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세계를 넘어 -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채세린.박지현 지음, 장상미 옮김 / 슬로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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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스24 서평단에 선정돼 작성한 서평입니다.


디아스포라. 산포된 자. 자신이 살던 땅에서 추방당한 뿌리뽑힌 존재 혹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타지에 이식된 존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기억은 조금 낯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멀게는 100년 전, 일제 식민치하에서 조선인들은 만주로, 일본으로, 하와이로, 멕시코로,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다. 가깝게는 50년 전만 해도 지방의 아이/청소년/청년들은 농촌으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수혈받아 노동집약적 산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뿌리 뽑힘‘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치하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미국을 포함해 외국으로 떠밀리듯 이주를 감행해왔다.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한국인들이 더 이상 정치적 난민의 입장으로 대규모의 이주를 떠나는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디아스포라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탈조선‘을 한 국외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주민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한국 땅을 찾은 국내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있다.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민, 새터민, 불법체류자 등 이미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이웃들이 있다.

시리아, 예멘, 아프가니스탄. 세 나라의 공통점은 최근 내전 등으로 인한 국내정치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한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난민에 대한 인도적 책임을 지기 위해 난민을 수용하는 쪽과 난민을 적극적으로 타자화시켜 혐오하는 방식으로 쇄국 정책을 펴는 쪽 중 한국은 대체로 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인권에 기반을 둔 보편적 인류애와 국가이익과 국민정서에 기반을 둔 배타적 민족주의, 환대와 혐오, 다양성을 포용하고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성숙한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현실은 이렇게 이분법적 잣대로 분별을 하기 힘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테고, 점점 더 개인화되고 부족적으로 분열하는 공동체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도덕적 합의를 도출해내기 힘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거대한 질문 대신 초점을 작은 개인에 맞추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답변을 얻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한국사회의 일반성과 평범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낯선 타인의 이야기를 얼마만큼 경청할 수 있는가. 나와 상관없는, 혹은 그렇게 느껴지고 인식되는 타인의 이야기에 무관심한가,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긴 하지만 거기서 멈추는가, 연대의 사회적 기술을 실천할 수 있는가. 고정된 답을 확실하게 꺼내놓긴 힘들 것 같다. 나 하나 건사하기 때때로 벅찬 세상에서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를 지키자는 태도를 견지하려 한다는 정도의 답을 대신 건넨다.

사유화된 위험, 유동하는 공포에 휩쓸려 매몰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조절하고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타인들과 함께 더불어 즐겁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하고, 타인의 고통과 이야기에 감응할 수 있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시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마음이 맞고 고민거리가 비슷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표면적인 논리의 형태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친구들이 여성 동료 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증언해준 서사를 통해 내가 서 있는/있었던 위치와 그들이 서 있는/있었던 위치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깨달았던 것처럼.

[가려진 세계를 넘어]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한 내적 동기가 두 가지 있다. 대학 시절,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활동했던 다문화탈북자가정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탈북자 가정 출신의 중학생과 멘토/멘티의 관계로 만남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언어 능력을 한창 발달시켜야 할 시기에 이사를 자주 다닌 영향으로 말이 어눌해서 중학생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또 탈북자라는 프레임에 맞춰 중학생 아이를 대하고, 얕은 호기심으로 가족사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탈북민 출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제각각 다르겠지만 미디어에 노출되고 소비되는 유형과는 다른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들어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현재 내 신분과 관련이 있다. 군 복무를 하고 있는 군인으로서 북한을 직간접적으로 의식할 기회가 잦다. 군사훈련이나 교육을 받을 때면 ‘주적‘으로 북한을 호명하게 되고, 가끔 통일의 파트너 혹은 짝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통일대박론부터 세금 폭탄 및 사회 혼란의 디스토피아적 전망까지 북한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서 북한 인민/시민의 자리는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3대 세습의 독재 체제 아래 고통받는 북한 시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어 온 북한 시민들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고 대화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빠져 있는 관점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하지만 철의 장막은 여전히 한반도의 허리에 굳건히 세워져 있다. 군사적 대치 상황을 뛰어넘어 더 이상 한민족이란 집단기억에 기반한 통일의 당위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가 품고 있는 마음의 분단, 마음의 장막을 걷는 일이 더 요원할 지도 모른다. ‘두 여성의 이야기에 담긴 두 한국의 역사/부조리 너머, 화합을 위한 열망의 증거를 보여준다‘는 책 소개글에 마음이 동했다. 손쉽게 화해나 통일, 용서를 말하는 이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두 여성이 함께 지어낸 공동의 서사와 그 이면에 자리한 공감과 이해의 제스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게 [가려진 세계를 넘어]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두 한국여성이 새로 뿌리내린 장소와 만남의 장소, 뜻밖의 물리적 언어적 국경의 월경/번역이었다. 이 책은 영국에서 북한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인권운동을 펼치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 박지현과 프랑스에서 자라 영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채세린이 국제엠네스티 캠페인을 계기로 만나 채세린이 박지현의 이야기를 채록한 구술사 작업의 결과물이다. 옮긴이의 말에 적힌 내용대로 불어로 집필된 [두 한국 여성]이 영어로 한 번, 영문번역본이 한국어로 한 번 더 언어의 국경을 넘는 여정을 거쳐 한국 독자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매매혼을 통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떠나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재탈출을 시도해 중국에서 고비 사막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박지현의 처절하고 핍진한 가난과 고통, 여성으로서 당한 폭력의 증언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자체로도 북한 현실에 대한 르포이자 자서전적 자기서사로서 좋았지만 나는 책에 미처 적히지 못한, 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이 사이를 오간 표정과 침묵에 관심이 갔다. 여전히 신변의 위협 가능성이 남아 있긴 했지만 겨우 되찾은 안온한 일상과 평범한 행복의 생활을 포기하고 직면하기 끔찍히 고통스러웠을 기억과 대면해야 했을 박지현이 지새웠을 차가운 밤의 시간들. 같은 ‘한국‘‘여성‘이었기에 박지현은 말할 수 있었고, 채세린은 들을 수 있었다.

