을 겪는다. (74-75)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은종 선임연구원은 “지방대생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다수의 지방대 출신이 취업할 때뿐만 아니라 취업 이후에도 업무, 승진, 배치 등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대학서열에 따른 차별적인 프레임 자체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75)

연세대 사회학과 김왕배 교수는 <한국의 교육열>(2014)이라는 논문에서 고등학교들이 명문대 보내기에 매달리는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대학의 평판 서열이 그 어떤 나라들보다 극단적으로 획일화되어 있어 지위 성취와 재생산을 위한 견고한 상아탑이 세워져 있다. 한국사회에서 단순히 학력이 아니라 연고주의적 학벌의 개념이 적절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 대학의 특성은 사라지고 중고등 공교육 기관은 서열화된 대학으로 학생들을 진학시키는 것이 제1순위 목표가 되어 있다. 교양과 예술, 인격 수양과 민주시민의 양성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 그것도 서열화된 대학으로 학생을 진출시키는 것이 명문 학교로 평가받는 길이다.” (108-109)

최근까지 한국 교육 정책의 방향은 김영상 정부의 ‘5·31 교육개혁’에 기초했다. 지난 1995년 수립된 5·31 교육개혁은 초·중·고교와 대학까지 포괄하는 거시 교육 정책으로, 자율성과 다양성, 세계화를 목표로 22개 분야 120여 개 과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세계 속 경쟁력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교육 경쟁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약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주요 정책인 대학설립준칙주의(최소 요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인가해주는 제도), 국립대 법인화, 특수목적고 및 자립형사립고 설립, 사학의 자율성 확대 등은 대학의 난립과 교육 서열화를 촉진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대학설립준칙주의 도입 이후 일반대학 수는 1996년 134개에서 2014년(제도 폐지) 189개로 55곳이나 늘었다. (247)


시민단체 교육을바꾸는사람들 이찬승 대표는 “5·31 교육개혁은 그 당시 국내외 분위기를 반영해 공급자 중심의 교육에서 소비자 중심의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조하고 학교 다양화, 수준별 교육과정 도입 등 시장주의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는 공공성 차원에서 교육을 긴 안목으로 보지 못한 면이 컸으며, 그 결과 학교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되고 계층 간 격차를 더 벌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고 평가했다. (247~248)


심승환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또 “지방대 차별과 소외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 학벌에 따른 경제적 보상의 불평등, 명문대를 명품처럼 여기는 문화적 계층화, 학벌·학연의 정치 세력화 등 한국사회 정의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단순히 교육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회정의교육을 통해 공동체성과 협력, 소외 주체에 대한 배려 등을 강조해나가면 큰 틀에서 학벌 문제를 극복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52)

[불평등]

대학교육과 일자리 등에서 ‘결과의 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과정의 공정’에 더욱 집착이 커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시 공정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 진전시켜야 할까?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의 공정은 상위 20% 집단을 위한 것으로,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빈약하고 납작한 개념이 되어버렸다”며 “공정이 정의의 원칙으로 넓게 확장되기 위해서는 평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학교 간 서열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학교 간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20)


한국 교육에서 승자가 자원을 독식하고 그로 인해 더 강력한 승자가 되는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등이 소수 상위권 대학과 학생들에게 각종 재정지원을 몰아주어 더욱 유리한 여건을 만드는 사이, 대학서열이 낮은 대학은 지원에서 소외돼 교육환경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133)

황갑진 경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는 <사회 불평등과 교육>(2018)에서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권력, 돈, 명예와 같은 사회 희소가치를 얻을 기회가 주어지는 명문 학교 입학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학교가 학부모나 학생들의 성공 욕구에 편승하여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중한다”고 지적했다. 과열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역시 ‘일자리’가 양극화되고 불평등이 확대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서울 명문대’ 등에 집착하는 학벌주의를 완화하고 지방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과도한 노동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190)


장근호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이 2018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고용구조의 특징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2000여만 명 가운데 대기업·정규직에 근무하는 1차 노동시장 종사자는 213만 명으로 10.7%에 그친다. 2차 노동시장 종사자는 1787만 명으로 89.3%였다. 양극화한 두 시장 간에는 이동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3년 후 정규지긍로 전환될 확률은 22%에 불과했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치다. (191)


양준석 대전세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자리 격차를 줄이기 위해 우선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법파견(파견이 금지된 제조업에서 위장도급 등을 하는 것), 납품단가 인하, 기술 탈취, 시장 독과점 등 불공정 행위를 없애 중소기업이 정당한 이윤을 확보하고 적정한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임금을 회사가 독단으로 정하거나 노조·회사가 협상을 벌이는 등 사업장별로 결정해, 노조 교섭력이 있는 곳은 노동자 권리를 수호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임금이 적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개별 기업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연대임금 제도를 통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지향해야 한다”며 “노동자·사용자·정부가 참여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어 연대임금에 대해 논의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

[지방대생은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지금 다니는 대학 전공수업을 들어보면 교수와 학생 모두 열정을 잃은 것 같고, 강의와 과제의 양과 질에서 큰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88-89)


지방대생의 심리적 위축과 소극적 성향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대학 생활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양민옥 숭실대 사회복지학 강사의 논문 <지방대학교 대학생으로 살아가기>(2015)는 지방대생의 대학 생활을 ‘열등감을 갖고 대학생활 시작’‘열등감과 적응 사이의 갈등’‘외적인 지지가 대학생활에 도움이 됨’ 등 3단계로 정리했다. 지방대생은 성적에 맞춰 입학한 뒤 열등감 속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다른 대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만 열등감과 현실 적응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 등 외적 지지가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92)

부산 동명대 이정민 신문방송국장은 “청년이나 대학생 이슈에 대해 지방대 학생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언론에서 별로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며 “서울지역 대학생의 목소리가 대부분인 기사들을 볼 때마다 ‘왜 우리 지방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안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101)

임지윤 한국금융신문 기자 : 나 역시 지방대 출신으로서 열등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해 있다. 남들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 있다. 내 후배들은 이런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시리즈에 참여했다.(258)


박두호 단비뉴스 기자 : 정말 많은 지방대생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놀란 점은 내면에 패배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지방대생 상당수는 소위 ‘스카이’라 불리는 대학에 정부의 지원과 혜택이 몰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60)

