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문현아.박준규 옮김 / 리시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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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서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김애란 - <서른> 중)

'서른'을 다룬 텍스트들이 꽤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최승자의 <삼십세>,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번에 검색해서 알게 된> 블로콜리너마저의 <서른> 등등... 왜 서른인가 굳이 따져보면 '앞자리'가 십 년 만에 바뀌면서 나이에 대한 체감이 강하게 들고, 이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성인''어른'의 티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에서 불안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서른'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여서 그랬을 것 같고, 지금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이에게 조급함을 들게 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 이직 같은 선택을 고민하는 시기여서 그럴 것 같다.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서른에 갑자기 시간이 내 앞에 찾아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불심검문을 하는 특성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서른의 상징성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유무형의 압력에 기인한다. 번듯한 사회인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 구실' 해내야 한다는 것. 십대부터 이십대의 어느 시점까지 이어져온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과 발달의 상승곡선이 멈춰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과도기와 정체기의 '인생 슬럼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들 때, 남들은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거나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부모'가 되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서른이 온다. 그리고 서른 하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간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김애란 - <서른>

김애란의 <서른>은 몇 년 전 폐간된 <문예중앙>이란 문예지의 2011년 겨울호에 수록된 소설이다. 설마 김애란 작가가 생물학적으로 서른살에 이 작품을 썼을까 싶어(왜냐하면 소설의 윤리적 깊이가 굉장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필 검색을 해봤더니... 거의 맞았다. 1980년생이시니까 2011년에 썼다고 하면 한국나이로 32살에 쓴 것이긴 하지만 서른 즈음에 이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거마 대학생 다단계 사건에 대한 자료조사에 시간을 쏟으셨을 테고, 아마 초고를 다 쓰기까지 그리고 퇴고를 마치기까지 다른 소설들의 평균적인 집필 시간보다 좀 더 걸렸을 것 같다. 불행히도 현재 <문예중앙> 2011년 겨울호도, <서른>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비행운>도 갖고 있지 않다 보니 소설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서른>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속으로 밀쳐버린 누군가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죄책감보다 왠지 미안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을 용서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용서받을 수 없는 미안함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에 위치시키고 벌을 내리는 일은 어쩌면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용서-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형이상학적 죄의 문제를 제쳐두고 현전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고자 하는 일이 어렵고 고되지만 참된 길에 가까워보인다. 편지의 수신자인 '언니'가 답을 줄 수 없겠지만 언니의 존재로 하여금 '나'가 악무한적 고뇌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어떻게든 지고자 하는 애씀이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른>의 발신인은 사회적 차원에서 '커밍 업 쇼트', 즉 '인간 구실'을 아직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수준 미달 상태로 인식될지 모르겠으나 그가 끝끝내 지켜내려 하는 책임감은 어른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지 않은가. <서른>은 어른들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책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공백에 물음을 던지고 또 던진다.

<서른>의 주인공(서른의 주인공이 '서른'인지 수신인인 언니가 '서른'인지 모르겠으나)은 지금 마흔이 돼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독립적으로 싱글생활을 하고 있다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안 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면 조금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세상에 내보낸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게 만든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질서를 비판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 같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분노를 느끼고, 돌봄과 육아가 과부하가 걸리게끔 편중된 상황에서 자신이 엄마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하며 자기 자식 하나 책임지기 어렵긴 하지만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 기성 세대에 진입하고 있는 혹은 이미 기성 세대의 일부가 된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청년 세대를 향해 염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규정한 성인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성인으로 정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곁에 친구들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고백을 담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어줄 언니가 남아 있을까?

2 세대론의 궤적에 대한 하나의 거친 소묘

'MZ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작은 어폐를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세대 명칭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개 확산된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유행(트렌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OO 세대'라는 발명품 내지 신상품을 이해하려면 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호명의 욕망 및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대 명칭은 정치적 목적, 마케팅적 목적에 따라 창안된다. 세대라는 사회학적 개념이 정립되자 인구 집단을 새로운 범주로 분석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세대 개념이 생명력을 얻어 '사회적 실재'가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히트 친 세대 명칭은 '86 세대'일 텐데 정확한 연원과 시점을 따져봐야겠지만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에서 부상한 정치세력을 명명하고자 사용된 '(3)86'세대는 1987년 이후, 그러니까 87체제의 성립 이후부터 진보 정치의 헤게모니를 독점하다시피 군림했기에 '486''586'으로 변주하며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 <386 세대 유감>, <불평등의 세대>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으로 '586'세대를 지목하고 비판하는 담론들이 586 스타 정치인들의 몰락과 정권의 실정失政의 맥락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에 비해 'MZ 세대'론은 정치적 성격이 훨씬 옅다. MZ 세대는 '86'세대의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성향과 달리 반권위주의와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며, 페미니즘 기후위기 등 그동안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후순위로 밀렸던 의제들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을 띤다고 설명된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현실정치에서 단일한 세대 집단으로서 뚜렷하고 일관된 정치적 경향성을 보여준 적이 없어 'MZ세대' 개념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섣부른 감이 있다. (투표권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청소년층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Z세대를 살짝 제쳐두고) 20-30대로 구성된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이준석이란 정치인을 제1야당의 당대표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이대남'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시화된 바 있긴 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을 주된 이데올로기를 삼는 이 집단의 정치적 성격,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와 밀도를 따지려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Z세대 자체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마케팅/시장의 영역에서 활발하고 다채롭게 호명되고 소비되고 있는 추세라 보인다. 그런데 'MZ 세대'론 이전에 흥행에 성공을 거둔 세대 명칭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88만원 세대'이다.