고난의 현대사-80년대부터 이미 ‘고난의 행군‘이 예고되었던 북한에게는 좀 더 가혹한 형태로 실현되었지만, 온정적 가족주의-가족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박지현에게 가족은 좀 더 복잡한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한과 정-한국인 특유의 심성(망탈리테)이라고 보기에 미심쩍은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의 ‘케미‘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던, 여성-두 개의 한국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분열된 두 세계에서 같은 여성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웃었을.

이런 책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만남, 이런 대화가 없었더라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이야기, ‘가려진 세계를 넘어‘ 우리를 연결시키고 확장시키는 이야기. 잘 듣고, 잘 옮기는 ‘기록자‘들이 좀 더 조명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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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이환희.이지은 지음 / 후마니타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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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님의 출판하는 마음에서 처음 이환희 편집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소영 선생님의 책읽아웃 방송에서 지상에서 이환희 편집자의 마지막 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만든/만들었을 책들을 계속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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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포트 - 탈코르셋부터 소수자 차별 금지까지, 기자 4인이 추적한 우리사회 변화의 현장들
김아영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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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난 5년 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페미니즘 운동이 가져온 변화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20대 학생인 내게 공부대상인 문학 장의 전반적인 기조와 분위기부터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과 몇 년 전에 흠모했던 작가와 작품 들이 다르게 읽혔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꼼꼼히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눈치 보고, 망설이고, 부끄럽고, 소외감이 들었던 지난 날을 위로해준 반면 페미니즘은 남성동성 사회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괴로움을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체제의 수혜자이자 가해자로서 내 치부를 아프게 찌르곤 했다. 처음 내가 페미니즘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입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진보와 해방의 학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보편적인 지식이자 교양으로서 페미니즘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으나 현실의 디테일한 이슈에 대한 입장을 세우고,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상대방과 대화/토론을 할라치면 곧잘 난관에 봉착했다. 되돌아보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든 '상황적'이든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영역과 정치-운동의 영역, 일상의 영역은 각기 다른 층위와 맥락을 지니고 있고, 이를 섬세하게 매개하지 않고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식으로 환원주의적 해석을 가하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규범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 곧 대안적 남성성의 정립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고, 일상의 다양한 맥락에서 여전히 규범적 남성성을 요구받거나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또래 남성들과 얘기할 때면 내 포지션은 페미니즘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대부분 여성)과 얘기할 때면 친구들의 의견이 과격하거나 급진적이라 느껴질 때가 꽤 있었다. 재밌는 지점은 전자의 상황에서 나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언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의 상황에서 나는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돼서 내면에서 조용하게 홀로 논쟁을 이어가거나 고민에 빠지곤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언행, 동성애자-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스스로 혐오나 차별이라고 생각/인정하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욕구')를 대학원 밖에서 만난 남성들이 드러냈을 때 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문제들을 크고 작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존재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말할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말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어서 말을 삼켰다. 결과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고, 장문의 카톡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서 상대방에게 손절당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이슈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의 차이, 그동안 암묵적으로 묵인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관습이 문제화되면서 많은 연인들이 갈라섰던 것처럼.

[페미니즘 리포트]는 이렇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약 5년 동안 지금까지의 세상이 누군가의 불편함과 고통, 희생을 통해 유지돼온 평화였는지 묻기 시작한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를 바꿨는지 최전선에서 현장을 기록해온 기자들의 보고서이다. 탈코르셋 운동, 디지털 성범죄, 여성 노동, 소수자 차별금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덕분에 경쾌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되었고, 각 챕터 말미에 기자님들이 쓴 산문에서 자연인-시민으로서 고민과 기자로서 직업정신-문제의식이 교차하고 합쳐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여성 혐오, 성적 대상화, 시선 강간, 꾸밈 노동, 유리 천장, 핑크 택스, 감정노동, 가스라이팅, 페미사이드, 성인지 감수성 같은 말들이 더 이상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됐다(개인적으로 핑크 택스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개념-지식은 구성된 현실을 또렷하게 지시하고, 현실을 다르게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존 사회질서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었는지 마치 빛의 굴절원리를 깨달은 것처럼 익숙한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주인'과 '바깥 양반'이란 말이 차별적인 인식에 기초한 표현인지 안다(필요하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서양철학의 여성혐오 전통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더 이상 예술가의 데뷔작을 '처녀작'이라 부르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 불러온 인식과 감수성의 변화는 규범적 여성성에 종속돼왔던 자신의 몸을 주체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용하자고 하는 탈코르셋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법적 판결을 내려온 사법 시스템을 바꿔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시키는 범죄 기록물을 야동이란 이름으로 생산, 유통, 소비해온 범죄자-공모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 사회적 상상력으로 이어져 동물을 비롯한 비인간존재, 성 소수자(LGBT), 장애인, 생태 이슈로 연결, 확장하기도 한다. 본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고 모두가 인간적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고. 각자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의 정의는 다를 수 있겠지만 기성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에 부치는 주변부의 목소리로부터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해왔다. 역사의 진보는 나선형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말을 상기해본다면 4부에 배치된 차별금지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다음 리포트에서 차별금지법안 통과가 2020년대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될 거라 믿는다.