1980년대의 대학진학률은 30% 정도였다. 전두환 정권의 졸업정원제 실시, 대학입학 정원 확대 같은 유화 조치가 적용돼 70년대에 비해 수치가 크게 증가한 결과였지만 여전히 대학생은 특혜를 누리는 특권적 계층이었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국면에서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던 경제적 특혜도 있었지만 학생운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결과 대학생 집단은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대학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는 말이다(이를 테면 야당 대표가 전대협 대표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1년 5월투쟁과 1996년 연대 사태를 거치며 학생운동 진영은 궤멸하다시피 했다고 알려져 있다. IMF 금융위기 사태를 겪으며 대학생 또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하자 각자도생, 무한경쟁, 생존주의 같은 말들로 수식되는 대학 풍경이 펼쳐졌다. IMF 금융위기 사태는 한국전쟁 이후로 한국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급격하게 바꾼 사건이었기에 대학의 변화 역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 정치가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더라면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제동을 걸고 견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대학이 공공성을 상실하고 '장삿속'을 챙기는 기업으로서 시장주의적 야망(등록금의 대폭 인상 등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오늘날 한국정치의 비극은 86 세대가 보수뿐 아니라 진보의 목소리와 상상력까지 과대대표하고 있다는 점이고, 소위 87년 체제의 정치적 상상력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대안적 상상력,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만한 정치 세력이 출현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1990년대의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세례를 받은 X 세대나 생태/젠더 같은 대안적 가치지향을 갖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MZ 세대가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을까(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질문이나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그래서 질문을 좁혀 지방대 출신으로서 내가 집중해보고 싶은 질문은 '지방대생은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이는 <한편 6호>의 권수빈 선생님의 글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능력주의에 따른 위계화된 차별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잃어버린 시민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격차를 생산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질서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 패배주의와 무기력증에 휩싸여 있던 지방대생들의 모습을 '적당주의' 레짐으로 해석하는 연구자의 오만(지방대생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 지방대생이 열등감과 더불어 체화할 수 있는 지방대 혐오에서 벗어나 '서울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역적 관점의 렌즈로 지역 불평등과 소수성을 인식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대학생들의 시국 선언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지방대생의 시국 선언이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존재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말은 공론장의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비시민이 내는 소리가 되었던 것이다. 지적 격차의 문화의 자장에서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권은 학력이나 학벌, 직업에 따라 분별된다. 최근에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정규직 교수는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비정규직 강사는 그렇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학문적 성취와 상관없이 직업/직위의 위계에 따라 지성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반지성(주의)적인지 차치하고, 이런 인식이 대학사회(교수 채용 체계, 연구자 사회의 생리)에 무지한 대중이 싸지른 댓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실제로 고매하신 교수 집단이 학벌을 근거로, 정교수/비정규직 강사 직위를 바탕으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언행을 보이는 일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내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는지 고민하다가 혐오와 조롱, 비난이 두려워 침묵을 지킨 기억이 있다.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질문을 마음 깊이 두려워했다. 명문대 출신 상대방이 학력과 학벌에 의한 차별을 긍정하는 능력주의자일 까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스스로 내가 받고 있는 '강의와 과제의 양과 질에서 크게 아쉬움'을 느끼고, 열의 없고 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학생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해 내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내 능력과 노력의 부족이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휩싸이다가도 한국 교육의 입시지상주의와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교육방식의 피해자라는 식으로 자기혐오의 괴로움을 덜어내곤 했다.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에 열심히 발품을 팔아 '순수한' 실력을 키우는 것만이 미래에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고 능력주의자로서 열심히 살았다. 언제 혐오의 대상으로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좀 더 열심히 살게 만드는 동력으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환경파괴의 비용을 발생시킨 화석연료처럼 상대방과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감수성을 해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입장에 놓여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하는 힘을 기르는 데도 큰 장애물로 기능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길이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무능해지는 길이었다. 지방대 출신으로서 겪은 경험으로부터 자기연민과 극복의 성공서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지역적 관점을 바탕으로 중심부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세상의 상식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인문적 힘을 끌어내자고 생각했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가 제기한 질문과 화두를 오랫 동안 품고 있고 싶다(요즘 지구력 있게 한 가지 생각을 오랫 동안 깊게 이끌어가는 힘이 상당히 떨어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하...).

임명묵 작가의 <K를 생각한다>를 읽으며 세계화와 정보화에 한국적 방식으로 적응한 결과 '이중경제체제'라는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노동시장이 형성되었고, 인구와 교육의 미스매치가 '학력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대학사회에 많은 사회적 재원이 투여됨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고용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같은 2차 노동시장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1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동성과 이동성(계층 사다리)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대안 제시에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현실경제'를 도외시한 좌파 경제학의 도식에 갇혀 있어서 그런 것일지, 형평/평등/필요 중 분배정의(혹은 공정)를 어떤 식으로 실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지 가치관이 선명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 어쩌면 아직 내 계급적 위치/계급성을 제대로 파악한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통장에 임금이 꽂히고, 결혼이나 '내 집 마련'을 꿈꾸게 되고(이게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인지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깨닫게 되고), 가능성이나 잠재성으로 불렸던 내 사회적/계층적 운신의 폭이 대략적으로 결정된 상황이 되면 한국사회의 현실원칙과 시스템에 대한 선명한 입장을 정리하기 조금 수월해질까? 맑스(주의) 책을 읽으면 위로를 받기도 하고, 현실에 대항할 선명한 논리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용기가 생기기도 하지만 노동자라는 집합적 정체성으로 결집해 노동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것 같다(종래의 구좌파적 정치문법에서 벗어난 다중의 자율적인 정치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고민하고 상상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으로 자신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일터를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한 곳으로 변화시키고자 투쟁하는 사람 - 그런 사람의 서사를 그려낸 소설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

