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274)

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번역한 노시내는 '번역가의 글'에서 자신이 직접 체감한 '소수적 감정'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의 상대방에게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감정, 혹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줘도 인식하는 데 실패할 수 있는 감정, 그래서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대다수에게 차라리 설명하기를 포기했을 법한 감정,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택한다고 해서 카타르시스가 찾아오지 않는 감정,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가능성에 항시적으로 노출돼 있으면서 발산도 수렴도 없는 폐쇄회로에서 영혼을 부식시키는 감정, 그런 '소수적 감정'이 놓인 자리가 제각각 다르니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 작가와 자신의 체험이 동일하지 않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이 찾아낸 하나의 공감 방식을 보여줬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게 될 독자들이 자신만의 공감 혹은 번역 방식을 찾아내 '소수적 감정'들(마이너 필링'스')이 좀 더 너른 보편성의 자장을 가질 수 있길 희망하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캐시 박 홍의 내밀한 기록을 꼼꼼이 읽어내는 게 우선이겠다.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말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차이나는클라스>에서 정희옥 교수가 미국의 아시아 혐오의 역사를 설명한 내용과 거의 포개졌다. 180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철도를 놓는 데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수용했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은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청나라 정부의 폭정(과도한 세금)에 못이겨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쿨리'로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에 투입돼 목숨을 많이 잃었으나 이들에 대한 미국사회의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건국했던 이들은 미국을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로 이뤄진 '순수한' 백인의 국가로 건설하고픈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어쩌면 백인근본주의라 불릴 수도 있을 인종주의의 토양에서 팽창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전세계에서 노동력들을 미국 땅으로 불러모았고, <차이나는클라스> 강연에 소개된 일화처럼 일본계 미국인을 '흑인'으로 분류/판단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백인성/흑인성은 골상학과 같은 당대의 과학의 힘을 빌어 자의적이고 모순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민금지법이 시행되었던 시대를 지나 이민국적법이 제정되었고,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발흥하며 소수인종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투쟁을 통해 법적 권리를 쟁취해나갔으나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한 '사회적 성원권'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흑인과 대비 속에서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었다.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13). 영리하고 성공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 같고, 무감정하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존재(14).

저자는 이렇게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인 아시아인의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넣고자 한다고 했다고, 그러면서 "남들에게 좀 더 이해받고 눈에 덜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집필목적을 밝힌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음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저자의 편지를 읽고 나서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는지, 그리고 마티 편집부 레터에 영업당한 것이긴 하지만 이 책과의 만남을 성사시킨 나의 기대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평소 아시아 혐오 및 혐오범죄 소식을 접하며 미국에 유학을 가서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염려된 적은 있지만 사실 먼 곳의 이야기,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감각이 있었다. 한마디로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한국사회 내부의 인종주의와 혐오의 양태들을 거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매개로 전시된 정보의 형태로 수용했기에 (일일이 반응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의식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비틀어 노이즈와 같은 상태로 전환시키거나 혐오의 흐름과 경향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증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그래왔지만 대중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발현된 감정을 거시사회학적으로 관찰하고,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신체를 어떻게 변용시키고 자기기록, 수행적 글쓰기가 감정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던 나였기에 예약주문한 <마이너 필링스>가 도착하자마자 매일매일 읽어냈다.