본문에 소개된 일화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에서 한 남성은 기자님에게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이 있다며 이 장벽을 뛰어넘고자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동기를 밝혔다고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는 순간 오해와 불화에서 오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쉽게 대상화된 인식-편견의 재생산과 혐오로 이어진다. 한쪽에서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무지를 향한 열정이 들끓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타자를 이해하고자 번역의 모험을 감행하는 마음이 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내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 비인간존재를 포괄한 '지구생활자'의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이 퍼져나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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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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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학창시절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요.

아마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재밌었고 소중하지만 입시경쟁을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많을 거라 예상된다. 굳이 되돌아간다는 가정할 것 없이 그 시절이 좋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바꿔 물어보면 어떨까. 아마 힘들었지만 좋았다, 재밌었다는 답변이 다수 의견이지 않을까 싶다. 회고의 대상-현재에 몸을 단단히 고정해두고 되돌아본 학창시절은 강렬하게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정서적 보정(미화)이 크게 가미된 결과일 텐데 이는 학창시절 겪은 진한 우정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다. 감정의 호오를 떠나 농도와 강도의 차원에서 극점을 찍은 탓에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힘들었지만 좋았던/재밌었던 시절'로 요약되는 감상은 야근/특근/과로에 해당하는 공부량에서 오는 피로와 입시 스트레스, 고민을 비슷한 입장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로부터 비롯된다. 사회에 촘촘히 구획된 위계질서와 차별이 덜 했고, 계산하거나 가면을 쓰지 않더라도 편하고 자유롭게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공동체였다고 학교를 기억하는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 억압과 폭력 속에서 방향성이 비슷한 목표의식을 공유하며 시험, 입시 같은 의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깊은 유대감과 동질감을 공유하게 된다. 부모/교사와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 솔직한 소통을 나누기 힘들고(자식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모가 드물기도 하고, 자식 입장에서 자신에게 큰 기대와 투자를 하는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걱정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하기에), 현실이 가하는 압박의 강도에 비해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도 제한적이기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에게 진심이 되는 것이다.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뜨겁고 끈적한 우정의 세계는 최은영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평온하고 평화롭기보다 처절하고 절박하다(김혜리).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친구'라는 느슨하고 헐렁한 범주 내부에 다채롭고 복잡하게 존재하는 우정의 스펙트럼에서 특정한 좌표에 안착하기 위해, 특정한 방향으로 위치를 이동시키고자 투쟁한다. 소심하고, 욕망을 유예하고 포기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주로 서운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게 개인사를 들려준 여성들은 '우정에 진심인' 이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상대방에게 따지고, 난리 치고, 싸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를 1순위의 절친으로 꼽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뜨겁고 끈적한 감정이 한몸에 뒤엉켜 있는 마음끼리 온몸으로 부딪친 끝에 '우리'를 완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절하고 절박한, 그래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드라마(혹은 비극적이고 처연한)가 풍부한 우정의 세계(그리고 퀴어한 관계적 욕망의 세계)가 과소하게 재현되는 이유는 이성애 중심주의 및 이를 제도화하는 사회문화적 관습, 규범이 강했던 탓이다.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9월호>에서 최은영 소설가는 연애 관계만 하더라도 관계가 제도화된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연애가 이성애 정상가족을 형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결혼으로 가기 이전 단계로서 받아들여져서다. 이에 반해 친구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애정을 바탕으로 감정과 욕망이 그 사람 자체를 향하는 측면이 강하다. 성애화된 존재나 성적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상대방의 호감과 마음을 얻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닌 마음을 드러내보이고 건넨다. 상대방과 심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내 마음을 한 걸음씩 내딛는다. '나'라는 사람만 놓고 상대방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부탁하고, '상대방'이란 사람만 놓고 내 세계에 (어느 지점까지) 받아들일지 판단한다. 우정은 그런 점에서 진검승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검을 맞대 승부를 겨루는... 검의 자리에 취향, 성격, 가치관(세계관), 유머 감각, 정체성 등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고 나서 처음 사귄 친구에게 각별한 감정이 꽤 오래 갔다. 5학년부터 반이 달라지고,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 함께 한 시간 자체는 적었지만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면 정말 반가웠다. 얼굴을 보자마자 2-3년씩 공백을 무색하게끔 친밀감이 들게 하는 친구였다. 명절에만 만나는 친척처럼, 방학 캠프에서만 만나는 친구처럼 각자의 궤도를 돌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한 번씩 짧게나마 '예전처럼' 지내곤 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재회한 친구를 자주 보고 싶어 집에서 먼 거리에 있는 학원을 옮겼지만 (기존에 다녔던 학원이 불만족스러운 상태기도 했던 것 같다) 정작 레벨 테스트 결과 친구보다 낮은 클래스에 배정되고, 얼마 안 가 친구가 학원을 옮겨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밤거리를 걸으며 대화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학원을 옮긴 보람이 없지 않다. 고등학생 때 우연한 재회는 아마 길거리에서 이뤄졌던 것 같다. 친구는 이사를 했다며 자기 방으로 날 초대했고, 옥탑방 같이 분리 독립된 방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고, 어쿠스틱 기타가 한쪽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내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과 당구장, 노래방 같이 남자 얘들이 놀러가는 곳을 몇 번 따라다니다 교류가 단절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글을 쓰는 도중에 떠오른 사실은 이 친구가 나랑 놀기 위해 집 앞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태껏 기다리는 입장, 집에 바래다주는 입장에 주로 서 있었다 보니 날 기다려줬던 친구가 있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대부분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전예고, 연락 없이 놀자고 집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사라졌을 것 같다. 놀자고 내 이름을 부르던 친구의 목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여중과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폭력에 노출되었던 최은영 소설가는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학창시절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밝힌 적이 있다(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9월호).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고등학생 최은영은 읽고 썼기 때문에 상태가 더 나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전공하고 여성주의 교지를 만들며 글 쓰는 법을 배웠던 최은영은 대학생 박민정 (소설가)에게 한번씩 책을 보내주고, 소식을 전해줬다고 한다. 민정아, 지금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 계시대. 민정아, 지금 최승자 시인이 많이 아프시대(박민정 산문집 <잊지 않음>). 같은 지역에 산 적도,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같이 일해본 적도 없지만 21년 동안 알고 지낸 귀한 인연의 시작은 인터넷 카페였다.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총명한 사람'을 사귀는 행운이 최은영 소설가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먼 훗날 동료소설가가 되어 친구의 산문집에 추천사를 실을 수 있는 인연은 귀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괴물이 되지 않은 채로, 끝끝내 인간인 채로 건너기에 혈혈단신, '일인칭 단수'는 역부족이다. 자신의 고통을 상대화할 수 있게 하는 지평의 확장과 시점의 전환, 사랑의 태도는 타인/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타자를 만나는 상황은 친구, 연인을 사귀는 우정/사랑의 공간이지 않나 싶다. "성장이란 단어보다 생존이란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십대들의 '일주일'의 표정"을 담은 최진영 소설집 <일주일>을 읽고 나서 떠올린 질문은 조금 역설적이게도 우정이었다. 생존경쟁에 내몰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상황이 '우정의 위기', 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로부터 배태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부터 십대 청소년의 생존을 고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표제작 <일주일>은 한국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 노동의 위계적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 겪는 부조리를 증언하고 비판하는 사회고발적 성격이 있지만 내게는 추리소설로 읽혔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요일의 표정이 틀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소설, 어느 날 문득 재생된 일요일의 감정 -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13)던 그날의 감정이 "배신감이 아닌 지도 모른다"(49)고 진실의 자리가 공석으로 바뀌는 소설. 눈에 보이는 사실의 이면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여름방학의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난다는 걸,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았을 뿐이다. '나' 또한 당연히 여름휴가를 떠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귀뜸조차 해주지 않은 친구들에게 느낀 배신감은 정당한 감정이었다. 수없이 비밀을 만들어내고 공유하고, 잘못/일탈을 저지르던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우리'가 함께일 때 일어난 사고는 '우리의 잘못'이었고, '누구의 잘못'이란 없었(17)을 만큼 일심동체였으니까. 그런데 친구들과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을 시작한 '나'에게 세상은 자꾸 분리된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 휴가를 떠나는 사람과 소식을 전해듣지 못하고 홀로 기다리는 사람.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 일요일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보낼 수 있는 사람과 안전 점검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는 기계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같은 땅 위에 발 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꾸 '저기'에 있고, 자신은 '여기'에 있다. 갈라진 마음의 틈새에서 비어져나오는 기억들을 단서 삼아 추적한 끝에 마주한 진실은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가 속한 세계는 잘못되었다. 일을 했지만 회사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임금 체불 문제에 대해 교사는 취업률이 떨어지면 학교에 피해가 발생한다고 부조리를 감내하라고 타이르는 세계. 2인 1조의 작업규칙을 무시하고 홀로 안전 점검이 제대로 완료되었는지 알 수 없는 기계로 작업하지만 사고가 나면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로 되돌아오는 세계였다. 기성 사회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잘못이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기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문한 끝에 '나'가 찾은 원인은 자기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믿음. "사람의 삶이란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믿"고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말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아니라고, 아니 모든 사람의 삶을 가치 있고 소중하게 대하는 사회가 아님을 누구도 먼저 알려주지 않았지만 몰랐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나'는 "일해서 번 돈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45)이 꿈이었고,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었"(45)던 청소년이었다. 저축을 하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싶고, 차를 사서 친구들을 태우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한 청소년 노동자였다. 그런데 일은 하면 할수록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만들었고, 어른들은 일을 일찍 시작한 자신을 실패자로 바라봤다. 청소년, 노동자, 일, 돈, 꿈 - 익숙한 단어들을 한 문장으로 엮자 단어의 행간에서 낯선 의미가 솟아난 것처럼.