p.s 요즘도 사람들이 통성명의 절차로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자매품인 '몇 학번이세요?'는 중년 세대 사이에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는지 모르겠다.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가장 압축적으로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은 학벌주의자가 아니기에 이 질문이 별다른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은 건조하고 중립적인 질문이라 여길 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이 표방하고 있는 효율성이 폭력성으로 얼마든지 전화될 수 있음을, 대졸을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디폴트 값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서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정보를 드러내라는 요구가 무례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싶다. 출신 대학이란 정보에 결부된 편견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본질을 통찰하고, 가시적 정보와 지표들이 말해주지 않는 행간을 상상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싶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출신 대학은 그다지 많은 걸 알려주지 않을 수 있다. 사고방식과 가치관, 취향과 같은 '자기표현'적 정보들로 호구조사가 아닌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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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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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레토릭으로 애용되는 문구 중 하나다(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오징어게임>도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표방한다). 복지제도로 대변되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와 심각한 수준으로 위계화된 노동시장. 더 이상 교실에 수면시간을 줄이고 공부하면 배우자의 얼굴이 바뀐다는 야만적인 문구가 공공연하게 게시되지 않지만 학력/학벌에 따른 불평등과 차별은 오히려 그 시절에 비해 심화되었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학력/학벌이 고용시장에서 일종의 자본으로 작동한다. 고졸과 대졸, 중소기업과 대기업,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돼 재산 차이로 확대재생산된다. 한 번 정규직은 직종이나 직장을 옮기더라도 계속 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될 확률이 높고, 한 번 비정규직은 근속연수가 쌓이고 성과를 많이 내더라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대기업/공기업의 정규직 같은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 여부에 따라 평생의 당락이 크게 결정되는 불평등 사회. 대기업 정규직-대기업 비정규직-대기업 제1하청 정규직-대기업 제1하청 비정규직-중소기업 정규직-중소기업 비정규직 식으로 촘촘히 피라미드식으로 위계화된 사회. 최근 불평등, 공정, 부동산 관련 이슈에 안테나를 기울인 채로 고병권 선생님의 자본 해설서를 읽고 있었더니 한 권의 책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동안 뉴스로 숱하게 접해왔으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된 기획기사가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결과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졌고, 간접고용(하청) 노동자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했던 故김용균의 죽음을 '사회적 참사'로 인식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변화에 힘을 실어온 김훈 소설가(기자 시절 한국일보에서 재직했다)가 추천사를 썼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던 소설가가 어느덧 원로의 반열에 들어선 시점에서 도저히 지겨움으로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밥벌이의 현장을 보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김훈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인간을 동물, 그러니까 피와 살, 뼈로 이뤄진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강하다고 알고 있다. 육체와 물질의 관점(때로 힘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육체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신의 육체를 이용한 노동으로 제 밥벌이를 해내고, 제 '새끼'들을 기르는 땀의 숭고함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노동을 하는 이들이 외주화된 위험을 도맡아 일터에서 목숨을 잃게 만드는 사회를 더 이상 유지시켜선 안 된다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동료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책임지기로 결심한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책의 저자인 한국일보의 마이너리티 팀의 젊은 기자들(남보라, 박주희, 전혼잎)은 어떤 마음으로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취재를 결심하게 된 것일까. 책에서 밝힌 취재의도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출발은 다음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은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피·땀·눈물의 대가로 월급을 받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중 수십, 혹은 수백만 원을 늘 떼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 고질적인 문제를 포착한 기자들은 노동시장의 최하부에 위치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중간착취’에 대해 묻고, 그 지옥도地獄圖를 펼쳐보기로 했다." 평소에 잘 보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고, 잘 보이지 않아서 잘 안 보게 되는 지점이 있다. 사각지대라고도 불리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확률이 높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놓여 있을 확률이 높고, 이들의 정치적 권리를 대변해줄 수 있는 창구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의 역사가'로 불리기도 하는 기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시대의 사건과 현상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발견해 알리기도 하고(의제화/공론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사해 새로운 논의의 장을 창출하기도 한다. 혹자는 일시적인 분노로, 혹자는 해묵은 체념으로 지나쳤을 질문을 정면으로 파고든 결과 한국일보 마이너리티 팀은 "사람 장사의 정갈한 구조" "거대한 착취 구조의 지도"(김경영)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시대의 마이러니티가 누구인지, 이 부정의한 마이너리티의 구조에서 누가 이익을 거두는지 정확하게 문제화를 하고, 100명의 목소리를 조합해 만들어낸 착취의 지도를 무기 삼아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낼 수 있는) 부분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기획-취재-보도-법제화를 위한 노력-출간의 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을지 행간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힘에 대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자체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그에게 정당하지 않은 몫을 지불한다고 배웠다. 자본주의적 노동 자체의 착취에 더해 오로지 '사람장사'를 통한 이익의 편취, 착취만 일삼는 합법적 시스템을 '지옥' 말고 뭐라 부를 수 있을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노동을 유연화해 고용을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도입되었다고 알고 있다(IMF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가파르게 심화되었다고 한다).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을 폐기하거나 개정하는 게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듯 비정규직 제도는 도입 당시 우려되었던 문제점들이 점차 심화돼 중대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는 비정규직에게 고용의 불안정성을 대신해 임금을 좀 더 지불한다고 한다. 이를 보면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자가 노동자로서(혹은 자신의 노동에 근거해) 정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일의 가치를 동등하게 대하고, 더 나아가 고용형태에 따른 불이익과 어려움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 노동존중 기조가 느껴진다. 반대로 한국사회에서는 고용의 불안정성이 족쇄가 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법, 그리고 정치가 노동자의 편에 서 있지 않아서다. 비판과 비난의 화살은 자본의 이익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양산한 당사자인 국가와 기업에게로 향하기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획득하는 경쟁에서 탈락한 개인에게로 향한다. 지옥은 타인을 착취해 자기이익을 도모하려는 장사꾼들의 열정과 대항할 수단을 지니지 못한 채 생존투쟁에 지친 당사자들의 무기력으로 생명력을 이어간다.

이렇게 자본친화적 정치지형 속에서 제도의 빈틈을 노린 '사람장사'의 기술이 간접고용이라 불리는 중간착취인 것이다. 간접고용은 종래의 사용자-노동자의 계약에 고용주(용역, 파견업체)가 끼어든 '삼각 고용' 구조다. 원청(사용자)이 용역업체(고용주)와 맺는 도급계약, 용억업체가 노동자와 맺는 '근로계약', 이 두 계약 사이의 빈틈으로 인해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간접고용 노동자의 급여가 유난히 적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차이 때문이다. 노동력을 사용하는 사람과 노동자 사이에 누군가 개입해 있다는 것, 그게 이들을 비정규직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는 순간, 착취는 필연적이다."(54)