'88만원 세대'는 비록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지라는 구호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를 정치적 주체화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알바'의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알바노조'나 '청년 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주거권) 등 사회단체는 '88만원 세대'의 세대 프레임과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반대급부에서 청년들의 탈정치화 ㅡ 원자화/파편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 및 생존주의, 먹고사니즘을 비판하고 정치적 조직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골자로 하는 담론을 2010년대 초반까지 자주 접할 수 있었다(20대 개새끼론을 포함해). 당시 한국의 사회학계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나고 구성되는지 '자아의 테크놀로지' '마음의 사회학' 같은 방법론을 바탕으로 규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제출되었다. 그야말로 산업화된 자기계발 시장-강연, 도서 등으로 이뤄진-의 장치들이 어떻게 자기계발의 주체,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을 구성해내는지, 청년들이 애용하는 콘텐츠인 웹툰이나 예능 같은 텍스트에 표상된 이데올로기 - 생존주의, 각자도생, 서바이벌 –를 해독해냈다. 이런 시도들은 '짱돌' 좀 던져봤던 (포스트) 586의 세대기억 및 세계관으로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진단하고 (훈계하고) 비판하는 관점에 한 발짝 떨어져 있긴 했지만 ‘타자에 의한 재현’이 갖는 문제점을 여전히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동적으로 체현한 속물-괴물 형상과 기성 좌파 정치의 문법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깨어 있는’ 청년 형상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청년'이란 범주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젠더, 지역, 계층/계급에 따라 첨예하게 분할된 복수의 존재라는 사실은 계급적 불평등을 꼬집었던 '수저계급론'을 지나 페미니즘 논쟁을 거치며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년 세대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려면 ‘젠더’(언론에서 젠더 ‘갈등’이라 투박하고 거칠게 명명되고 있는... 안티페미니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 여성혐오 등)와 ‘공정’ 담론을 받치고 있는 능력주의, '코인 열풍' 등의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게임'이란 저서에서 '세대 프레임'이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논쟁을 유도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구조의 피해자이자 약자인 청년과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화'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전쟁의 제로섬 게임 형태(국민연금 논란을 비롯해 청년의 등꼴을 빼먹는 기성 세대의 이미지, 실질적으로 돌봄과 복지의 충분한 보호 아래 있지 못한 노인 세대의 곤경 및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노인 혐오)로 논쟁의 틀이 짜여짐에 따라 '세대 게임'의 판을 설계한 이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대 게임'의 설계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세대 프레임'이란 렌즈가 어떻게 시각을 굴절시키고 착시를 낳는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기성 세대, 특히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었던 (5)86세대의 위선과 기만적 행태가 폭로되고 ‘부동산’을 중심으로 세대적 분노와 좌절이 분출되고 있는 흐름에서 '세대'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응축된 전장으로 소환될 거라 예측된다. 특히 코로나는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세대뿐 아니라 계급/계층과 젠더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전반적으로 청년고용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여성청년들의 고용은 더 나쁜 상황이란 통계가 있고(서비스업 같은 젠더화된 직종이 코로나에 좀 더 심대하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코로나 경제'에서 가계부채는 위험한 수준으로 급상승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악화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상위 20% 계층의 자산은 증가했다는 소식이 있고, 언택트 플랫폼 기업들은 크게 성장했다. 부동산을 비롯해 주식과 코인 같은 금융자산의 가치는 높아졌으나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취업'부터 '결혼', '내 집 마련'에 이르는 성인기의 절차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쳐 나가고 있는가. '성인기의 절차'로 규정되었던 재사회화의 과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닌 게 돼버린 세상에서 일상과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영위하고 있는가.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어디서 찾고, 정치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제니퍼 M.실바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혼란스러운 생애 경로에 의를 부여하기 위해 청년들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원하게 될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창출하게 될까?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고 성공의 새로운 지표를 구축하게 될까? 그리고 마침내 자아다움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정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형성하는 식으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키게 될까?(13-14)