<일요일>은 잘못된 세계를 만들어놓은 기성 사회의 시스템과 편견에 분노 어린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당사자가 겪는 모순이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현장실습생으로 그의 정체성이 모두 설명되지 않음을, 그가 어떤 꿈을 품고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 서사가 계획한 대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이어진 회상을, 이를 재해석하는 자아의 고투를 조명한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 적이 있었던 '나'는 이제 자신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세상에 기만당해 감정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날들을 통과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까. '나'가 자기 삶의 서사에 대한 편집권을 회복해 자기 뜻대로 꿈을 꿀 수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뜻대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사소해보이는 행복이나마 정확하게 정의내리고 추구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존엄이 지켜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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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 지방대를 둘러싼 거대한 불공정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50
제정임.곽영신 엮음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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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지방대, 학벌주의를 주제로 한 신간이 오랜만에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3년 전에 읽은 <복학왕의 사회학>을 마지막으로 독서의 맥이 끊긴 상태였다.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가 나오자마자 주문해서 읽었다. 기획연재기사를 엮은 책이라 단행본에 기대하는 논리의 정합성이나 담론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긴 했다. 대신 지방대와 학벌주의라는 이슈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전체적인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밑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방대를 둘러싼 거대한 불공정'이란 부제가 시사하듯 지방대 소외, 지역 격차(불평등)를 중심으로 한 논의였다. 서문에 제시된 집필의도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지방대 소외가 비정규직 등 일자리 격차로 심화한 ‘경제적 불평등’과 서울 중심의 불균형발전으로 인한 ‘지역적 불평등’이 중첩돼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피라미드에서 한 칸이라도 나은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노동시장에서 좀 더 나은 출발을 가능케하는 학력·학벌에 관한 집착을 낳고, 이 경쟁에서 실패한 이들을 차별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1960년대 이후 서울 등 수도권에 모든 자원을 몰아준 불균형발전 전략이 지방 소멸과 지방대 소외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 자체의 개혁뿐 아니라 일자리 격차 해소, 증세·복지 확충 등의 경제적 불평등 완화 정책과 국토균형발전 전략 등 지역적 불평등 완화 정책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13)