여기에 더해 용역과 파견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용역은 원청과 용역업체가 ‘특정 업무를 완성하겠다’는 도급계약을 맺는 것으로, 원청은 용역업체에 일을 통째로 맡긴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업무를 직접 시킬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원청은 노동자에 대해 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반면 파견은 원청이 파견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공급받은 후 필요한 일을 노동자에게 직접 지시한다. (...) 원청이 파견직에게 사실상 자신의 직원인 것처럼 일을 시키기 때문에 원청은 파견직에 대한 법적 책임도 진다." (60-61) 대부분의 도급계약은 원청에서 직접 노동자에게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불법 파견'이라고 한다. 파견이 아닌 용역계약을 맺으면 원청은 노동자에 대한 책임("노동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일도 없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다 해도 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용역업체 또한 노동자들로부터 관리비 명목으로 돈만 떼갈 뿐 노동자를 지원하거나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중간착취라는 문제의 근원은 간접고용에 있다. 그렇다면 왜 기업들은 노동자를 직접고용하지 않고 간접고용하는 것일까. 재계의 입장에서 이를 노동 유연화라 설명할 것이다. 이말인즉슨 '손쉬운 해고'를 의미한다. 손쉽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노동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결사체를 결성하기 어렵다. 중간착취의 기술자들은 이런 처지(약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협박에 능하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 많다고. 당신은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부품이나 마찬가지니 쫓겨나기 싫으면 조용히 말 잘 들어야 한다고. 이렇게 편하게, 또 싼 값에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노동자에게 정당한 몫을 지불하지 않은 만큼 자본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비용 절감과 노사 분쟁의 선제적 예방 같은 경영 차원의 '성과'는 누군가의 생존이 위태로워진 만큼, 누군가의 존엄성이 침해된 만큼 얻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은행경비원 임성훈 씨의 편지]

은행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비슷한 대우도 바라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관리’ 명목으로 은행 경비원의 노동 대가를 중간착취 당하지 않고 온전히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재계약과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지점 통폐합에 따른 계약 해지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안정된 고용 환경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78-79)

담담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지만 절절한 진심이 느껴지는 편지에서 이 시대에 최소한으로 지켜져야 할 상식의 선이 어디일지 생각해보게 된다. 중간착취의 문제를 관찰하며 근본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는 사회가 가능할지 궁금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익에 따른 보상이란 셈법 이외에도 공동체적 가치, 돌봄적 가치, 생태적 가치와 같이 사람과 사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의 가치를 측정하고 보상하는 셈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생 인류, 현재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세계시민들은 미래 세대의 삶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합의 아래 자신이 누려왔던 편의와 효용을 포기할 수 있을까. 4차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산업구조와 노동의 변화 속에서 모두가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했을 때, 일할 권리/기회가 소수의 특권이 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노동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노동/일과 자아를 잘 구분해서 일을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번 만큼 일한다는 정신이 쿨하고 현명한 태도로 여기지는 요즘이지만 일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여한다는 성취감, 일터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와 같은 기능을 다른 무언가가 성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대학생 시절 조금은 먼 얘기 같이 느껴졌던 노동문제가 내 생존과 직결된 현실임을 점점 체감하게 된다. 아니 냉정하게 얘기하면 생존이란 단어의 급박함과 무게를 고려했을 때 생존 자체가 위협되는 상황에 놓일 확률은 적을 거라 예상된다. 집안 재정이 빠듯한 편이긴 하지만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며 고등교육을 이수한 학력이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자리를 보장해줄지 최대치는 알 수 없지만 최소치는 상상해볼 수 있어서다. 똑같이 임금을 월 2백만원 선에서 받더라도 중간에서 장사꾼들이 반절씩 착취해가는 사업장과 내 노동의 몫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사업장에서 삶의 질은 확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의 맨 밑바닥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여 변화를 이끌어냈으면 좋겠다. 고작 책을 읽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알맹이 없는 리뷰를 남기고 있는 형국이지만 앞으로도 한 권의 책을 읽고 잠시나마 사회적 이슈 - 타인의 고통,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 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일하는 사람의 어깨가 축 처지는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동의 가치가 최대한 정당하게 인정받고 노동자-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아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아 당당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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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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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문현아.박준규 옮김 / 리시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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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서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김애란 - <서른> 중)

'서른'을 다룬 텍스트들이 꽤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최승자의 <삼십세>,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번에 검색해서 알게 된> 블로콜리너마저의 <서른> 등등... 왜 서른인가 굳이 따져보면 '앞자리'가 십 년 만에 바뀌면서 나이에 대한 체감이 강하게 들고, 이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성인''어른'의 티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에서 불안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서른'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여서 그랬을 것 같고, 지금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이에게 조급함을 들게 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 이직 같은 선택을 고민하는 시기여서 그럴 것 같다.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서른에 갑자기 시간이 내 앞에 찾아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불심검문을 하는 특성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서른의 상징성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유무형의 압력에 기인한다. 번듯한 사회인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 구실' 해내야 한다는 것. 십대부터 이십대의 어느 시점까지 이어져온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과 발달의 상승곡선이 멈춰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과도기와 정체기의 '인생 슬럼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들 때, 남들은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거나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부모'가 되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서른이 온다. 그리고 서른 하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간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김애란 - <서른>

김애란의 <서른>은 몇 년 전 폐간된 <문예중앙>이란 문예지의 2011년 겨울호에 수록된 소설이다. 설마 김애란 작가가 생물학적으로 서른살에 이 작품을 썼을까 싶어(왜냐하면 소설의 윤리적 깊이가 굉장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필 검색을 해봤더니... 거의 맞았다. 1980년생이시니까 2011년에 썼다고 하면 한국나이로 32살에 쓴 것이긴 하지만 서른 즈음에 이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거마 대학생 다단계 사건에 대한 자료조사에 시간을 쏟으셨을 테고, 아마 초고를 다 쓰기까지 그리고 퇴고를 마치기까지 다른 소설들의 평균적인 집필 시간보다 좀 더 걸렸을 것 같다. 불행히도 현재 <문예중앙> 2011년 겨울호도, <서른>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비행운>도 갖고 있지 않다 보니 소설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서른>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속으로 밀쳐버린 누군가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죄책감보다 왠지 미안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을 용서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용서받을 수 없는 미안함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에 위치시키고 벌을 내리는 일은 어쩌면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용서-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형이상학적 죄의 문제를 제쳐두고 현전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고자 하는 일이 어렵고 고되지만 참된 길에 가까워보인다. 편지의 수신자인 '언니'가 답을 줄 수 없겠지만 언니의 존재로 하여금 '나'가 악무한적 고뇌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어떻게든 지고자 하는 애씀이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른>의 발신인은 사회적 차원에서 '커밍 업 쇼트', 즉 '인간 구실'을 아직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수준 미달 상태로 인식될지 모르겠으나 그가 끝끝내 지켜내려 하는 책임감은 어른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지 않은가. <서른>은 어른들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책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공백에 물음을 던지고 또 던진다.