캐시 박 홍은 아시아계 미국인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타 인종, 젠더,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국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신체'로 위치지어진 자신의 몸의 레이어를 종적으로, 횡적으로 탐구한다. 분노, 우울, 짜증, 불쾌함이라 적었을 때 개개인의 감정의 지층과 결, 맥락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명사의 둔탁함과 우둔함에 맞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두터운 서술thick description(클리퍼드 기어츠)을 통해 '이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는 증명과 선언을 완수해낸다. 그동안 내 무지와 몰이해로 인해 타인의 감정을 대상화된 인식틀에 대입해 납작하고 평평하게 단순화시켜 버렸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소수적 감정을 번역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인식론적 방법이 결여돼 있었던 순간에 내 몸을 은근슬쩍 보편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안일하고 게을러서 폭력적이었던 마음 같은 것들. 노시내 번역가의 일화처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일이 설명해주길 부탁하기도 조금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넘겨짚고 오해를 일삼았던 마음 같은 것들. 그렇게 신중한 침묵 속에 틀어앉아 양가적이고 복잡한 소수적 감정의 속내를 살피기를 회피했던 날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고 나니 저자가 말했던 '자신의 일부'의 질문이 돌아왔다. 저자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자신이 놓여 있던 소수적 위치를 확인하고, 소수적 감정들 간의 보편적 공감의 선을 새롭게 긋고자 했던 노시내 번역가의 번역과정을 살피며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소수적 감정이 여전히 제 거처를 얻지 못한 채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잡대' 출신. 헤테로 시스젠더 비장애인 수도권 거주 남성으로서 기득권(내지 특권)을 누려왔던 내게 혐오 대상이 되고, 혐오 대상으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 대상은 학벌주의였다. 학벌주의를 소재로 썼던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 학벌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혐오 담론에 비해 영향력과 심각성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을 도입해 학벌에 따른 차별을 줄이고자 하는 명시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능력주의'의 이상대로 학벌과 같은 출신 배경(학벌 또한 능력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보다 업무 능력을 중시하는 기조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 들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학벌에 따른 차별보다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플랫폼 노동자/긱 이코노미, 정말 목숨이 걸린 위험한 노동환경에 놓인 블루칼라 노동자 이슈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사태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에 비해 조명을 충분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네이버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직장 내 괴롭힘'의 요인 중 하나로 학벌주의의 사내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학벌주의는 아시아계 미국인 캐시 박 홍에게 은근하고 교묘하게 자행된 인종차별처럼 고도로 섬세하게 발전했음을, 발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야와 직종에 따라 풍토가 제각각 다를 것이다. 개발자 사회의 경우, 코딩만 잘하면 실력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 최상위권 대학 그룹 내부에서 교묘한 구별짓기와 알력 다툼도 존재하겠으나 지방대 혐오 및 차별은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특히 사적 영역에서 낯선 이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확립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질문, 혹은 호구조사를 적지 않게 받아봤다. 한 번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문화/관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어 친구에게 공유한 적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질문일 수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게 친구의 답변이었다. 나는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방대를 비롯해 대학 서열에 따른 혐오가 놀이처럼 행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사의 취지와 메세지를 보충설명하는 대신 대화주제를 바꾸는 편을 택했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설명을 하는 내가 구차해질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서술과 발화는 주관적이고 특수한 감정과 이익을 대변하지 않기 어려워 내가 '비합리적'으로 굴게 될까 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마 그 친구가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처받게 될 거란 염려와 걱정도 있었을 것 같다. 몸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는 글 - 담론의 영역에서 논리로 무장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공격이나 반박, 비판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몸에서 도저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현장에서 나는 침묵을 택했고, 후에 침묵보다 편한 기만을 택했다. 처음에 출신 대학을 밝히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밝히고 다녔는데(출신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음을 눈치채는 이도 있었지만 대학에 다니지 않고 독학하는 거냐고 확인하려는 이가 있어) 나중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번 만나고 지나칠 사이에서 진실한 필요가 없다고 자기정당화를 했으며,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신뢰할 만한'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사후고백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출신대학을 들었을 때 상대방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기미를 포착하게 될 까봐 걱정했던 것일까.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는 혐오의 논리와 언어를 구사할 이들이 아니라고 예상되었으나 온전히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평소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적 윤리적으로 섬세한 스탠스를 취하던 친구가 '지잡대' 욕하는 걸 보고 (평소 잠을 깊게 못 자는 친구였는데 지방의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대학 축제가 끝나고 새벽에 소란스럽게 했던 모양이었다. 욕할 만한 상황인 건 자명했으나 평소 말을 아끼고 언어에 예민하며 표현을 조심스럽게 하는 친구였던 만큼 ...) 학벌주의는 입시라는 트라우마를 저마다 겪어낸 한국인들의 몸에 각인돼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만의 수준에 도달하자 자기분열과 자기혐오가 심해졌다. 차라리 맘 편하게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대놓고 무례하게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를 맞딱드린다면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거란 후회가 몰려왔다. 여기에 이르고 나니 결국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입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선택을 했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형성된 자기혐오가 학벌주의를 음화된 방식으로 내면화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노시내 번역가가 설명한 '스트레스'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취업 과정을 비롯해 언제 어디서 출신 대학의 속살을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변함 없지만 대학원의 간판이 갑각류의 외피처럼 단단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억압받고 차별받은 소수자적 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과잉 자기동일화하게 되는 메커니즘, 나는 비판적으로 자기성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감정은 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이상한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주관적 내면적 표현에 그치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infernal circulation 지긋지긋한, 지옥과 같은 악무한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으로 '인종화된 몸'(프란츠 파농)으로부터 탈정체화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구조적 폭력, 상징폭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변혁하고자 운동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자들의 개별적 고통들을 듣는 데 귀 기울이고, 소수적 감정들의 보편성을 디딤돌 삼아 기존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과 내 정체성 사이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게 출발될 것 같았다. 그 출발로 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해둔다. 캐시 박 홍이 <블레이드 러너 2049>, 웨스 앤더슨의 영화(특히 <문라이즈 킹덤>),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원래 별로 안 좋아했던 책이라 통쾌함을 느끼며 읽었다) 등 백인 남성성 및 판타지의 서사를 (굳이 명명하자면 '탈식민주의적 독법'으로) 비판적으로 독해해냈듯 예술 텍스트와 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더 많은 소수적 감정들이 옹호되어도 괜찮다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완고해보이는 기존 질서에 불편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적 말하기를 실천할 수 있길.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소수적 감정'을 소수자 및 소수집단의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데 기여하게끔 서술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겪은 감정을 내밀하게 서술하되 가족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살피고, 흑인과도 다른 갈색인(황인을 대체하는 용어인 듯하다)의 소수자성을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우월주의가 자행해온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소수적 인종들이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반목했는지 복잡다단한 역사를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이미지-로드니 킹의 구타 장면과 LA 시가지에 작은 화염이 점처럼 박힌 모습을 방송국 헬리콥터가 멀찍이서 촬영한 장면-가 1992년 LA 폭동 사태의 지배적 기억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실 김-깁슨 감독의 <4.29> 다큐멘터리와 당시 흑인들의 소수적 감정을 다룬 시인 완다 콜먼과 소설가 폴 비티의 책들을 소환해 "착한" 한국 상인 대 "못된" 흑인 동네라는 간명한 공식(94)에 들어맞지 않는 역사의 실상을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자고 권한다. 맬컴 액스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했던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의 초상을 복원해내기도 하고, 중국계 트랜스젠더 작가 우 창이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로 성공을 거뒀지만 자신과 우정을 나눴던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내기도 한다.