요컨대 지방 소멸과 지방대 소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지역적 관점'이 강한 책이다. 내가 지방 소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방 중소도시가 독자적 경쟁력과 고유한 개성을 갖추지 못하고 관광산업에 크게 의존하거나 그마저도 안 되는 경우 발전이 정체된 상태에 머문다. 과거 제조업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융성했던 지방 대도시들도 제조업의 쇠퇴에 직격탄을 맞아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책으로 양승훈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가 있다. 이 책은 산업도시 거제의 빛과 그림자, 즉 제조업 분야의 블루칼라 남성노동자가 가부장으로서 생계부양을 책임지고, 여성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머무르는 성별 분업의 가족 모델이 가능했던 과거에서 경제적 토대의 차원에서나 문화적 차원에서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더 이상 꿈꾸기 불가능해진 오늘을 조명하고 있다. 지방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로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도모하기 어려워진 환경에서, 소위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산업구조의 변화 - IT 분야 일자리들이 서울/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조선회사의 서기로, 서울로 각자 뿔뿔이 흩어졌던 <땐뽀걸즈>의 멤버들처럼 내 주변에도 지방에 남거나 서울로 이주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인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추상적으로 여겨졌던 지역 불평등의 문제가 피부로 생생하게 체감되고 이런저런 질문들이 남곤 했다. 서울 소재 대학에 나온 친구는 취업을 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이었기에 서울 잔류에 필사적이었다. 지금은 교사가 된 친구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수도권에 위치한 친척네에서 생활했다. 스터디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한 학원 알바부터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을) 서울에 있는 친구/지인을 만나는 것까지 수도권에 남아 있기에 가능한 활동이었다(취업박람회, 스터디, 공모전, 경시대회 등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지역에 따른 기회의 차이가 극심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나온 이들에게 지방시민의 삶을 가정/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난이도의 과제일 거라 생각된다. 서울 토박이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비서울에서 살기 힘들 것 같다고, 그래도 한국에서 서울이 제일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나도 서울이 좋다. 살아보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지방 소재 대학을 나온 동창들 중 서울에서 방송계 일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이들도 있고, 지역신문사에 취업해 대학 소재의 지방도시에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이도 있다. 방송계 일을 하는 이들의 경우, 학과 동기로 친하게 지낸 덕에 같이 살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생면부지의 룸메이트를 구하거나 주거의 질이 상당히 떨어지는 원룸에 살아야 했을 테니까.

만약 나도 수도권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살았더라면 대학원 진학을 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인문 계열 대학원 전체가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방대 대학원은 좀 더 전망이 어둡다고 들어서다. 서울 잔류가 절실했던 친구가 고향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영화학도로서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대도시가 그나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나 고루한 젠더 의식에서 탈피해 도시적 근대성과 세련된 예절이 통용되는 공간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하기 위해' 지방근무를 기피한다는 세간의 말에 사태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실이 들어 있다. 연애 상대를 찾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교육시키고) '행복의 약속' 혹은 중산층 내지 화이트칼라 가족의 유토피아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주택문제가 심각하기에 서울에서 거주하고 생존하기 만만치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종종 지방도시를 여행하면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포맷이나 풍경이 그대로 옮겨와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서울 따라하기(좁히면 '강남 따라하기')의 일률적 원칙이 지역의 역사와 특색을 지우고 서울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사품으로 전락시킨 결과다. 불균형 발전, 압축성장, '따라잡기caught-up' 근대화, 중앙집중형 권위주의 체제 - 여전히 망령처럼 잔존해 있는 구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함에 있어 생태, 젠더와 더불어 지역은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전개된 문제의식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지방 소멸의 위기(서울/수도권의 인구가 타 지역 전체의 인구를 역전). 국토 불균형 발전에 대한 비판과 균형 발전으로의 전환을 촉구. 그러려면 지역의 인재들이 서울/수도권으로 유출되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조성이 요구됨. '대학의 공공성' 기능을 살려 지역 커뮤니티/지방 도시에 기여.

- 피라미드 식으로 위계화된 차별적 노동시장. '바보야, 문제는 불평등이야'. (이 책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비판의 논지가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구분했던 현실적 능력주의를 향한 것인지, 이상적 능력주의를 포괄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 파악을 하지 못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벌(자매품으로 수능점수)이 물화된 자본으로, 능력을 입증하는 능력으로 기능하여 차별을 양산함(고용, 승진, 인사평가 등등). 책에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같은 업무능력을 가진 경우, 혹은 업무능력이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지더라도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우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지적 격차의 사회사/문화사'(천정환 - <대중지성의 시대>에서 미네르바 사건을 다룬 바 있음). 격차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격차에 따른 차별을 긍정하는 분위기에서 혐오는 필연적으로 발생함. 자유롭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파괴하여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짐.