<서른>의 주인공(서른의 주인공이 '서른'인지 수신인인 언니가 '서른'인지 모르겠으나)은 지금 마흔이 돼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독립적으로 싱글생활을 하고 있다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안 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면 조금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세상에 내보낸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게 만든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질서를 비판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 같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분노를 느끼고, 돌봄과 육아가 과부하가 걸리게끔 편중된 상황에서 자신이 엄마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하며 자기 자식 하나 책임지기 어렵긴 하지만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 기성 세대에 진입하고 있는 혹은 이미 기성 세대의 일부가 된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청년 세대를 향해 염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규정한 성인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성인으로 정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곁에 친구들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고백을 담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어줄 언니가 남아 있을까?

2 세대론의 궤적에 대한 하나의 거친 소묘

'MZ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작은 어폐를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세대 명칭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개 확산된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유행(트렌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OO 세대'라는 발명품 내지 신상품을 이해하려면 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호명의 욕망 및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대 명칭은 정치적 목적, 마케팅적 목적에 따라 창안된다. 세대라는 사회학적 개념이 정립되자 인구 집단을 새로운 범주로 분석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세대 개념이 생명력을 얻어 '사회적 실재'가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히트 친 세대 명칭은 '86 세대'일 텐데 정확한 연원과 시점을 따져봐야겠지만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에서 부상한 정치세력을 명명하고자 사용된 '(3)86'세대는 1987년 이후, 그러니까 87체제의 성립 이후부터 진보 정치의 헤게모니를 독점하다시피 군림했기에 '486''586'으로 변주하며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 <386 세대 유감>, <불평등의 세대>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으로 '586'세대를 지목하고 비판하는 담론들이 586 스타 정치인들의 몰락과 정권의 실정失政의 맥락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에 비해 'MZ 세대'론은 정치적 성격이 훨씬 옅다. MZ 세대는 '86'세대의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성향과 달리 반권위주의와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며, 페미니즘 기후위기 등 그동안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후순위로 밀렸던 의제들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을 띤다고 설명된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현실정치에서 단일한 세대 집단으로서 뚜렷하고 일관된 정치적 경향성을 보여준 적이 없어 'MZ세대' 개념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섣부른 감이 있다. (투표권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청소년층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Z세대를 살짝 제쳐두고) 20-30대로 구성된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이준석이란 정치인을 제1야당의 당대표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이대남'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시화된 바 있긴 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을 주된 이데올로기를 삼는 이 집단의 정치적 성격,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와 밀도를 따지려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Z세대 자체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마케팅/시장의 영역에서 활발하고 다채롭게 호명되고 소비되고 있는 추세라 보인다. 그런데 'MZ 세대'론 이전에 흥행에 성공을 거둔 세대 명칭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88만원 세대'이다.

'88만원 세대'는 비록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지라는 구호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를 정치적 주체화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알바'의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알바노조'나 '청년 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주거권) 등 사회단체는 '88만원 세대'의 세대 프레임과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반대급부에서 청년들의 탈정치화 ㅡ 원자화/파편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 및 생존주의, 먹고사니즘을 비판하고 정치적 조직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골자로 하는 담론을 2010년대 초반까지 자주 접할 수 있었다(20대 개새끼론을 포함해). 당시 한국의 사회학계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나고 구성되는지 '자아의 테크놀로지' '마음의 사회학' 같은 방법론을 바탕으로 규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제출되었다. 그야말로 산업화된 자기계발 시장-강연, 도서 등으로 이뤄진-의 장치들이 어떻게 자기계발의 주체,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을 구성해내는지, 청년들이 애용하는 콘텐츠인 웹툰이나 예능 같은 텍스트에 표상된 이데올로기 - 생존주의, 각자도생, 서바이벌 –를 해독해냈다. 이런 시도들은 '짱돌' 좀 던져봤던 (포스트) 586의 세대기억 및 세계관으로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진단하고 (훈계하고) 비판하는 관점에 한 발짝 떨어져 있긴 했지만 ‘타자에 의한 재현’이 갖는 문제점을 여전히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동적으로 체현한 속물-괴물 형상과 기성 좌파 정치의 문법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깨어 있는’ 청년 형상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청년'이란 범주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젠더, 지역, 계층/계급에 따라 첨예하게 분할된 복수의 존재라는 사실은 계급적 불평등을 꼬집었던 '수저계급론'을 지나 페미니즘 논쟁을 거치며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년 세대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려면 ‘젠더’(언론에서 젠더 ‘갈등’이라 투박하고 거칠게 명명되고 있는... 안티페미니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 여성혐오 등)와 ‘공정’ 담론을 받치고 있는 능력주의, '코인 열풍' 등의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게임'이란 저서에서 '세대 프레임'이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논쟁을 유도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구조의 피해자이자 약자인 청년과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화'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전쟁의 제로섬 게임 형태(국민연금 논란을 비롯해 청년의 등꼴을 빼먹는 기성 세대의 이미지, 실질적으로 돌봄과 복지의 충분한 보호 아래 있지 못한 노인 세대의 곤경 및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노인 혐오)로 논쟁의 틀이 짜여짐에 따라 '세대 게임'의 판을 설계한 이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대 게임'의 설계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세대 프레임'이란 렌즈가 어떻게 시각을 굴절시키고 착시를 낳는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기성 세대, 특히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었던 (5)86세대의 위선과 기만적 행태가 폭로되고 ‘부동산’을 중심으로 세대적 분노와 좌절이 분출되고 있는 흐름에서 '세대'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응축된 전장으로 소환될 거라 예측된다. 특히 코로나는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세대뿐 아니라 계급/계층과 젠더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전반적으로 청년고용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여성청년들의 고용은 더 나쁜 상황이란 통계가 있고(서비스업 같은 젠더화된 직종이 코로나에 좀 더 심대하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코로나 경제'에서 가계부채는 위험한 수준으로 급상승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악화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상위 20% 계층의 자산은 증가했다는 소식이 있고, 언택트 플랫폼 기업들은 크게 성장했다. 부동산을 비롯해 주식과 코인 같은 금융자산의 가치는 높아졌으나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취업'부터 '결혼', '내 집 마련'에 이르는 성인기의 절차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쳐 나가고 있는가. '성인기의 절차'로 규정되었던 재사회화의 과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닌 게 돼버린 세상에서 일상과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영위하고 있는가.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어디서 찾고, 정치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제니퍼 M.실바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혼란스러운 생애 경로에 의를 부여하기 위해 청년들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원하게 될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창출하게 될까?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고 성공의 새로운 지표를 구축하게 될까? 그리고 마침내 자아다움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정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형성하는 식으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키게 될까?(13-14)