'아시아계' 혹은 제3세계 작가에게 부과되었던 소수인종의 인종적 자기재현의 요청과 불화하며 모더니즘에 기울었던 자신의 미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이미지와 문자언어를 통해 실험적으로 탐구했던 차학경의 죽음,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말해지지 않았던 그녀 인생의 진실을 침묵과 망각으로부터 건져낸다.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독법은 전문가 사회에서 사장된 것에 가까울 정도로 낡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치부되지만 차학경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누구(who)인지 천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how) 쓸 지를 고민했던 작가였기에 나는 작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었다. 에밀리 정민 윤의 작품 제목대로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을 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서부터 한국군이 베트남의 하미 마을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트럼프 정권 당시 아시아 인종을 향한 혐오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피해자성'이나 '당사자성'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소수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가 누구의 적인지 규정하는 권력(257),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 삼는 권력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

<감사의 말>에 언급된 학자들 중 사라 아메드와 로렌 벌랜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딕테' 시리즈에 포함된 일원이기도 하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과 <고집스런 주체>Willful subjects, 로렌 벌랜트는 <작인한 낙관>Cruel Optimism. 딕테 시리즈에 대한 설명문에서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인종적 억압과 젠더 억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말하고 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차학경의 <딕테>에 대한 이어 말하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침묵하며 지배 언어를 그대로 받아 적었던 수동적 받아쓰기dictee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의 다른 목소리, 거대 서사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에 빙의해 듣고 말하고 쓰는, 능동적 받아쓰기를 통해 침묵을 비우고자 한다." 캐시 박 홍은 시인답게 언어, 구체적으로 영어에 대해 예민한 감각과 첨예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달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원어민'의 언어를 능숙하게 매끄럽게 모방하길 욕망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수자로서 영어를 '소수 언어'(들뢰즈-과타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영어 내부의 이질성, 차이를 현시하고 여기서 문학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내고자 한다. 딕테 시리즈의 서술처럼 수동적 받아쓰기가 아닌 능동적 받아쓰기,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조'theoria의 공간을 확보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침묵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걸 전달하는 모더니즘의 문법을 넘어 그녀는 침묵을 비워낸다. 테레사 학경 차의 문장으로, 에밀리 정민 윤의 문장으로,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아껴 읽고 싶었으나 더 빨리 읽어버린 이 책을 곁에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다.

+ 여성 예술가들의 우정을 그려내보고 싶다는 야심으로 자신의 대학시절의 기억을 담은 장chapter은 '어떤 배움'의 제목을 달고 있다. 에린과 헬렌 그리고 자신 사이 '애증'이란 간단한 말 안에 포섭되지 않는 우정을, 그녀들의 재능과 불안정함, 열정과 좌절을 성장소설 읽듯, 시트콤 보듯 재밌게 또 슬프게 공감하며 읽었다. 타인의 서사, 특히 고통을 착취하듯 빌려다 쓰는 글쓰기의 몰윤리성과 관련한 쟁점들이 제기되는 모습들을 지켜본 입장에서 서로의 삶이 얽혀 있는 '친구 사이' 여성 예술가들끼리 우정의 사수와 파탄의 경계선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캐시 박 홍의 시, 그리고 그녀가 영화 <미나리>에 남긴 코멘트나 글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