- 학벌주의 내지 대학 서열주의의 대안으로 국공립 대학 네트워크 등이 있음. 일정한 수준의 학습능력/수학능력이 입증되면 제비뽑기/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대학을 배정하는 방식. 서울 소재 사립대학과 비교해 점점 위상과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지방 국립대학의 부활 도모. 서울대는 학부교육을 하지 않고 대학원 중심의 연구 특화 기관으로 전환(하지만 서울대를 비롯해 서울 소재 사립대학들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거센 저항이 예상되고, 중산층 이상의 기득계층 또한 현재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자신들이 경쟁에 유리한 조건임을 알기에 변화/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할 것으로 예상됨) '인구 절벽'이라 명명되는 학령 인구의 감소로 지방대 소멸 및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어떤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대학을 다시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 대학 개혁은 초중고 교육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침. 부모의 소득수준과 거주 지역이 자녀의 대학을 결정하는 세습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만큼 불평등을 완화하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기 위한 변화가 필요함. 혹자가 말했듯 돈도 실력, 부모도 스펙이 되고 있는 실정이기에.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라는 고전적인 사회학적 명제의 확인에서 더 나아가 코로나 시국에서 교육이 불평등의 격차를 확대하고 있음이 확인된 만큼 교육 개혁이 필요함(제일 어렵지만...).

[능력주의]

박권일 작가는 한국사회에서 지방대 혐오가 심해지는 이유 중 하나로 ‘과잉 능력주의’를 꼽았다. 그는 “지방대에 다니는 것이 그 사람의 다양한 능력을 곧장 대변해주는 바로미터가 아닌데도 사회가 공부와 시험 등 몇 가지 한정된 능력만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입시 성적으로 ‘학벌 피라미드’의 아래 칸에 위치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당연시된다는 얘기다. (35)

박남기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절대적인 믿음으로 퍼져 있는 ‘실력주의’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취라는 이유로 승자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보상과 패자에게 주어지는 극심한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실력주의가 가져온 불공정과 평등을 직시하고 그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실력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갖춰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능력과 집념과 같은 ‘천부적 운’,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와 같은 ‘사회적 운’, 그 밖에 뜻밖의 행운과 같은 여러 가지 비실력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엘리트나 큰 이익을 얻은 대기업은 과도한 보상을 당연시할 게 아니라 자신의 성취를 사회 또는 타인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활력을 위해 어느 정도 차등은 있어야겠지만, 지금처럼 승자독식에 따른 극심한 격차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드시 줄여나가야 합니다.” (75-76)

학벌이 민주시민의 자격과 역할까지 침해하는 현상이 한국에 유독 심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교육이 희망이다>(2017) 저자 장은주 영산대 성심교양대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잘못된 능력주의 속에서 시민적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진단한다. 그는 “능력지상주의는 능력 있는 승자만 존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면서 그렇지 않은 절대다수의 패자는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킨다”며 “이 때문에 많은 지방대 출신이 자존감을 상실하고 사회정치적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103)

“한국 교육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능력주의’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원리를 가르치고, 시험을 통해 서열 높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능력으로 여기며, 그에 맞춰 지위와 재화를 얻는 게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 능력이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소질과 소양, 또는 천재성이라기보다는 한국 시험체제에 잘 적응하는 것을 말하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거의 비례합니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사회를 정의롭고 공정하게 만들기보다 불의를 정당화, 영속화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습니다.” (243-244)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과)


[지방대 혐오/소외 와 학벌주의 ]

20대 국회에서는 지방대 문제와 관련해 학력차별금지법, 출신학교차별금지법 등 5개 법안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학력·출신 학교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학력·출신 학교를 이유로 고용, 국가자격 등의 부여,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의 영역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한다”고 못 박았다. (39-40)


노동경제학에서 통계적 차별이란 고용주가 개인의 역량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을 때 인종·성별·출신 학교 등 제한된 정보를 활용,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수하다는 기존의 경험과 고정과념을 바탕으로 차별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차별당하는 집단은 실력을 갖췄더라도 충분한 기회와 보상을 얻지 못하고, ‘해도 안 된다’고 낙담하면서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악순환을 겪는다. (74-75)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은종 선임연구원은 “지방대생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다수의 지방대 출신이 취업할 때뿐만 아니라 취업 이후에도 업무, 승진, 배치 등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대학서열에 따른 차별적인 프레임 자체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75)

연세대 사회학과 김왕배 교수는 <한국의 교육열>(2014)이라는 논문에서 고등학교들이 명문대 보내기에 매달리는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대학의 평판 서열이 그 어떤 나라들보다 극단적으로 획일화되어 있어 지위 성취와 재생산을 위한 견고한 상아탑이 세워져 있다. 한국사회에서 단순히 학력이 아니라 연고주의적 학벌의 개념이 적절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 대학의 특성은 사라지고 중고등 공교육 기관은 서열화된 대학으로 학생들을 진학시키는 것이 제1순위 목표가 되어 있다. 교양과 예술, 인격 수양과 민주시민의 양성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 그것도 서열화된 대학으로 학생을 진출시키는 것이 명문 학교로 평가받는 길이다.” (108-109)

최근까지 한국 교육 정책의 방향은 김영상 정부의 ‘5·31 교육개혁’에 기초했다. 지난 1995년 수립된 5·31 교육개혁은 초·중·고교와 대학까지 포괄하는 거시 교육 정책으로, 자율성과 다양성, 세계화를 목표로 22개 분야 120여 개 과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세계 속 경쟁력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교육 경쟁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약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주요 정책인 대학설립준칙주의(최소 요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인가해주는 제도), 국립대 법인화, 특수목적고 및 자립형사립고 설립, 사학의 자율성 확대 등은 대학의 난립과 교육 서열화를 촉진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대학설립준칙주의 도입 이후 일반대학 수는 1996년 134개에서 2014년(제도 폐지) 189개로 55곳이나 늘었다. (247)