​3 '신자유주의 키드', 밀레니얼 노동계급 청년들의 성장 보고서 : <커밍 업 쇼트>

2010년대 중반에 출간된 <커밍 업 쇼트>는 어떤 식으로 미국 노동계급 청년의 현실을 탐구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청년들이 성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하는 제도의 실패를 겨냥하며 '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대상은 성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아닌 제도(16)임을 밝히며 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밝힌다. 역자들은 각주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은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이란 결코 개인 또는 가족이 개별적으로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그 이유는 결국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정치의 몫이고,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 취업, 결혼은 사회와 제도의 적절한 뒷받침이 제공되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는 계급과 계층, 하비투스 같은 기존 사회학의 개념과 범주로 불평등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가족과 제도, 국가로부터 '배신'을 겪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치료 서사'를 구축해 자신의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측정하는 '치료의 에토스'에 집중한다. "감정적 견고함과 심리적 변형에 따른 치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진보를 측정(10)"하는 '치료적 자아'의 형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나약해보이기도 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하는 청년들의 모습, 정치적 차원에서 청년의 미덕으로 지목되는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고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행태를 꾸짖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100명의 미국 청년 노동자들을 만나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로부터 이들 청년 남녀에게 성인기는 노동, 가족, 관계, 친밀함, 젠더, 신뢰, 존엄이라는 선을 따라 새롭게 상상되고(10) 있음을 확인한다. 재편된 가치의 지형에서 청년들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걸어가는 길을 염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지켜보며 동행하는 것 같은 제니퍼 M.실바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치료적 자아다움은 어떻게 시민적 정치적 행동과 연결될 수 있을까?(11) 질문하며, 그리고 우리는 자기 단절이나 방어적인 고립에 맞설 제도들을 건설할 수 있을까?(13) 고민하며.

[커밍 업 쇼트]가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속기록지ethnography이기에 한국 사회의 특성을 부기할 필요가 있다. 압축고도성장을 경험했을 뿐더러 상향의식이 강한, 자식에 대한 투자(희생)와 기대가 큰 부모 세대의 의식구조, 그리고 나이에 따른 규범의 압박이 심한 사회라는 점을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국과 한국의 청년들의 상황과 사정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어려움이 있었다. 한국의 사정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커밍 업 쇼트>의 내용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커밍 업 쇼트>의 소개된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청년들을 괴롭히는 적은 빚(대학등록금과 카드 사용, 그리고 의료비 지출에 따른), 정서적 고통(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의 산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도의 배신'에 따른)이었다.

제도들 – 교육과 가족 또는 군대-은 청년들이 안정된 미래를 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많은 청년은 이 제도들이 오히려 가장 고통스런 배신의 원천임을 배우며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모범이 될 만한 생애 경로, 세상에 대한 신뢰감, 또는 자신이 비틀거릴 때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한 채로 존엄과 자아 존중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커밍 업 쇼트>, 8p

저자가 관찰한 ‘무드 경제’에서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 성인의 치료 자아의 핵심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노동에 대한 낮은 기대치, 헌신하는 연애 관계에 대한 경계심, 사회 제도에 대한 폭넓은 불신, 타인들과의 깊은 단절, 감정과 정신 건강에 최우선으로 집중하는 태도(35). 무드 경제는 존엄, 건강, 진보의 특수한 감각을 창출하는데, 사람들의 성장 과정을 형성하는 경쟁과 자립, 자기 비난의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감각이다. 감정을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39) 이 경제에서 사람들은 노동이나 결혼, 계급 연대 같은 전통적인 통화가 아니라 감정들을 자아 변형 서사로 조직하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과 자기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50). 불확실한 사회에서 ‘리스크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감정과 심리 발달에 집착하는 내향적인 자아를 정립한다. 이 자아는 유연한 경제와 포스트전통 사회 세계가 초래한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인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문화 자원이 되었다(51).

이렇게 치료 자아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화적 변동-무드 경제가 낳은 지배적인 유형이지만 이 자아 서사를 구성하고, 자아다움을 추구하는 접근성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음을 지적한다. 치료적 자아 서사를 성공적으로 창출하려면 계급에 기반한 ‘연장 세트’tool kit가 필요한데 노동 계급은 언어 능력과 감정 표현, 물질 자원 등으로 구성된 이 연장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 계급의 삶에는 치료적인 감정·언어 기술과 하비투스가 없다.”(52) 결과적으로 치료 자원들이 배제된 노동계급의 에토스로 인해 노동자들이 웰빙에 이르는 역량을 갖추지 어렵다고 한다면, 이 감정들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3).

(<커밍 업 쇼트>의 이론적/방법론이 무엇인지, 어떤 면에서 유효한 분석과 통찰을 제공하는 데 성공 혹은 실패했는지 따져보기)

4 '나이 든 청년'으로 성장을 상상하기. 한국에서 '청년 이행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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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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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274)

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번역한 노시내는 '번역가의 글'에서 자신이 직접 체감한 '소수적 감정'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의 상대방에게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감정, 혹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줘도 인식하는 데 실패할 수 있는 감정, 그래서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대다수에게 차라리 설명하기를 포기했을 법한 감정,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택한다고 해서 카타르시스가 찾아오지 않는 감정,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가능성에 항시적으로 노출돼 있으면서 발산도 수렴도 없는 폐쇄회로에서 영혼을 부식시키는 감정, 그런 '소수적 감정'이 놓인 자리가 제각각 다르니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 작가와 자신의 체험이 동일하지 않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이 찾아낸 하나의 공감 방식을 보여줬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게 될 독자들이 자신만의 공감 혹은 번역 방식을 찾아내 '소수적 감정'들(마이너 필링'스')이 좀 더 너른 보편성의 자장을 가질 수 있길 희망하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캐시 박 홍의 내밀한 기록을 꼼꼼이 읽어내는 게 우선이겠다.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말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차이나는클라스>에서 정희옥 교수가 미국의 아시아 혐오의 역사를 설명한 내용과 거의 포개졌다. 180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철도를 놓는 데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수용했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은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청나라 정부의 폭정(과도한 세금)에 못이겨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쿨리'로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에 투입돼 목숨을 많이 잃었으나 이들에 대한 미국사회의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건국했던 이들은 미국을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로 이뤄진 '순수한' 백인의 국가로 건설하고픈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어쩌면 백인근본주의라 불릴 수도 있을 인종주의의 토양에서 팽창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전세계에서 노동력들을 미국 땅으로 불러모았고, <차이나는클라스> 강연에 소개된 일화처럼 일본계 미국인을 '흑인'으로 분류/판단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백인성/흑인성은 골상학과 같은 당대의 과학의 힘을 빌어 자의적이고 모순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민금지법이 시행되었던 시대를 지나 이민국적법이 제정되었고,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발흥하며 소수인종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투쟁을 통해 법적 권리를 쟁취해나갔으나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한 '사회적 성원권'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흑인과 대비 속에서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었다.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13). 영리하고 성공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 같고, 무감정하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존재(14).