​3 '신자유주의 키드', 밀레니얼 노동계급 청년들의 성장 보고서 : <커밍 업 쇼트>

2010년대 중반에 출간된 <커밍 업 쇼트>는 어떤 식으로 미국 노동계급 청년의 현실을 탐구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청년들이 성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하는 제도의 실패를 겨냥하며 '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대상은 성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아닌 제도(16)임을 밝히며 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밝힌다. 역자들은 각주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은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이란 결코 개인 또는 가족이 개별적으로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그 이유는 결국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정치의 몫이고,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 취업, 결혼은 사회와 제도의 적절한 뒷받침이 제공되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는 계급과 계층, 하비투스 같은 기존 사회학의 개념과 범주로 불평등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가족과 제도, 국가로부터 '배신'을 겪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치료 서사'를 구축해 자신의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측정하는 '치료의 에토스'에 집중한다. "감정적 견고함과 심리적 변형에 따른 치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진보를 측정(10)"하는 '치료적 자아'의 형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나약해보이기도 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하는 청년들의 모습, 정치적 차원에서 청년의 미덕으로 지목되는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고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행태를 꾸짖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100명의 미국 청년 노동자들을 만나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로부터 이들 청년 남녀에게 성인기는 노동, 가족, 관계, 친밀함, 젠더, 신뢰, 존엄이라는 선을 따라 새롭게 상상되고(10) 있음을 확인한다. 재편된 가치의 지형에서 청년들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걸어가는 길을 염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지켜보며 동행하는 것 같은 제니퍼 M.실바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치료적 자아다움은 어떻게 시민적 정치적 행동과 연결될 수 있을까?(11) 질문하며, 그리고 우리는 자기 단절이나 방어적인 고립에 맞설 제도들을 건설할 수 있을까?(13) 고민하며.

[커밍 업 쇼트]가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속기록지ethnography이기에 한국 사회의 특성을 부기할 필요가 있다. 압축고도성장을 경험했을 뿐더러 상향의식이 강한, 자식에 대한 투자(희생)와 기대가 큰 부모 세대의 의식구조, 그리고 나이에 따른 규범의 압박이 심한 사회라는 점을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국과 한국의 청년들의 상황과 사정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어려움이 있었다. 한국의 사정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커밍 업 쇼트>의 내용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커밍 업 쇼트>의 소개된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청년들을 괴롭히는 적은 빚(대학등록금과 카드 사용, 그리고 의료비 지출에 따른), 정서적 고통(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의 산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도의 배신'에 따른)이었다.

제도들 – 교육과 가족 또는 군대-은 청년들이 안정된 미래를 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많은 청년은 이 제도들이 오히려 가장 고통스런 배신의 원천임을 배우며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모범이 될 만한 생애 경로, 세상에 대한 신뢰감, 또는 자신이 비틀거릴 때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한 채로 존엄과 자아 존중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커밍 업 쇼트>, 8p

저자가 관찰한 ‘무드 경제’에서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 성인의 치료 자아의 핵심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노동에 대한 낮은 기대치, 헌신하는 연애 관계에 대한 경계심, 사회 제도에 대한 폭넓은 불신, 타인들과의 깊은 단절, 감정과 정신 건강에 최우선으로 집중하는 태도(35). 무드 경제는 존엄, 건강, 진보의 특수한 감각을 창출하는데, 사람들의 성장 과정을 형성하는 경쟁과 자립, 자기 비난의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감각이다. 감정을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39) 이 경제에서 사람들은 노동이나 결혼, 계급 연대 같은 전통적인 통화가 아니라 감정들을 자아 변형 서사로 조직하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과 자기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50). 불확실한 사회에서 ‘리스크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감정과 심리 발달에 집착하는 내향적인 자아를 정립한다. 이 자아는 유연한 경제와 포스트전통 사회 세계가 초래한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인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문화 자원이 되었다(51).

이렇게 치료 자아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화적 변동-무드 경제가 낳은 지배적인 유형이지만 이 자아 서사를 구성하고, 자아다움을 추구하는 접근성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음을 지적한다. 치료적 자아 서사를 성공적으로 창출하려면 계급에 기반한 ‘연장 세트’tool kit가 필요한데 노동 계급은 언어 능력과 감정 표현, 물질 자원 등으로 구성된 이 연장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 계급의 삶에는 치료적인 감정·언어 기술과 하비투스가 없다.”(52) 결과적으로 치료 자원들이 배제된 노동계급의 에토스로 인해 노동자들이 웰빙에 이르는 역량을 갖추지 어렵다고 한다면, 이 감정들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3).

(<커밍 업 쇼트>의 이론적/방법론이 무엇인지, 어떤 면에서 유효한 분석과 통찰을 제공하는 데 성공 혹은 실패했는지 따져보기)

4 '나이 든 청년'으로 성장을 상상하기. 한국에서 '청년 이행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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