시민단체 교육을바꾸는사람들 이찬승 대표는 “5·31 교육개혁은 그 당시 국내외 분위기를 반영해 공급자 중심의 교육에서 소비자 중심의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조하고 학교 다양화, 수준별 교육과정 도입 등 시장주의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는 공공성 차원에서 교육을 긴 안목으로 보지 못한 면이 컸으며, 그 결과 학교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되고 계층 간 격차를 더 벌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고 평가했다. (247~248)


심승환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또 “지방대 차별과 소외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 학벌에 따른 경제적 보상의 불평등, 명문대를 명품처럼 여기는 문화적 계층화, 학벌·학연의 정치 세력화 등 한국사회 정의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단순히 교육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회정의교육을 통해 공동체성과 협력, 소외 주체에 대한 배려 등을 강조해나가면 큰 틀에서 학벌 문제를 극복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52)

[불평등]

대학교육과 일자리 등에서 ‘결과의 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과정의 공정’에 더욱 집착이 커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시 공정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 진전시켜야 할까?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의 공정은 상위 20% 집단을 위한 것으로,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빈약하고 납작한 개념이 되어버렸다”며 “공정이 정의의 원칙으로 넓게 확장되기 위해서는 평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학교 간 서열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학교 간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20)


한국 교육에서 승자가 자원을 독식하고 그로 인해 더 강력한 승자가 되는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등이 소수 상위권 대학과 학생들에게 각종 재정지원을 몰아주어 더욱 유리한 여건을 만드는 사이, 대학서열이 낮은 대학은 지원에서 소외돼 교육환경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133)

황갑진 경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는 <사회 불평등과 교육>(2018)에서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권력, 돈, 명예와 같은 사회 희소가치를 얻을 기회가 주어지는 명문 학교 입학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학교가 학부모나 학생들의 성공 욕구에 편승하여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중한다”고 지적했다. 과열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역시 ‘일자리’가 양극화되고 불평등이 확대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서울 명문대’ 등에 집착하는 학벌주의를 완화하고 지방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과도한 노동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190)


장근호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이 2018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고용구조의 특징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2000여만 명 가운데 대기업·정규직에 근무하는 1차 노동시장 종사자는 213만 명으로 10.7%에 그친다. 2차 노동시장 종사자는 1787만 명으로 89.3%였다. 양극화한 두 시장 간에는 이동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3년 후 정규지긍로 전환될 확률은 22%에 불과했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치다. (191)


양준석 대전세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자리 격차를 줄이기 위해 우선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법파견(파견이 금지된 제조업에서 위장도급 등을 하는 것), 납품단가 인하, 기술 탈취, 시장 독과점 등 불공정 행위를 없애 중소기업이 정당한 이윤을 확보하고 적정한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임금을 회사가 독단으로 정하거나 노조·회사가 협상을 벌이는 등 사업장별로 결정해, 노조 교섭력이 있는 곳은 노동자 권리를 수호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임금이 적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개별 기업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연대임금 제도를 통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지향해야 한다”며 “노동자·사용자·정부가 참여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어 연대임금에 대해 논의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

[지방대생은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지금 다니는 대학 전공수업을 들어보면 교수와 학생 모두 열정을 잃은 것 같고, 강의와 과제의 양과 질에서 큰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88-89)


지방대생의 심리적 위축과 소극적 성향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대학 생활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양민옥 숭실대 사회복지학 강사의 논문 <지방대학교 대학생으로 살아가기>(2015)는 지방대생의 대학 생활을 ‘열등감을 갖고 대학생활 시작’‘열등감과 적응 사이의 갈등’‘외적인 지지가 대학생활에 도움이 됨’ 등 3단계로 정리했다. 지방대생은 성적에 맞춰 입학한 뒤 열등감 속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다른 대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만 열등감과 현실 적응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 등 외적 지지가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92)

부산 동명대 이정민 신문방송국장은 “청년이나 대학생 이슈에 대해 지방대 학생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언론에서 별로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며 “서울지역 대학생의 목소리가 대부분인 기사들을 볼 때마다 ‘왜 우리 지방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안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101)

임지윤 한국금융신문 기자 : 나 역시 지방대 출신으로서 열등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해 있다. 남들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 있다. 내 후배들은 이런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시리즈에 참여했다.(258)


박두호 단비뉴스 기자 : 정말 많은 지방대생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놀란 점은 내면에 패배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지방대생 상당수는 소위 ‘스카이’라 불리는 대학에 정부의 지원과 혜택이 몰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60)