저자는 이렇게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인 아시아인의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넣고자 한다고 했다고, 그러면서 "남들에게 좀 더 이해받고 눈에 덜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집필목적을 밝힌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음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저자의 편지를 읽고 나서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는지, 그리고 마티 편집부 레터에 영업당한 것이긴 하지만 이 책과의 만남을 성사시킨 나의 기대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평소 아시아 혐오 및 혐오범죄 소식을 접하며 미국에 유학을 가서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염려된 적은 있지만 사실 먼 곳의 이야기,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감각이 있었다. 한마디로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한국사회 내부의 인종주의와 혐오의 양태들을 거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매개로 전시된 정보의 형태로 수용했기에 (일일이 반응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의식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비틀어 노이즈와 같은 상태로 전환시키거나 혐오의 흐름과 경향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증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그래왔지만 대중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발현된 감정을 거시사회학적으로 관찰하고,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신체를 어떻게 변용시키고 자기기록, 수행적 글쓰기가 감정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던 나였기에 예약주문한 <마이너 필링스>가 도착하자마자 매일매일 읽어냈다.

캐시 박 홍은 아시아계 미국인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타 인종, 젠더,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국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신체'로 위치지어진 자신의 몸의 레이어를 종적으로, 횡적으로 탐구한다. 분노, 우울, 짜증, 불쾌함이라 적었을 때 개개인의 감정의 지층과 결, 맥락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명사의 둔탁함과 우둔함에 맞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두터운 서술thick description(클리퍼드 기어츠)을 통해 '이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는 증명과 선언을 완수해낸다. 그동안 내 무지와 몰이해로 인해 타인의 감정을 대상화된 인식틀에 대입해 납작하고 평평하게 단순화시켜 버렸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소수적 감정을 번역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인식론적 방법이 결여돼 있었던 순간에 내 몸을 은근슬쩍 보편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안일하고 게을러서 폭력적이었던 마음 같은 것들. 노시내 번역가의 일화처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일이 설명해주길 부탁하기도 조금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넘겨짚고 오해를 일삼았던 마음 같은 것들. 그렇게 신중한 침묵 속에 틀어앉아 양가적이고 복잡한 소수적 감정의 속내를 살피기를 회피했던 날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고 나니 저자가 말했던 '자신의 일부'의 질문이 돌아왔다. 저자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자신이 놓여 있던 소수적 위치를 확인하고, 소수적 감정들 간의 보편적 공감의 선을 새롭게 긋고자 했던 노시내 번역가의 번역과정을 살피며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소수적 감정이 여전히 제 거처를 얻지 못한 채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잡대' 출신. 헤테로 시스젠더 비장애인 수도권 거주 남성으로서 기득권(내지 특권)을 누려왔던 내게 혐오 대상이 되고, 혐오 대상으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 대상은 학벌주의였다. 학벌주의를 소재로 썼던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 학벌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혐오 담론에 비해 영향력과 심각성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을 도입해 학벌에 따른 차별을 줄이고자 하는 명시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능력주의'의 이상대로 학벌과 같은 출신 배경(학벌 또한 능력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보다 업무 능력을 중시하는 기조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 들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학벌에 따른 차별보다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플랫폼 노동자/긱 이코노미, 정말 목숨이 걸린 위험한 노동환경에 놓인 블루칼라 노동자 이슈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사태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에 비해 조명을 충분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네이버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직장 내 괴롭힘'의 요인 중 하나로 학벌주의의 사내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학벌주의는 아시아계 미국인 캐시 박 홍에게 은근하고 교묘하게 자행된 인종차별처럼 고도로 섬세하게 발전했음을, 발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야와 직종에 따라 풍토가 제각각 다를 것이다. 개발자 사회의 경우, 코딩만 잘하면 실력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 최상위권 대학 그룹 내부에서 교묘한 구별짓기와 알력 다툼도 존재하겠으나 지방대 혐오 및 차별은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특히 사적 영역에서 낯선 이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확립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질문, 혹은 호구조사를 적지 않게 받아봤다. 한 번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문화/관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어 친구에게 공유한 적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질문일 수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게 친구의 답변이었다. 나는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방대를 비롯해 대학 서열에 따른 혐오가 놀이처럼 행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사의 취지와 메세지를 보충설명하는 대신 대화주제를 바꾸는 편을 택했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설명을 하는 내가 구차해질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서술과 발화는 주관적이고 특수한 감정과 이익을 대변하지 않기 어려워 내가 '비합리적'으로 굴게 될까 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마 그 친구가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처받게 될 거란 염려와 걱정도 있었을 것 같다. 몸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는 글 - 담론의 영역에서 논리로 무장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공격이나 반박, 비판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몸에서 도저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현장에서 나는 침묵을 택했고, 후에 침묵보다 편한 기만을 택했다. 처음에 출신 대학을 밝히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밝히고 다녔는데(출신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음을 눈치채는 이도 있었지만 대학에 다니지 않고 독학하는 거냐고 확인하려는 이가 있어) 나중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번 만나고 지나칠 사이에서 진실한 필요가 없다고 자기정당화를 했으며,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신뢰할 만한'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사후고백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출신대학을 들었을 때 상대방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기미를 포착하게 될 까봐 걱정했던 것일까.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는 혐오의 논리와 언어를 구사할 이들이 아니라고 예상되었으나 온전히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평소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적 윤리적으로 섬세한 스탠스를 취하던 친구가 '지잡대' 욕하는 걸 보고 (평소 잠을 깊게 못 자는 친구였는데 지방의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대학 축제가 끝나고 새벽에 소란스럽게 했던 모양이었다. 욕할 만한 상황인 건 자명했으나 평소 말을 아끼고 언어에 예민하며 표현을 조심스럽게 하는 친구였던 만큼 ...) 학벌주의는 입시라는 트라우마를 저마다 겪어낸 한국인들의 몸에 각인돼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만의 수준에 도달하자 자기분열과 자기혐오가 심해졌다. 차라리 맘 편하게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대놓고 무례하게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를 맞딱드린다면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거란 후회가 몰려왔다. 여기에 이르고 나니 결국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입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선택을 했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형성된 자기혐오가 학벌주의를 음화된 방식으로 내면화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노시내 번역가가 설명한 '스트레스'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취업 과정을 비롯해 언제 어디서 출신 대학의 속살을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변함 없지만 대학원의 간판이 갑각류의 외피처럼 단단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억압받고 차별받은 소수자적 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과잉 자기동일화하게 되는 메커니즘, 나는 비판적으로 자기성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감정은 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이상한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주관적 내면적 표현에 그치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infernal circulation 지긋지긋한, 지옥과 같은 악무한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으로 '인종화된 몸'(프란츠 파농)으로부터 탈정체화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구조적 폭력, 상징폭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변혁하고자 운동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자들의 개별적 고통들을 듣는 데 귀 기울이고, 소수적 감정들의 보편성을 디딤돌 삼아 기존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과 내 정체성 사이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게 출발될 것 같았다. 그 출발로 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해둔다. 캐시 박 홍이 <블레이드 러너 2049>, 웨스 앤더슨의 영화(특히 <문라이즈 킹덤>),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원래 별로 안 좋아했던 책이라 통쾌함을 느끼며 읽었다) 등 백인 남성성 및 판타지의 서사를 (굳이 명명하자면 '탈식민주의적 독법'으로) 비판적으로 독해해냈듯 예술 텍스트와 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더 많은 소수적 감정들이 옹호되어도 괜찮다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완고해보이는 기존 질서에 불편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적 말하기를 실천할 수 있길.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소수적 감정'을 소수자 및 소수집단의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데 기여하게끔 서술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겪은 감정을 내밀하게 서술하되 가족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살피고, 흑인과도 다른 갈색인(황인을 대체하는 용어인 듯하다)의 소수자성을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우월주의가 자행해온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소수적 인종들이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반목했는지 복잡다단한 역사를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이미지-로드니 킹의 구타 장면과 LA 시가지에 작은 화염이 점처럼 박힌 모습을 방송국 헬리콥터가 멀찍이서 촬영한 장면-가 1992년 LA 폭동 사태의 지배적 기억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실 김-깁슨 감독의 <4.29> 다큐멘터리와 당시 흑인들의 소수적 감정을 다룬 시인 완다 콜먼과 소설가 폴 비티의 책들을 소환해 "착한" 한국 상인 대 "못된" 흑인 동네라는 간명한 공식(94)에 들어맞지 않는 역사의 실상을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자고 권한다. 맬컴 액스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했던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의 초상을 복원해내기도 하고, 중국계 트랜스젠더 작가 우 창이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로 성공을 거뒀지만 자신과 우정을 나눴던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내기도 한다.