1980년대의 대학진학률은 30% 정도였다. 전두환 정권의 졸업정원제 실시, 대학입학 정원 확대 같은 유화 조치가 적용돼 70년대에 비해 수치가 크게 증가한 결과였지만 여전히 대학생은 특혜를 누리는 특권적 계층이었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국면에서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던 경제적 특혜도 있었지만 학생운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결과 대학생 집단은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대학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는 말이다(이를 테면 야당 대표가 전대협 대표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1년 5월투쟁과 1996년 연대 사태를 거치며 학생운동 진영은 궤멸하다시피 했다고 알려져 있다. IMF 금융위기 사태를 겪으며 대학생 또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하자 각자도생, 무한경쟁, 생존주의 같은 말들로 수식되는 대학 풍경이 펼쳐졌다. IMF 금융위기 사태는 한국전쟁 이후로 한국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급격하게 바꾼 사건이었기에 대학의 변화 역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 정치가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더라면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제동을 걸고 견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대학이 공공성을 상실하고 '장삿속'을 챙기는 기업으로서 시장주의적 야망(등록금의 대폭 인상 등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오늘날 한국정치의 비극은 86 세대가 보수뿐 아니라 진보의 목소리와 상상력까지 과대대표하고 있다는 점이고, 소위 87년 체제의 정치적 상상력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대안적 상상력,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만한 정치 세력이 출현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1990년대의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세례를 받은 X 세대나 생태/젠더 같은 대안적 가치지향을 갖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MZ 세대가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을까(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질문이나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그래서 질문을 좁혀 지방대 출신으로서 내가 집중해보고 싶은 질문은 '지방대생은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이는 <한편 6호>의 권수빈 선생님의 글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능력주의에 따른 위계화된 차별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잃어버린 시민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격차를 생산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질서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 패배주의와 무기력증에 휩싸여 있던 지방대생들의 모습을 '적당주의' 레짐으로 해석하는 연구자의 오만(지방대생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 지방대생이 열등감과 더불어 체화할 수 있는 지방대 혐오에서 벗어나 '서울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역적 관점의 렌즈로 지역 불평등과 소수성을 인식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대학생들의 시국 선언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지방대생의 시국 선언이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존재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말은 공론장의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비시민이 내는 소리가 되었던 것이다. 지적 격차의 문화의 자장에서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권은 학력이나 학벌, 직업에 따라 분별된다. 최근에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정규직 교수는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비정규직 강사는 그렇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학문적 성취와 상관없이 직업/직위의 위계에 따라 지성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반지성(주의)적인지 차치하고, 이런 인식이 대학사회(교수 채용 체계, 연구자 사회의 생리)에 무지한 대중이 싸지른 댓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실제로 고매하신 교수 집단이 학벌을 근거로, 정교수/비정규직 강사 직위를 바탕으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언행을 보이는 일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내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는지 고민하다가 혐오와 조롱, 비난이 두려워 침묵을 지킨 기억이 있다.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질문을 마음 깊이 두려워했다. 명문대 출신 상대방이 학력과 학벌에 의한 차별을 긍정하는 능력주의자일 까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스스로 내가 받고 있는 '강의와 과제의 양과 질에서 크게 아쉬움'을 느끼고, 열의 없고 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학생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해 내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내 능력과 노력의 부족이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휩싸이다가도 한국 교육의 입시지상주의와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교육방식의 피해자라는 식으로 자기혐오의 괴로움을 덜어내곤 했다.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에 열심히 발품을 팔아 '순수한' 실력을 키우는 것만이 미래에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고 능력주의자로서 열심히 살았다. 언제 혐오의 대상으로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좀 더 열심히 살게 만드는 동력으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환경파괴의 비용을 발생시킨 화석연료처럼 상대방과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감수성을 해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입장에 놓여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하는 힘을 기르는 데도 큰 장애물로 기능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길이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무능해지는 길이었다. 지방대 출신으로서 겪은 경험으로부터 자기연민과 극복의 성공서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지역적 관점을 바탕으로 중심부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세상의 상식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인문적 힘을 끌어내자고 생각했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가 제기한 질문과 화두를 오랫 동안 품고 있고 싶다(요즘 지구력 있게 한 가지 생각을 오랫 동안 깊게 이끌어가는 힘이 상당히 떨어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하...).

임명묵 작가의 <K를 생각한다>를 읽으며 세계화와 정보화에 한국적 방식으로 적응한 결과 '이중경제체제'라는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노동시장이 형성되었고, 인구와 교육의 미스매치가 '학력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대학사회에 많은 사회적 재원이 투여됨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고용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같은 2차 노동시장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1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동성과 이동성(계층 사다리)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대안 제시에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현실경제'를 도외시한 좌파 경제학의 도식에 갇혀 있어서 그런 것일지, 형평/평등/필요 중 분배정의(혹은 공정)를 어떤 식으로 실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지 가치관이 선명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 어쩌면 아직 내 계급적 위치/계급성을 제대로 파악한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통장에 임금이 꽂히고, 결혼이나 '내 집 마련'을 꿈꾸게 되고(이게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인지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깨닫게 되고), 가능성이나 잠재성으로 불렸던 내 사회적/계층적 운신의 폭이 대략적으로 결정된 상황이 되면 한국사회의 현실원칙과 시스템에 대한 선명한 입장을 정리하기 조금 수월해질까? 맑스(주의) 책을 읽으면 위로를 받기도 하고, 현실에 대항할 선명한 논리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용기가 생기기도 하지만 노동자라는 집합적 정체성으로 결집해 노동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것 같다(종래의 구좌파적 정치문법에서 벗어난 다중의 자율적인 정치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고민하고 상상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으로 자신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일터를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한 곳으로 변화시키고자 투쟁하는 사람 - 그런 사람의 서사를 그려낸 소설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

p.s 요즘도 사람들이 통성명의 절차로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자매품인 '몇 학번이세요?'는 중년 세대 사이에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는지 모르겠다.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가장 압축적으로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은 학벌주의자가 아니기에 이 질문이 별다른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은 건조하고 중립적인 질문이라 여길 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이 표방하고 있는 효율성이 폭력성으로 얼마든지 전화될 수 있음을, 대졸을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디폴트 값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서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정보를 드러내라는 요구가 무례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싶다. 출신 대학이란 정보에 결부된 편견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본질을 통찰하고, 가시적 정보와 지표들이 말해주지 않는 행간을 상상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싶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출신 대학은 그다지 많은 걸 알려주지 않을 수 있다. 사고방식과 가치관, 취향과 같은 '자기표현'적 정보들로 호구조사가 아닌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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