'아시아계' 혹은 제3세계 작가에게 부과되었던 소수인종의 인종적 자기재현의 요청과 불화하며 모더니즘에 기울었던 자신의 미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이미지와 문자언어를 통해 실험적으로 탐구했던 차학경의 죽음,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말해지지 않았던 그녀 인생의 진실을 침묵과 망각으로부터 건져낸다.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독법은 전문가 사회에서 사장된 것에 가까울 정도로 낡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치부되지만 차학경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누구(who)인지 천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how) 쓸 지를 고민했던 작가였기에 나는 작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었다. 에밀리 정민 윤의 작품 제목대로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을 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서부터 한국군이 베트남의 하미 마을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트럼프 정권 당시 아시아 인종을 향한 혐오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피해자성'이나 '당사자성'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소수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가 누구의 적인지 규정하는 권력(257),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 삼는 권력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

<감사의 말>에 언급된 학자들 중 사라 아메드와 로렌 벌랜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딕테' 시리즈에 포함된 일원이기도 하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과 <고집스런 주체>Willful subjects, 로렌 벌랜트는 <작인한 낙관>Cruel Optimism. 딕테 시리즈에 대한 설명문에서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인종적 억압과 젠더 억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말하고 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차학경의 <딕테>에 대한 이어 말하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침묵하며 지배 언어를 그대로 받아 적었던 수동적 받아쓰기dictee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의 다른 목소리, 거대 서사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에 빙의해 듣고 말하고 쓰는, 능동적 받아쓰기를 통해 침묵을 비우고자 한다." 캐시 박 홍은 시인답게 언어, 구체적으로 영어에 대해 예민한 감각과 첨예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달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원어민'의 언어를 능숙하게 매끄럽게 모방하길 욕망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수자로서 영어를 '소수 언어'(들뢰즈-과타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영어 내부의 이질성, 차이를 현시하고 여기서 문학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내고자 한다. 딕테 시리즈의 서술처럼 수동적 받아쓰기가 아닌 능동적 받아쓰기,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조'theoria의 공간을 확보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침묵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걸 전달하는 모더니즘의 문법을 넘어 그녀는 침묵을 비워낸다. 테레사 학경 차의 문장으로, 에밀리 정민 윤의 문장으로,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아껴 읽고 싶었으나 더 빨리 읽어버린 이 책을 곁에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다.

+ 여성 예술가들의 우정을 그려내보고 싶다는 야심으로 자신의 대학시절의 기억을 담은 장chapter은 '어떤 배움'의 제목을 달고 있다. 에린과 헬렌 그리고 자신 사이 '애증'이란 간단한 말 안에 포섭되지 않는 우정을, 그녀들의 재능과 불안정함, 열정과 좌절을 성장소설 읽듯, 시트콤 보듯 재밌게 또 슬프게 공감하며 읽었다. 타인의 서사, 특히 고통을 착취하듯 빌려다 쓰는 글쓰기의 몰윤리성과 관련한 쟁점들이 제기되는 모습들을 지켜본 입장에서 서로의 삶이 얽혀 있는 '친구 사이' 여성 예술가들끼리 우정의 사수와 파탄의 경계선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캐시 박 홍의 시, 그리고 그녀가 영화 <미나리>에 남긴 코멘트나 글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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